# 128
128화.
“기분 탓이 아니랍니다!”
평범한 인간 소녀의 모습이 되어 거주지역의 오솔길을 따라 일행을 선도하며 루타가 활기찬 목소리로 설명했다.
“거주지역은 주인의 성장에 따라 넓어지니까요! 반대로 하자면, 개미굴 던전의 영역이 줄어들수록 넓어진다는 얘기이기도 하답니다!”
“좋아, 완벽히 모르겠어.”
정시우는 상쾌한 미소로 대꾸했다. 다만 적어도 개미굴이 하늘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자신에 의해 변화해 가는 공간이라는 사실만은 잘 알 수 있었다.
“그 인식으로 충분해요! 개미굴의 변화의 주체는 언제나 영주님입니다!”
무려 37만 개가 넘는 던전들을 통합하여 클리어하기는 했지만 각각의 던전들의 영향력은 극소한 편. 따라서 거주지역이 터무니없이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네 배 정도일까.
“충분히 터무니없네.”
“여태 못 보던 식물들이 자라나고 있네요, 오빠. 아, 혹시 우리가 클리어한 던전의 특성을 닮는 것이 아닐까요?”
“예리한 지적입니다. 바로 그렇답니다! 저희 요정상인은 거주지역에 자라나는 갖가지 식물과 광물을 대신 채집하여 가공하는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으니 언제든 이용해 주세요!”
“비드를 받겠지?”
“물론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유령들이 물리력만 잘 발휘할 수 있었더라면 그 녀석들을 부리면 되는 건데…… 정시우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느덧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케이나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쩌면 그들은 주인님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을 돕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처음부터 이 거주지역을 활성화하는 것을 돕는 존재가 아닐까.]
“글쎄, 저 녀석 설명에 따르면 그 두 가지가 같은 것 같은데.”
[그러니 주안점을 어디에 두느냐, 가 중요한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그로 인해 최종적으로 녀석이 노리는 바가 무엇인지도…… 아니, 어차피 정시우에게 적의는 없는 것으로 보이니 상관없었지만.
“자, 여기가 좋겠네요!”
이윽고 그들은 케이나와 베토가 자신의 집으로 삼은 장소에 이르렀다. 보다 정확히는 그 근처의 공터였다.
“대장간을 짓는다면 이곳이지요. 주위에 인가도 없어 소리도 시끄럽지 않고 마력이 풍부하네요!”
“인가라곤 어디에도 없잖아.”
“필요한 모든 재료는 요정상인인 저, 루타가 이미 다 가지고 있답니다! 견적까지 이미 뽑아 놓았으니 확인해 보시겠어요?”
깔끔하게 정시우의 태클을 무시하며 종이 한 장을 내미는 루타. 그는 종이에 줄줄이 쓰인 재료의 목록을 보며 아득한 눈이 되었다.
“당최 연원을 알 수 없는 재료들을 써먹는군.”
“풀 에이지에 이른 세상에서 수거한 물건들이랍니다! 영주님께서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죠!”
뉴 에이지랑은 다른 것일까,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이니 상관없었다. 그는 대충 목록을 훑었는데, 어차피 재료를 다 파악하지 못하는 이상 보나마나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얼마라고?”
“보유하고 계신 비드의 1%만 받아 가겠습니다!”
“1%? 그거 엄청 싸잖…… 아니, 잠깐만.”
그는 통합 던전을 클리어해 어마어마한 숫자의 비드를 벌어들였다.
아무리 그래도 정시우의 운이 슬슬 한계에 도달했는지 모든 몬스터가 비드를 뱉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레벨 100을 넘기는 몬스터의 것으로만 수십만 단위를 가볍게 넘겼다. 레벨 200을 넘기는 키메라의 것도 수만 개 이상은 있었다.
“그런데 그중의 1%라고.”
“이것도 입주 기념 할인가랍니다! 풀 에이지의 물건이에요, 풀 에이지!”
“아 글쎄 풀 에이지가 뭔지를 모른다니까.”
물건의 원가 개념을 좀 알아야 흥정이든 뭐든 해 볼 텐데. 결국 정시우는 인상을 쓰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비드 줄 테니까 내놔 봐.”
“언제나 감사합니다, 영주님!”
그의 허락을 얻어 비드가 자동으로 차감되며 공터에 자재가 와르르 쌓였다. 확실히 커다란 건물을 짓고도 남을 만한 양의 자재였다.
“음, 좋아. 모두 완벽하게 왔군요!”
루타는 그것을 꼼꼼하게 확인하고는, 아직 정시우의 손에 들려 있는 재료 목록이 적힌 종이를 가볍게 건드렸다. 그러자 그것이 밝은 빛을 뿌리며 날아가 자재가 쌓인 공터 중앙으로 떠올랐다.
“어, 설마…….”
“그렇습니다!”
루타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건축 자재들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정시우의 시야에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마도 대장간 건축까지 남은 시간 ? 3:15:39:59]
“자동건설 시스템이냐!?”
“마도건축이라고 불러 주시죠! 자, 그다음은 어떤 걸 건설하시겠어요? 거주지역의 마력 용량이 높아 한꺼번에 건물 세 개를 짓는 것도 가능하답니다!”
갑자기 장르가 바뀐 것만 같다는 느낌이 정시우를 지배했다. 하지만 확실히 편하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리저리 휙휙 움직이고 있는 건축 자재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빤히 바라보는 베토의 모습에 재차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생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동생은 최고다.]
동생에게 과하게 집착하는 케이나의 말을 거르고 좀 더 베토를 지켜보았다. 베토는 대장간의 건설에 사흘이 넘게 걸린다는 것을 알고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건축 자재들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
“어떤 종류의 게임이 생각나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네요…….”
이제 생산한 건물에서 전투용 유닛이 튀어나오기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해진다.
“영주님이 특별한 구조의 던전이나 몬스터, 신의 흔적을 처치하시게 되면 건설 가능한 건물의 종류도 늘어난답니다! 영주님과 휴식처, 거주지역이 함께 성장하는 것이지요!”
“내 마음 읽지 마라.”
루타는 굴하지 않고 그에게 다른 건물의 건설을 영업하려 들었지만 정시우가 보기엔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이 없었다. 단 집안에 설치하는 가구의 경우엔 케이나의 부탁을 듣고 몇 개인가를 골라 그들의 주택에 설치하기는 했다.
“아린이 너는 필요 없어? 너도 너만의 공간이 필요하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러세요. 전 이제 나름 편해졌는걸요.”
기껏 얻은 경쟁우위를 자기 손으로 놓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단호하게 정시우의 친절을 거절하는 수아린. 그 옆에서 루타가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 이제 제가 살 집을 정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세금 얼마 낼 거냐.”
“이 악덕영주!”
입주를 허락한 것은 허락한 것이고 받을 건 받아야겠지. 정시우는 루타와 치열한 협상 끝에 앞으로 거래 시 무조건 5% 할인을 받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 5%라는 것도 정시우가 먼저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 실로 분하다.
“흑흑, 요정상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이런 손해 보는 거래를 당하다니…….”
“야 너 방금 뭐라고 했냐.”
“영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했답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재능의 소유자 루타는 대장간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숲 안에 있는 집을 골랐다. 꼭 RPG에서 맵을 뒤지다 보면 일정 확률로 찾을 수 있는 비밀상점 같은 곳이었다.
“앞으로 저는 이곳에 상주하게 됩니다. 영주님은 저를 통해 무려 5%! 5% 저렴한 가격으로 상품들을 갈취하실 수 있겠지요…….”
5%를 계속 강조하는 것을 보니 거래할 때 거짓말을 못하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던전에서 갑자기 정보가 필요할 때가 있겠지요? 그럴 때를 위해 여기 짜잔!”
그럼 그렇지, 그녀가 꺼내 든 것은 어딜 봐도 상품으로 보이는 돌돌 말린 종이였다.
“보스 룸 앞에서 요정상인을 소환할 수 있는 요정상점 이용권입니다! 이걸로 갑자기 던전에서 제가 보고 싶어지셨을 때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만…….”
“보유하고 계신 비드의 무려! 0.01%만 받고 싸게 팔아 드립니다!”
“비싸잖아!”
하지만 결국 샀다.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던전을 클리어하여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요정상인으로 인해 크게 증폭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가 앞으로도 없으리란 법이 없다. 그것을 몇 개의 비드로 해결할 수 있다면 사 두는 것이 옳다.
“그럼 가자.”
“앗, 영주님! 최소한 사흘에 한 번은 와 주시지 않으면 외로워서 죽어 버릴지도 몰라요!”
“토끼냐!”
절묘하게 태클을 유도하는 요정상인과 놀아 주다 보니 심신이 지쳐 버리고 말았다. 그는 화려한 나비 날개를 펄럭이며 깔깔대는 그녀를 냉정하게 무시하며 비밀상점을 나왔다. 앞으로 최소한 세 달은 그녀를 무시하리라!
케이나는 베토와 함께 대장간 건설 현장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지금 거주지역을 가로지르는 그의 옆에는 수아린뿐이었다.
“두, 둘뿐이네요.”
“그러게. 둘뿐이네.”
괜히 그 사실을 의식한 수아린이 볼을 붉히며 하는 말에 정시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긍정했다. 그리곤 짙은 회한이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용세하 또 빼먹고 왔다.”
“……아.”
수아린의 표정도 애매해졌다. 둘은 최대한 빨리 휴식처로 돌아갔으나 그땐 이미 명상을 마치고 눈을 뜬 용세하가 잔뜩 삐진 채 볼을 팅팅 부풀리고 있었다. 물론 전혀 귀엽지 않았다.
“이 녀석들은 또 뭔가 잔뜩 보내 놨네.”
휴식처로 돌아와 그대로 저녁을 맞이한 정시우는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비로소 폰을 집어 들었다. 대통령을 비롯해 각종 정계, 기업 인사들의 만남 요청이 쏟아져 들어와 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인간 세상에 아예 미련이 없었다.
“어머님께서도 연락하셨었네요.”
“괜찮아. 우리 엄마는 급한 일이면 전화로 안 해.”
전화로 안 하면 대체 뭘로 한다는 것인지 궁금해진 수아린이었으나 무서웠기에 묻지 못했다. 그녀가 벌벌 떠는 동안에도 정시우는 어머니를 비롯해 지인들로부터 온 연락을 대충 확인하고 대충 답장해 두었다.
“오, 드디어 33단계 던전 클리어 파티가 구성되었는데.”
“저는 이미 보았습니다. 용오름이 아니더군요.”
용세하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심지어는 용오름 길드의 수장이자 불의 신의 힘을 다루는 강자 김하룡이 개인 자격으로 파티에 참여하지도 못했다는 것이 연일 한국 뉴스에서 주목하고 있는 이슈 중 하나였다.
“실력으로 최전선에서 빠질 놈은 아니니, 적극적인 배척이 시작되었다고 봐야겠지. 김하룡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신의 힘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늘어날 테니까.”
“그렇지요. 그는 완벽히 실패했군요…….”
용세하의 인상은 쉬이 밝아지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존경심도 정도 남지 않았다고 자부하는 그였으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털어 내지 못한 무엇인가가 남은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충분히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유년에서부터 이어지는 추억은 그리도 강한 법이다.
“마리나 비셋과 세리아 윌슨은 당연히 포함되었어요. 이서희 씨는…… 아, 아직 레벨과 입장 조건이 부족해서 참여하지 못했네요.”
“하지만 34단계 던전에 도전할 땐 당연히 참가하게 되겠지.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정시우의 말에 이번엔 수아린이 볼을 두툼히 부풀렸다. 정말 서포터라고 다 귀찮은 녀석들만 걸렸다니까. 그는 양손을 뻗어 두 녀석의 머리칼을 동시에 엉클어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제 너희 둘 다 푹 쉬어라. 내일부터 또 바빠질 테니까.”
“10분 쉬고 일하자는 말이 아니라 안심했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형님.”
서포터들을 먼저 재우고 조금이라도 무기를 다뤄 볼까 생각해 본 정시우였으나, 오늘은 순순히 휴식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잠으로만 풀 수 있는 피로도 있는 법이니 말이다.
다행히도 그날 밤은 용꿈을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