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119화.
[개미굴 에이리어 Extra 1. 괴형정원]
[클리어 제한 시간 ? 5달]
“클리어 제한 시간 한 번 통 크네.”
“통이 큰 건 이 던전 규모 같아요, 오빠…… 대체 이건.”
그야 던전 37만개를 하나로 만드는 일이었으니, 단순히 던전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으리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이건 마치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 같아.”
“그러게. 얘네 좀 봐.”
정시우는 까마득한 천장의 끝을 보려 고개를 든 일행의 시선을 눈앞으로 환기시켰다. 평범한 던전의 대기실에 해당하는 안전지역, 지금은 서울역 대합실보다도 거대한 규모로 완성된 공동에 바글거리는 희뿌연 유령들!
“못해도 수만은 되는 것 같은데.”
“아, 저기서 동창회하고 있네요.”
정시우를 기준으로 하여 매우 낮은 난이도의 던전들이 통합된 것이기 때문에, 1단계에서부터 대략 25단계 이상의 던전이 모두 한꺼번에 뭉치게 되었다. 그 많은 숫자의 던전이 뭉쳤으니 던전에 묶여 있던 유령들이 서로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것도 당연한 일!
“이 무슨 초현실적인 일이…….”
[정말 특이하군. 저들은 모두 주인님의 힘으로 속박된 유령인가?]
“아니, 그건 아냐. ……어쩌면 저들 중 일부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정시우는 케이나의 단순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얼버무리듯 대꾸하고는, 초대형 공동 안에서 시끌벅적하게 웅성거리고 있는 유령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박수를 쳤다.
“일동 주목!”
[히익!?]
[갑자기 공간이 넓어진다 했더니 이젠 사람이!]
[나 저 사람 알아요! 리타이어 전에 봤어요!]
이것이 신세대와 구세대의 차이란 말인가? 정시우를 보고 그냥 인간이라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던 이전의 유령들과 달리, 정시우가 공개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두 달여가 흐른 지금에 와선 유령 중 제법 많은 이가 그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쩐지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었구나.]
[여기가 어딘지는 우리도 대충 알고 있으니까…….]
[난 모르는데!]
유령들이 시끄러웠다. 정시우는 이래저래 정신이 없을 유령들을 생각해서 조금 참았지만 곧 인내의 한계가 찾아왔다.
“다 닥쳐.”
결국 그는 용의 위엄을 사방으로 뿌려 내며 유령들을 조용히 시켰다. 그 과정에서 새로이 깨달은 것이지만 용의 위엄은 용의 감각에 의해 보다 강력해지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내부의 에너지를 정리하여 외부로 쏘아 내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무서워…….]
어쩌면 조금 지나치게 효과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순식간에 도서관처럼 고요해진 주위를 둘러보며 정시우는 작게나마 헛기침을 하고는, 이 공간과 자신의 목적에 대해 빠르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너희는 만약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빨리 부탁하고, 없거든 그냥 얌전히 있으면 된다.”
“설명 축약이 너무해!?”
“그리고, 내가 던전을 다 클리어한 후에 가능해지는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정시우는 수아린의 태클을 무시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핵심적인 사항을 전달했다.
“너희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나한테 스킬을 넘기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냐. 하지만 만약 너희가 플레이어의 사후에 탄생한 존재임을 인식하면서도 계속 존재하고 싶다면, 그땐 너희 자신을 내게 의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겠지.”
[그건…….]
[당신이 우리를 부리겠다는 뜻이잖아!]
이곳저곳에서 재차 웅성거리는 유령들. 그러나 정시우는 이번엔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강제할 일도 아니고, 오직 그들 스스로의 의지에 맡기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들 신중히 생각해서 결정해. 우린 들어가 보자고.”
“오빠, 퀘스트는요?”
“이제 굳이 그런 걸 받아낼 필요는 없어. 저들과 직접 거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더구나 수만이나 되는 유령들한테서 일일이 퀘스트를 받아 내는 것도 중노동이다. 그는 진저리를 치며 돌아섰다. 이 넓디넓은 던전을 클리어하고, 그다음에 다시 저들과 얘기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던전의 두 번째 방까지가 너무 멀었다.
“아 이놈의 공동 더럽게 넓네 진짜.”
“유령들 자꾸 눈치 주는데요.”
“확 그냥.”
여태까지는 던전에서 바이크를 탈 필요가 없었지만 이곳은 사정이 다르다. 정시우는 팬텀바이크를 꺼내어 앉았다. 수아린은 여전히 그의 품에 있었지만 용세하는 실체화하여 날개를 펼쳤다.
“형님 덕분에 마나 흡수 요령만은 늘어서 이젠 제법 버틸 수 있으니, 계속 이대로 있겠습니다.”
“좋은 선택이에요.”
어째선지 정시우가 아니라 수아린이 흡족해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밝았던 표정은 바이크 뒷자리에 갑옷 무장 상태의 케이나가 앉자 곧장 구겨졌다.
“이 여자는 뭐하는 거죠.”
[팬텀스티드를 얻을 때까지만 실례하겠다, 주인님.]
“……그, 그래.”
그래도 데스나이트 출신이라는 녀석이 바이크 뒷자리에 앉다니. 팬텀바이크이긴 하지만…….
팬텀스티드는 어디서 얻을 수 있는 것일까. 명계인가. 정시우는 그런 것들을 멍하니 생각하며 엔진에 시동을 걸었다. 케이나가 입은 갑주가 정시우의 갑옷과 부딪혀 철그럭 소리를 냈다.
[바이크다!]
[와, 짱 크다. 그런데 원래 던전에서는 현대 문물을 사용할 수 없지 않던가?]
[바보야, 저거 마나로 움직이잖아.]
[와오!]
개중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별 생각이 없는 유령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일행을 관찰하며 한두 마디씩 뱉었다. 정시우가 내보인 피어에 쫄았던 것은 벌써 다 까먹은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스로틀을 당겼다. 바이크가 맹렬한 굉음을 토해 내며 발진했다.
“먼저 진입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풀 스퍼트를 냈다간 도저히 던전 공략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적당히 시속 100km 정도를 유지하며 첫 번째 공동을 돌파하는 정시우 앞으로 나비 날개를 펼친 용세하가 스켈레톤 랜스를 들고 나서더니,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두 번째 공동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했다!
“칵!”
그리고 빛보다 빠르게 튕겨 나왔다.
“아, 진짜 꼴사납게.”
용세하가 뚫어놓은 길을 따라 돌진할 생각을 하고 있던 정시우는 급하게 바이크 속도를 줄여 솜씨 좋게 용세하를 받아냈다. 수아린이 용세하의 갑옷을 박살 내고 복부에 박혀 들어간 딱딱한 열매를 빼내고 그를 치료하며 정시우에게 경고했다.
“이건 원거리 공격이에요.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당한 것 같은데요.”
“하긴 이번에 집중적으로 가르친 건 근거리 전투였지.”
“면목 없습니다…….”
그는 녀석을 내려 주고는 재차 손잡이를 당겼다. 눈부신 스파크를 토해 내며 두 번째 공동 안으로 돌진하는 바이크!
그들이 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모를 궤도로부터 공격이 날아들었지만, 정시우는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망치를 휘둘러 그것을 받아쳤다.
작고 단단한 열매는 타격 순간 정시우의 마나를 주입받아, 날아든 궤도 그대로 솟구쳐 날아갔다. 상대 역시 마나를 주입하여 던졌기에 정시우는 자신의 마나를 이용해 그 마나를 추적하도록 조종한 것이다. 용의 감각을 익히고 나니 이런 묘기도 가능해졌다.
[칵!]
공동이 얼마나 넓은지 정시우가 그것을 받아치고 3초가량이 흐르고 나서야 저 멀리서 무엇인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확실한 손맛이 느껴졌다. 분명 죽었을 것이다.
“저격수는 한 놈인가.”
“오빠가 너무 무서워서 숨었을 가능성도 있고요.”
[터무니없는 능력이구나, 주인님. 설마 고스란히 온 방향으로 날아가도록 후려쳐 저격수를 죽이다니…….]
“너도 할 수 있지 않냐?”
[그런 장거리는 무리다.]
추가로 날아드는 탄이 없는 것을 확인한 정시우는 일단 바이크를 멈추었다. 거주 지역을 대략 열 배로 확장시켜 놓으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 하나의 완성된 소세계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아주아주 거대한 정글 같은데.”
“아뇨, 그 가운데 다른 것도 섞여 있어요. 보세요, 저 기형적으로 치솟은 바위도 그렇고, 바로 옆에 얼음 호수도 보여요.”
375,307개의 던전이 하나로 합쳐진 것이다. 던전의 환경을 하나로 정의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기이한 일이겠지.
그렇다면 그 안의 몬스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설마 마나를 중심으로 합쳐져 새로운 몬스터가 탄생했을까? 기대가 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겉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몬스터는 없는걸요.”
“그렇다는 건 약한 몬스터들이 없다는 뜻이겠군요. 형님의 강함을 알아보고 숨었다는 얘기이니…….”
“아니.”
[끄아아아아악!]
정시우는 그들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해머를 들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내려치는 동작에 언제 그들에게 접근했는지도 모르게 옆에 서 있던 나무가 끔찍한 소리를 냈다.
그것 한 방으로 축 늘어지는 나무를 다시 내려쳐 달러와 비드 루팅을 완료하는 정시우를, 케이나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나무?”
[던전 통합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몬스터의 육신과 나무가 결합한 것 같다.]
케이나가 담담하게 해설했다.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로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통합 과정에서 약한 개체는 전부 이런 꼴이 난 모양이야. 물론 일부러 이런 형태를 취한 강한 몬스터도 있을 수 있겠지.”
“여기, 우리 생각보다 더욱 괴상한 곳일 수도 있겠어요…….”
그 정도는 던전의 이름이 괴형정원일 때부터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이곳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어쩌면 용세하와 정시우에게 열매를 쏘아 낸 것도 몬스터가 아니라 나무인지도 모른다.
“좋아,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왜 그런 말 안 하나 했죠.”
두 번째 공동은 그 하나로만 쳐도 막대한 넓이를 자랑하고 있고, 그 안에만 몇 개인가의 환경이 충돌하여 혼재한다. 어쩌면 환경 자체가 몬스터로 화했는지도 모르는 상황. 그 앞에서 정시우가 꺼내 든 것은 거대화를 완료한 두 개의 슬레지 해머였다.
“일단 닥치는 대로 부술 테니까 세하랑 케이나는 그 뒤 따라오면서 정리해 줘.”
[이 막대한 곳을 전부 부수겠다는 얘기인가, 주인님……?]
내 주인님이 이렇게 무식할 리가 없어, 같은 표정으로 정시우를 바라보는 케이나. 그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했다.
“팬텀바이크는 너 빌려줄게. 바이크 운전할 줄 아냐?”
[탈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조종할 수 있다. 그것이 스킬의 힘이다.]
데스나이트로서 지낸 세월을 좋아하진 않아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 모양인지, 케이나는 제법 담담하게 팬텀바이크에 올랐다. 그러자 특이하게도 그것이 제법 폼이 났다. 반면 용세하는 그녀 옆에서 긴장된 얼굴로 랜스와 방패를 들었다.
“그러면 일단…… 전부 나와라!”
일주일의 시간이 지나 완벽하게 회복된 유령 군단이 바깥으로 모두 풀려났다. 그는 그들에게 단 한 가지를 명령했다. 바로 그가 내지르는 해머의 사정범위 안에 몬스터들을 밀어 넣는 것!
[알겠습니다!]
[당장 잡아 오겠습니다!]
그것은 실로 장관이었다. 유령 군단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임에 따라 세상을 가만히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정물들이 갑자기 그들을 피해 움직이는 모습이란!
그러나 이미 말했듯 몬스터로서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놈들은 대부분 약한 놈들이다. 놈들은 무수히 달려드는 유령들의 공세에 저항하지 못해 정시우의 해머 앞에 놓이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좋았어, 이게 진정한 몰이사냥이구나!”
“틀려욧!”
정시우가 동시에 두 개의 해머를 내뻗어 전방을 강타했다. 어떻게든 유령들을 뿌리치고 도망가려던 놈들도 있었으나 이제 와 피하기엔 그의 무기가 너무나 거대하다! 두 개의 거대 해머 강타가 직격하자 사방 수십 미터가 깔끔하게 초토화되었다.
[끼이이익!]
[도, 도망쳐.]
“너희도 갑자기 환경이 바뀌게 되어 많이 당황했을 거야. 개인적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해머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사방에서 유령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지는 바윗덩어리, 나무, 꽃, 구름을 향해 다시 무기를 내려쳤다.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러니까 최대한 빨리 안 아프게 끝내 줄게.”
만약 세상의 파괴자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수아린은 스케일이 다른 던전을 스케일이 다르게 클리어하는 정시우의 모습을 보며 언제나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러 일행은 비로소 던전의 네 번째 공동에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