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109화.
세트나크의 73마성은 제법 특이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처음 좁은 복도만 보면 일반적인 건물 같았는데, 벽을 부수고 내부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복도가 넓어지고 천장도 높아졌다.
물론 그 안에서 나타나는 언데드들의 수준도 차차로 높아졌는데, 정시우는 엘리트가 아닌 이상 언데드를 죽이는 데에는 그리 중점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괴의 여파만으로 많은 언데드가 완벽한 죽음을 맞이해, 정시우의 레벨도 1이 올라 있었다.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37%]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 : 1:37:25]
정시우의 파괴는 보다 큰 붕괴를 불러일으켰다. 1층에서 스타트한 정시우는 복도와 위아래 천장을 가릴 것 없이 부수며 나아갔고, 그 결과 성의 저층은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 파괴되어 해골처럼 앙상하게 버티고 서 있게 되었다.
“끈질기게…….”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어요. 이건…… 대체?”
그럼에도 그것이 결정적인 붕괴에는 이르지 않는다. 물리 상식 따윈 진즉에 무시되었다.
이곳이 라이아의 소신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건축 방식? 성이 너무 커서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 아니, 둘 다 아니었다. 37%에 이르는 파괴율은 결코 거짓이 아니다.
“신의 마력이야. 성의 상층에서 비롯된 마력이 하층으로까지 전달되어, 성이 붕괴되지 않도록 막고 있는 거지. 기둥이니 벽이니 하는 것이 없어도 상관없어. 그냥 마나로 틀을 고정시켜 물질을 그 안에 채워 놓았을 뿐이야…….”
마나가 세로로 세워 놓은 얼음 틀이라면 물질은 그 안에 든 얼음. 그 중간의 얼음을 빼내도 얼음이 와장창 무너지는 일은 없다. 단지 계속 그 얼음 틀 안에 박혀 있을 뿐이다.
정시우의 능력으로 마나를 빨아들이고자 해도, 성을 이루는 막대한 양의 마나가 유기적으로 움직이고 있어 그것을 모두 빨아들이지 않는 한은 성을 붕괴시킬 수가 없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마나의 활용 방식에 그저 기가 질릴 따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구인들이 따라해야 할 마도 건축 공학이지…….”
“결국 상층으로 올라가 다 부숴 놓아야 한다는 얘기네요.”
“그렇지. 그런데…….”
정시우는 망치를 위로 휘둘러 4층의 천장을 두들겨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하층과는 명백하게 다른 재질, 마나 구조가 느껴졌다.
이것들을 일일이 힘으로 부수며 나아가자면 아무리 정시우라도 마나가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5층부터는 아마 등장하는 언데드의 난이도도 팍 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위가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볼까 싶네. 어딘가에 정상적으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을지도 몰라.”
“계단이고 자시고 확인할 수도 없을 만큼 붕괴시켰으면서…….”
그는 언제나처럼 수아린의 태클을 무시했다. 그렇게 몇 개인가의 벽과 복도를 더 부수고 앞으로 나아가며, 겸사겸사 그의 냄새를 맡고 나타나는 언데드들을 유령 군단과 함께 갈아 버리며 전진하던 정시우는 더 이상 눈앞에 부술 벽이 남지 않게 된 순간 곧장 멈추어 섰다.
“이건…….”
벽을 파괴하고 나니 앞에 발을 내딛을 공간이 없다. 성의 내벽이 아니라 외벽을 부숴버려 드디어 바깥과 통하게 된 것인가? 그것도 아니다.
이곳은 분명 성의 내부였다. 그것도 성의 최중심부, 성의 핵심. 정시우는 비로소 성의 진체와 조우하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세트나크의 저력의 일부와 맞닥뜨리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도달한 곳은 공백의 영역이었다.
“정말…… 이걸 아름답다고, 해야 할지.”
“독특한 감상이네.”
그는 수아린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전진한 끝에 도달한, 아무것도 없이 넓기만 한 공간이 그곳에 있었다.
내부의 기관도 장식물도 하나 없이 위아래로 한없이 뚫려 있기만 한 그 공간은 깊이와 넓이를 쉬이 가늠할 수 없어 일견 압도적이기까지 했다.
“하늘성에는 초보자들을 위한 대도서관이 있는데, 그게 꼭 이 모양이에요. 중앙 공간이 텅 비어 있고, 원통의 내벽처럼 그 공간을 완벽하게 둘러싼 책장들 가득 책이 꽂혀 있죠. 물론…….”
“우리가 뚫고 지나온 벽 안에는 책 대신 언데드로 가득했지만 말이야.”
중간에 원통형의 공간이 뻥 뚫려 있기 때문에, 건너편을 보니 같은 층으로 보이는 공간이 있었다.
역시 하층까지는 그의 파괴 공작이 영향을 끼쳤는지 대부분 무너져 있지만 상층은 하층과 유리되어 있는 것처럼 말끔했다. 마치 마법을 보는 기분이다. 그러고 보면 마법이 맞았다.
“그런데 이 공간은 왜 이렇게 텅 비어 있는 걸까요. 저 빛 무리들은 또 뭐고요.”
텅 비어 있다고는 말했지만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위아래로 뻥 뚫린 원통형의 공간, 그 중심부에 오색으로 빛을 발하며 느긋하게 회전하는 에너지의 덩어리가 있었다.
정시우가 바로 방금 뚫고 나온 4층 복도보다 약간 더 높은 지점의 허공에 뭉쳐 있는 거대한 에너지. 성의 정중앙이 되는 지점에 저것이 놓여 있다 가정하면, 성은 거의 10층에 달하는 높이일지도 모르겠다.
“아름답다, 라…….”
확실히 그것은 가만히 보고 있자면 무척 아름다워 보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감상이 수아린에게서 나온 것은, 정시우로서는 무척 의외였다.
“하지만 너도 이미 답을 알고 있잖아? 저 빛 무리의 정체가 대충 파악되지 않아?”
“아뇨, 아닐 거예요. 아니라고 말해 주세요.”
“애석하게도 네 생각이 맞아.”
정시우는 단호하게 수아린의 희망을 박살 냈다.
“저건 유령 집합체야.”
“흐으아아아아.”
[세트나크의…… 종…… 그분의…… 향기…….]
정시우가 그들의 존재를 규정짓는 순간, 뭉쳐져 있던 에너지 덩어리가 보다 환한 빛을 발하며 아주 조금 밑으로 내려와 정시우가 위치한 지점과 비슷한 높이에서 멈추었다. 그것은 마치 그와 눈을 맞추려는 것처럼도 보였다.
[혼을…… 다스리는 자여.]
[주인님께는 손을 댈 수 없다.]
그 규모와 밀도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유령 군단이 번개처럼 튀어나와 정시우의 눈앞으로 자리했다. 73마성을 돌파하면서 레벨이 낮은 유령이 차례차례 역소환되어 지금은 고작 마흔 정도만이 남아 있었지만, 그런 만큼 다들 130을 넘기는 고레벨의 영혼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저 집합체를 상대로는 쨉도 안 되지만, 굳이 지금부터 싸우려 할 필요는 없었다. 유령 집합체는 정시우에게 흥미를 갖고 있었고 그것은 정시우도 다르지 않았다.
“너흰 어떻게 그 상태로 머무를 수 있지? 개개가 독립된 영혼일 텐데, 어떻게 해서 하나로 뭉쳐 있는 거지?”
정시우는 그것의 존재 방식에 의문을 품었다. 그가 다루는 소울 포스의 힘은 비록 시작은 아니었다고 하나 세트나크의 영향을 받아 완성된 스킬. 그에게 종속된 영혼들로부터 스킬의 능력을 강화할 힌트를 얻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독립된 영혼……? 너는…… 우리에게 자아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군.]
“뭐……?”
놈의 대꾸에 정시우는 눈썹을 치떴다. 지금 들은 말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의미를 곱씹을 틈도 없이 말이 이어졌다.
[한때 어쩌면, 자아가 있었을지도……. 하지만 그분께서 그것을 바라지 않으시면, 우리는 자아를 버린다. 그분이 다시 바라시면, 우리는 자아를 되찾는다. 종속된 시점에서…… 독립이란 단어는 의미를 잃는다.]
“…….”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디까지나 그분께서 바라시기 때문일 뿐. 우리는 거울이자 그림자, 주군의 뜻을 행하는 힘일 뿐. 하나가 되는 것도, 뿔뿔이 흩어지는 것도, 모두가 그분의 뜻에 따른다.]
정시우는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자신이 거느린 유령 군단을 훑었다. 그들은 아무런 생각도 담겨 있지 않은 눈으로 그와 마주했다. 확실히 그들은 정시우가 명한다면 무엇이든 하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에게 고유의 개성이, 자아가 없다고……? 쉬이 납득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야…… 영혼이 마치, 그냥 삶과 기록의 흔적인 것만 같지 않은가.
[물론 그분께서 원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되어 탄생하리라.]
그때 마치 정시우의 마음속을 읽은 것처럼 놈이 말했다. 주인의 의지에 따라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의 덩어리. 하지만 가능성이라는 것은, 아직 개화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영혼이니, 유령이니…… 이미 그 시점에서 생전의 존재와는 별개의 것이라는 얘긴가……?”
[바로 그러하다. 영혼은 그저 생물이 맞이한 죽음의 끝에 남은 흔적일 뿐.]
긍정되고 말았다. 정시우는 혼란에 빠져 물었다. 이미 놈이 자신의 적이라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채였다.
“그렇다면 죽은 이의 본질은 어디로 향하는 거지?”
[알지 못한다.]
“신이라 해도?”
[그분께서 다스리는 것은 죽음과 언데드.]
에너지 덩어리가 양옆으로 기이하게 늘어났다. 정시우에게는 그것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도 보였다.
[죽음 너머는, 그분의 관할 영역이 아니다.]
“…….”
세트나크는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정시우에게 그가 지니게 된 힘의 무게를 알려주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를 자신의 휘하로 들이기 위한 사전작업으로 일종의 깨달음을 부여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시우는 그것을 마냥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만났던 영혼들은 고스트뿐만이 아니었어.’
수아린, 용세하와 함께 들어갔던 던전에서 그는 플레이어들의 유령과 잔뜩 조우했었다. 물론 그들 가운데에는 원한과 분노만이 남아 폭주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던전에 귀속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동시에 정시우에게 구원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파티원들을 지켜 내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그들을 던전에서 해방시켜 준 정시우에게 스스로 복속되어 도움이 되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뚜렷한 감정을 품고 있던 이들을 단지 ‘흔적’이라는 단어 하나로 퉁 쳐야 한다고? 그럴 수는 없었다.
“설령 그들이 생전의 생물과 완전히 다른 별개의 존재라 해도…… 그들의 모습과 의지는 확고했어. 그렇다면 그것만으로 독립된 존재로서 존중할 가치는 충분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이나 다를 바 없잖아? 결코 흔적 따위가 아냐.”
끝내 정시우는 입을 열어 말했다. 저 영혼 덩어리는 논파의 대상이 아닌 격파의 대상. 굳이 말로 반박할 것 없이 쳐 죽이면 되겠지만, 지금의 감정을 입 밖에 내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내게 종속되었다 해도 그들은 뚜렷이 존재한다.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 고유의 개성을 품은 존재야!”
말로 하는 순간 분명해졌다. 그는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손등에 새겨진 소울 포스의 낙인이 한층 밝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소울 포스 스킬이 Lv3이 되었습니다. 보유하고 있는 영혼의 에너지를 보다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됩니다. 영혼 에너지의 합성과 분해가 가능해지며, 영혼의 이해도가 높아져 자신과 파장이 맞지 않는 영혼도 거둘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 초인적인 집중력이 요구됩니다.]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영혼의 실체를 깨닫고, 그럼에도 그것을 독립된 개체로서 존중하겠다고 마음먹은 바로 그 순간에 영혼 에너지의 합성이 가능해지다니? 그 현실 앞에 정시우는 차마 웃을 수도 없었다.
[역시 재미있군.]
정시우가 혼란스러워하던 그때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유령 집합체가 아닌 세트나크 본인의 목소리였다.
확실히 라이아와는 달리 굳이 번거로운 강림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등장할 수 있군. 내심 감탄하는 정시우에게 세트나크는 굉장히 의외로 들리는 말을 해 왔다.
[정답이다.]
“뭐?”
[혼을 이해하지 않고선,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선 그들을 제 뜻대로 다룰 수 없지. 혼의 단면만을 보는 자도, 그것의 핵심만을 보는 자도 정답에는 이를 수 없거늘. 역시 너는 나와 상성이 무척 좋을 것 같구나.]
“저 자식이 알 수 없는 소리만 하네.”
세트나크의 목소리가 말했다. 더할 나위 없이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마치 이전의 나를 보는 것만 같군. 네가 그 끝에 도달할 영역이, 나는 궁금하구나.]
“그 끝……?”
[자아, 그러면 어디 내게 그 자격을 증명해 보거라.]
그것을 끝으로 영혼 집합체가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폭풍전야를 예감케 하는 고요였다.
[기이이…… 기기기기기기기…….]
“오, 오빠. 저거…….”
“형님, 괜히 유령을 한데 뭉쳐 놓은 게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만…….”
“그러게.”
정시우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직후 에너지가 대폭발을 일으켜 그의 육신을 집어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