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120화.
살아 움직이지 못하는 ‘척’을 하는 몬스터 가운데에는 강자도 있지만, 대다수가 던전 통합 과정에서 제 육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약한 몬스터였다.
정시우는 그 모든 것을 무자비하게 부수며 나아갔고, 결국 단순한 환경파괴범으로 오인 받을 만한 일주일의 행보 끝에야 비로소 움직이는 몬스터를 만나게 되었다.
[캬핫.]
“……뭐야.”
여태껏 지나온 공동보다 규모가 압도적으로 작은 네 번째 공동, 움직이는 바위 몬스터들로 가득한 돌산에 진입하자마자 일행의 눈앞을 가로막고 나타난 몬스터…… 그것은 바로 트롤의 몸통에 고블린의 머리통이 달린 괴상한 몬스터였다.
[키메라…… 메티모아의 작품이군.]
“메티모아?”
[킥, 캬핫. 메티모아, 그분을 아는가? 그분을?]
키메라는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일행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뒤로 나타나는 무수한 이형의 몬스터는 그들 눈앞에 나타난 키메라처럼 신체 일부가 다른 몬스터의 것이거나, 심각한 경우 바위나 나무 등의 무생물과 섞인 경우도 있었다.
[모든 신은 인간의 관점에서 보기에 좋을 것이 없는 짓만 골라 하는 놈들이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인 신이 있다면 혼돈을 사랑하는 신이다. 메티모아는 그중에서도 질이 나빠. 어울리지 않는 것을 섞어 기존과 다른 것을 추구하는 변형된 창조의 신이기 때문이다.]
“변형된 창조라, 대충 감은 잡힌다만.”
WPRC가 있던 날 뉴욕으로 향하던 정시우 일행이 탄 비행기를 공격했던 놈들을 떠올리니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어딜.”
[꾸엑!]
그는 재수 없게 웃으면서 은근슬쩍 일행과의 간격을 줄이던 키메라를 향해, 한 손을 가볍게 들어 크리티컬 불릿을 쏘아 냈다. 고블린 머리통이 단숨에 날아갔지만 이내 트롤의 목에서 다시 고블린의 머리통이 솟구쳤다. 놈은 더욱더 크게 웃어 댔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면 너는 무척 후회할 거야! 너는! 이 던전을 만들 때 그분의 은총을 따라했구나!]
“뭐……?”
정시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던전을 정시우가 만들었다는 부분은 그렇다 치고, 통합 던전을 만드는 데에 메티모아의 은총을 따라했다는 것은 대체 무슨 얘기인가.
그는 기분이 나빠져 크리티컬 불릿 두 발을 쏘아 냈다. 포신 없이도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두 발의 마탄이 각기 고블린의 머리통과 트롤의 심장을 뚫어, 다음 순간 놈을 달러와 비드의 두 뭉치 전리품으로 화하게 만들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아무래도 놈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주인님.]
케이나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주위 사방에서 키메라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쩌면 여태까지 지나쳐 온 공동은 말 그대로 기초적인 자격요건조차 충족시키지 못한 몬스터들의 무덤에 불과했는지도 몰랐다.
[그분께서는 무척 기뻐하고 계신다.]
[경솔한 인간, 너를 그분께서 친히 맞이하고 싶어 하신다.]
[큭, 쿠핫, 쿠힛.]
한 마디 한 마디 장난 아니게 기분 나쁜 말뿐이다. 끔찍한 비주얼에 어울리게 몸에 지니고 있는 마력의 질도 무척 나빠, 그저 그것과 맞닿는 것만으로 이쪽까지 오염될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것들이 섞여 꽤나 강력한 힘을 자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메티모아의 방식은 언제나 극단적이고 무질서하다. 주인님은 이전에 메티모아나 그의 추종자들과 마주했던 것이 아닌가? 되짚어 보면 이 던전의 생성방식은 메티모아의 그것과 지독하리만치 닮아 있었어.]
“키메라들을 만난 적이 있기는 한데, 그게 이 던전의 생성에 관여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던전의 통합 과정에 메티모아가 개입하여 몬스터들 대다수를 제멋대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의 흔적이 직접적으로 남았을지도. 각오하라. 주인님은 주인님의 생각보다도 터무니없는 일을 벌인 것 같다.]
그 말을 들으며 정시우는 가만히 생각했다.
그냥 귀찮게 하나 하나 돌기 싫어 던전을 하나로 합치고 들어왔을 뿐인데 신의 흔적과 조우하게 되다니, 이것은 실로 개이득이지 않은가.
[케흑, 나는 놈의 팔이 강해 보인다. 지울 수 없는 저 힘의 낙인이 보이는가?]
[놈의 손은 나의 것이다. 그분께서 더한 축복을 내려 주시리라!]
이젠 숫제 정시우를 파츠별로 나누어 가질 생각을 하며 몰려오는 키메라들. 비록 그 한 마리 한 마리는 레벨 200에 불과했지만, 숫자가 워낙에 많아 한꺼번에 몰려오니 제법 위협적이기는 했다.
“일단 이 조무래기들을 빨리 치우고 그 앞에 있을 녀석들을 찾아가 볼까.”
“저걸 조무래기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빠뿐일 거예요.”
[그러면 지금부터는 조금 힘을 내겠다.]
케이나는 마력과 육체만으로 따지면 정시우보다 오히려 강하지만, 여태까지는 굳이 그녀가 힘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고 공동을 쓸어버리기에는 정시우의 능력이 보다 적합하여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레벨 200을 넘는 키메라들이 상대라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는 것이다.
“저도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형님.”
“저놈들 뒤에 저 바위들도 다 몬스터다. 또 어디서 날아오는 거 얻어맞고 그러지 마라.”
“옙.”
힘차게 대꾸하는 용세하의 모습이 영 미덥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다. 정시우는 두 개의 해머를 손에 쥐고는 키메라들을 향해 힘차게 돌진했다. 그의 전신에는 이미 전투질주의 마나가 흐르고 있어, 크루얼 차지로의 전환도 무척이나 간단했다.
[빠르다!]
[그렇다면 나는 놈의 다리를…… 쿠에에엑!]
크루얼 차지의 돌진력, 거기에 강타의 위력까지 더해진 거랑의 앞발이 전방의 키메라 무리를 강타했다. 묵직한 추를 매단 슬레지 해머가 섬광처럼 가로지르는 궤적을 따라 몬스터 무리가 한꺼번에 겹쳐 튕겨 나갔다.
“좋아, 이놈들까지는 한 방으로 어떻게든 되는군.”
[강하다! 놈은 무척 강해!]
[역시 팔을 가져야겠다!]
키메라들은 동료가 죽어 나가는 가운데에도 환호했다. 오직 정시우가 내보인 강함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시끄럽다. 모두 죽음으로 침묵하라.]
[쿠학!?]
그러나 직후 팬텀바이크를 탄 케이나가 대검을 쥐고 일직선으로 질주하며 그 궤도상의 모든 것을 동강 내 버리자 더는 웃을 여유도 없게 되었다.
일대를 정리한 케이나가 솜씨 좋게 바이크를 조종하여(정시우도 바이크 운전을 제법 잘하는 편이었지만 케이나에 비하면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깔끔한 턴을 하자, 키메라들은 제대로 흉성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주춤거렸다.
“후…… 흐오오오오오오오!”
[켁!?]
거기에 정시우와 케이나에 비하면 못하지만 이제 레벨 200 정도의 키메라들을 상대로는 꿀리지 않는 힘을 보유하게 된 용세하의 돌진 공격까지! 화끈한 차지 공격은 비록 키메라들을 끝장내지는 못했으나 놈들의 기세를 꺾고 신경을 분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용세하가 그렇게 균열을 만들어 놓으면 정시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자비한 해머 어택으로 박살을 내었고, 기동력을 확보한 케이나는 마치 날아다니는 레이저 빔처럼 쉴 새 없이 키메라의 숫자를 줄여 놓았다.
세 명의 전투원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고 치열하게 나아가며 키메라들을 차근차근 정리했다. 고레벨의 몬스터 비드와 달러는 덤이었다.
“저기 바위 날아든다!”
“오빠, 구름도 떨어지고 있어요!”
적극적으로 움직여 그들을 공격하는 키메라들과 별개로 온 세상을 이루는 정물들이 그들의 틈을 노려 공격하기 시작하니 정말이지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오히려 정시우는 행복했다. 그가 지닌 힘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전력으로 펼칠 수 있는 지금이!
“흐아아아아아아!”
용세하의 돌격에 의해 한데 뭉쳐 바닥을 구르는 키메라들.
그들을 향해 정시우가 내지른 끔찍한 위력의 해머 강타가 번개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혀, 키메라들을 단숨에 뭉개고도 모자라 돌바닥을 폭격했다. 어찌나 강한 일격이었으면 그 순간 균열이 일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끄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와 동시에 사방에 끔찍한 괴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으앗, 산이 갈라져요!”
[주, 주인님. 설마 이 산이 그 자체로 거대한 몬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 뽀록이야! 흐아아아압!”
정시우는 당당히도 그렇게 말하며 손에 쥐고 있던 다른 망치로도 바닥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가 망치를 내리치기 전 저절로 균열이 벌어지며 헛손질을 하게 만들었다.
“엇…… 음!?”
정체를 들킨 돌산은 일부러 균열을 크게 일으켜 일행을 그 안으로 집어삼키려는 깜찍한 시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압!”
[꾸에에엑!]
[이 미친 산이 우리를 공격한다!]
메티모아라는 신이 혼돈을 사랑한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지금 펼쳐지는 일들을 사랑해 마지않을 것이다. 키메라 무리와 정시우의 싸움에 피아식별도 못 하고 끼어드는 자연지물에 돌산까지! 만물의 만물을 향한 투쟁이 있다면 바로 지금 이 광경이리라!
[주인님, 괜찮은가!?]
“형님!”
그런 난리통에 케이나와 용세하는 일단 팬텀바이크와 날개를 활용해 날아올랐다. 하늘에 떠 안위를 확보하고 나니 뒤늦게 정시우에 대한 걱정이 생겼지만, 그들이 정시우의 모습을 찾아내기 전에 돌산의 균열이 다시 닫혀 버리고 말았다.
[쿠우헤에헥!]
돌산이 괴상한 소리를 냈다. 놀랍게도 여태까지 그 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던 인간들과 키메라의 모습이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돌산이 삼켜 버린 것이다!
[쿠키키키, 메티모아 님의 은총을 받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쿠히히히!]
설마 정시우에 의해 상처를 입은 것까지 놈의 작전의 일부였던 것일까. 기겁하여 당장 정시우를 구출하기 위해 하강하려는 용세하를 그 전에 케이나가 붙잡았다.
[주인님이 저런 걸로 몸에 흠집이라도 날 리가 없잖은가.]
“그, 그랬지.”
[우리는 주인님이 지상을 정리하는 사이 나머지 몬스터들을 정리해야 할 것이다.]
[키악!?]
네 번째 공동의 하늘에도 구름과 바람을 사칭하는 은둔형 몬스터들이 자리해 있는 것은 마찬가지. 용세하와 케이나는 곧장 놈들을 향해 돌격했다.
그렇게 더도 덜도 말고 45초 정도가 흘렀을 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천둥 치는 소리가 났다.
[끄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세상이 떠나가라 고통의 괴성을 내지르는 돌산. 대충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는 용세하가 구름을 흩어 비드를 회수하다 말고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에는 어디 신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흡…… 흐으으으으…… 크하아아아!”
몸이 반쯤 돌산 바닥에 파묻힌 정시우가, 양팔을 이용해 돌산의 절반을 억지로 뜯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면, 그는 거대한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돌산의 절반가량을 들고 있었다!
“끄하!”
그리고 순수한 완력으로 그것을 반 토막 내어 각기 한 손에 들고는,
“흐아아아압!”
그것을 허공에서 서로 부딪쳐 부수고 있었다!
“이미 인간이 아니군요…….”
[새삼스럽게.]
‘Man VS Mountain’이라는 제목으로 짧은 다큐를 하나 찍어도 되지 않을까. 그는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며 그 장관을 내려다보았다. 정시우가 발을 굴러 돌산의 나머지 절반을 파괴하는 광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2주가량이 흘러 던전의 중간 즈음에 이르렀을 때, 정시우는 오래도록 잊고 지내던 존재와 재회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