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108화.
“이건…… 정말 오빠의 후각 스킬이 아니었다면 발견하지 못했겠는걸요.”
“그렇지?”
일행은 지하에 자연스럽게 파묻힌 반구형의 일그러진 게이트를 보며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고개를 들면 까마득한 길이의 터널이 이어진 끝에 간신히 하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땅을 파는 동안은 그저 무아지경이 되어 열심히 팠던 것만 기억이 난다.
“시각 스킬로도 지하에 묻힌 것을 볼 수는 없고, 청각 스킬이나 다른 스킬로도 이걸 감지할 방법은 없었으니까 말이죠…….”
“역시 스킬은 만들어 두고 볼 일이군요…….”
정시우는 열심히 감탄하는 수아린과 용세하를 놔두고 게이트를 살폈다. 오타루에서와는 달리, 아무래도 세트나크의 파편이 직접 세계 바깥으로 뛰쳐나온 만큼 게이트에도 손상이 가 있었다.
하지만 재미난 것은 게이트에 진하게 남은 신의 힘이 게이트를 유지시키는 동력이 되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마나와 달리 그 성질이 확고하여, 아주 천천히 소모되며 버텨 주는 것.
“이렇게 되면 내가 세웠던 가설이 맞을지도 몰라. 흠…… 안 되는데, 이렇게 추리력까지 뛰어나 버리면 나한테서 정말 단점을 찾을 수가 없는데…….”
“걱정 말아요, 오빠. 오빠는 가끔씩 정말 깜짝 놀랄 만큼 재수가 없다는 확고한 단점이 있어요.”
“좋아, 그럼 들어가 볼까.”
“불리한 말은 깔끔하게 무시한다는 단점도 있어…….”
정시우는 서포터 둘을 품에 단단히 끌어안고는 게이트에 꼬리를 담갔다.
본래 그 세계의 존재만 받아들이며 다른 존재는 모두 배척하는 게이트는, 그러나 정시우와 그의 꼬리에 담긴 강제력, 침투력을 이기지 못해 그들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세상이 일변했다. 마리나와 함께 B&Y 빌딩의 게이트를 이용했던 때와 비슷한 감각이 정시우를 덮쳐 왔으나, 게이트의 수준이 달라서인지 그리 기분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는 게이트를 무사히 통과한 것을 확인하고는 짧게 한숨을 토해 냈다.
“후…….”
“어라. 우리 넘어온 거 맞아요?”
“음?”
세상이 깜깜했다. 지하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탁하고 매캐한 공기를 전신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다만 정말로 세상이 깜깜했다.
[세상 스푸노바에 존재하는 세트나크의 73마성에 잠입하였습니다. 세트나크의 종은 모두가 세월이 흘러도 쇠하지 않고 기록의 깊이를 더해 가는 이레귤러. 비록 세트나크가 소유한 100개의 마성 중 하위권에 위치한 성이라고는 하나, 오랜 세월 썩어온 그들의 힘은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합니다.]
[세트나크는 이미 당신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의 힘을 강탈하는 능력을 지닌 당신에게 흥미를 품고 있으며, 겁도 없이 그의 영역에 찾아온 당신을 환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어둠과 무아의 종속입니다.]
[세상을 빠져나가는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고작 3시간이 남았습니다. 그 안에 최대한 세트나크의 마성을 파괴하고 탈출하세요. 게이트가 닫혀 버리면 이 세상에 영원히 갇히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라이아의 소신전 때와 비슷한 사양이구나. 심플해서 좋네. 저번하고 비교해 제한시간이나 난이도 자체는 조금씩 더 빡세진 것 같지만.”
정시우는 그의 눈앞에 좌르륵 떠오르는 문자열을 순식간에 읽어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세트나크가 라이아보다 더욱 강한 신이라서 그런 것이겠지, 하는 추측과 함께.
“시야가 확보되지 않습니다, 형님.”
“이건 마법적인 어둠이에요. 누가 언데드를 다스리는 신 아니랄까 봐…….”
“난 잘 보이는데…… 아.”
한편 수아린과 용세하는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감각에 무척 당황하고 있었다. 정시우는 자신의 눈으로는 훤히 들여다보이는 어둠 속을 살피다가는 이내 깨달았다.
“너흰 시각 스킬이 없지, 참.”
“그래요, 그게 재수 없다구욧.”
미리 시각 스킬을 만들어두지 않았다면 정시우도 타고난 직감 하나에 의존해 움직일 뻔했다. 그만큼 73마성은 짙은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수아린의 말마따나 마법적인 어둠이기에 단순히 눈이 좋은 것만으론 어둠을 돌파할 수 없다. 정시우와 같이 시각을 스킬화하여, 마법과 저주를 타파하고 ‘진짜’를 알아볼 수 있게 된 눈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음, 안 보이는 쪽이 너한테는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오빠?”
수아린은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알면서도 무심코 그에게 묻고 말았다. 그 직후 그녀의 코를 통해 확 느껴지는 시체 썩은 내가 정시우를 대신해 대답해준 셈이 되었다.
[그아아아아…….]
[세에트나아크의 며어어어엉…….]
[저놈…… 잡아라…….]
그들이 위치한 곳이 고성의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정시우가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이 굉장히 좁은 복도라는 것, 그리고 복도의 앞뒤로 좀비와 스켈레톤들이 마구 섞여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게이트를 타고 넘어온 순간부터 세트나크가 그를 주시하고 있다더니, 과연 ‘환대’가 확실했다.
“흐으으으…… 싫어, 싫어어어.”
“이거 까다롭게 됐는데.”
정시우는 서서히 좁혀지는 간격을 확인하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다루는 슬레지 해머는 굳이 거대화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크다. 이렇게 좁은 복도에서 맘 놓고 휘두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렇다고 주먹만으로 언데드들을 상대하자니 감질 난다.
“크루얼 차지로 돌파해 볼까.”
“형님, 유령들이 있잖습니까.”
“아.”
정시우는 용세하의 지적을 듣고서야 자신에게 공간에 좌우되지 않고 부릴 수 있는 병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부모님과 김하룡을 감시하는 유령들을 제외한 모든 유령을 소환했다.
[주인님의 명을 받듭니다.]
[무슨 명령이든 내려 주소서.]
[구, 구아아아아?]
대략 100구의 유령이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채우자 다가오던 언데드들이 혼란스러워했다. 그야 이 성 안에는 유령 언데드도 가득할 터, 평소 아군으로 인식하던 존재들이 적으로 나타나니 당황할 수밖에!
“앞을 뚫어 줘.”
[명을 받듭니다.]
[돌진!]
정시우의 말 한 마디에 100구의 유령이 일시에 반 회전, 전방으로 질주를 개시했다. 좀비며 스켈레톤들이 우왕좌왕하다가는 유령 군단에 휩쓸려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실로 통쾌했다.
자신이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마음대로 전장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도 제법 매력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다면.
“내 기대보다 느린데…….”
[구어어어어…….]
“꺼져, 인마.”
가만히 있다 보니 뒤에서 포위망을 좁혀오던 놈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과감하게 움직이지 않던 것은 움직이기가 불편해서일 뿐, 결코 이놈들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그가 돌아보지도 않고 가볍게 꼬리를 뒤로 내뻗자, 마악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던 좀비의 몸통이 깔끔하게 박살났다.
“음……?”
그리고 자신의 손(엄밀히는 손이 아니라 꼬리지만)으로 한 놈을 부수고 나서야 비로소, 정시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것들 평범한 좀비가 아니잖아?”
“저한테 해설하지 마세요. 전 그냥 어두운 화원에 산책 나왔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냥 좀비의 레벨이 120을 넘어가는데?”
그랜드캐니언에 나타났던 좀비들도 결코 수준이 낮지 않았다. 하지만 이놈들은 완전히 별격이었다. 이곳이 세트나크의 영역이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안내 메시지에도 나왔던 것처럼 이것들이 세월을 거듭해 기록을 보충하고 강해졌기 때문인가?
“그냥 평범한 좀비랑 스켈레톤이 이 정도라면…… 흐.”
[구아아아아아!]
[키힉! 키하아아아!]
그는 뒤에서 차례차례 달려드는 스켈레톤과 좀비들을 꼬리로만 적당히 상대해 주며 느긋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령 군단이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것들을 짓밟아 주기도 했다.
[죽는 것은…… 엄금.]
[뭉쳐라, 모여라. 우리의 주인께서는 우리가 이곳을 돌파하기를 원하신다.]
정시우가 부리는 유령 군단은 그동안 레벨을 올려놓은 것도 있고,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기에 아무래도 실체가 있는 언데드들보다는 유리한 덕에 그리 손해를 입지 않고 놈들을 돌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그 탓에 속도가 느리다. 이 기세라면 3시간 동안 내내 좀비와 스켈레톤만 상대하다가 한심한 꼴로 도망치게 될 것이다.
“후우…….”
정시우는 지그시 눈을 반개하며 감각을 확장했다. 오감 스킬의 공명을 최대한 이끌어 내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파악했다. 거기에 직감을 더해 이 공간, 73마성의 허와 실을 파악했다.
물론 꿈에 나온 용처럼 완벽히 공간을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다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좋아.”
그는 오른 주먹을 뻗어 벽에 맞대었다. 주위와 별다를 것 없는, 회색 암반이 칠해진 복도의 내벽. 장식물 하나 없이 밋밋한 벽이 순간 쿠우웅, 울렸다.
“이 너머로는 나갈 수 있겠어!”
[구오오오오오!]
그의 이상행동을 감지한 언데드들이 뒤에서 마구 덤벼들었으나 두꺼운 꼬리가 날카롭게 휘둘러져 놈들을 차단했다. 그 사이 정시우는 주먹을 뒤로 살짝 당기며 마나를 부여해, 다음 순간 힘차게 내질렀다!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0.1%]
콰아아아앙!
세트나크의 힘을 부여받아 강화되어 있던 벽이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며 그 너머로 마찬가지 암흑투성이인 공간을 드러냈다. 한층 더 넓은 복도, 천장도 높은 그곳에는 가지런히 나열된 장식용 갑옷의 무리가 있었다. 판타지 소설에서 많이 봤다. 아마도 저 안에 유령이 깃들어 움직이는 종류의 언데드일 터였다.
“유령들, 좀비랑 스켈레톤 무시하고 이쪽으로!”
[알겠습니다!]
유령들이 우르르 좁은 복도에서 빠져나오는 동안, 정시우는 인벤토리에서 망치를 꺼내어 양옆 벽을 마구 두들겨 무너트렸다.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0.7%]
[구오오오오오오오오!]
[도망…… 잡아야……!]
정시우와 유령 군단의 뒤를 쫓아오던 언데드들 대다수가 정신없이 무너지는 벽에 깔려 버리고, 나머지 언데드들은 벽의 파편과 언데드 사체로 이루어진 격벽에 갇혀 넘어오지 못하고 아우성만 칠 뿐이었다.
“저러면 돌아갈 때 어떡하죠?”
“성을 다 무너트리고 바깥으로 드러난 게이트만 찾으면 돼.”
“오빠는 잠입액션을 근본부터 부정하는 사람이었죠, 참…….”
그가 복도를 무너트린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단지 망치를 휘두르기 불편한 공간이었기 때문!
그의 예상대로 유령 군단을 마주해 반갑다는 듯이 움직이기 시작한 리빙 아머들은 정시우가 직접 그들을 상대해 주길 바라겠지만 정시우의 관심은 그런 곳에 있지 않다! 그는 그냥 성을 부술 생각뿐이었다!
“좋아, 그러면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으랏차아아아아!”
그의 양손에 쥐여진 거랑의 앞발과 거인의 비명이 그의 마나를 품고 눈부신 빛을 발했다. 번갈아 내질러지는 양손 강타에 방금 무너트리고 넘어온 복도 벽이 무너지고, 일부러 망치를 거대화하여 천장까지 무너트리고, 유령 군단의 공습을 피해 그에게 달려온 리빙 아머를 쳐 날려 반대편 벽도 무너트린다!
[세트나크의 73마성 파괴율 : 2.8%]
“파아아아아아아아구우우우우욱!”
“파국이 아니라 파괴겠죠오오오오오!”
정시우가 날뛰기 시작했다. 그의 존재를 뚜렷이 감지한 세트나크의 종속들이 신의 힘이 강하게 남은 육신을 이끌고 그를 찾아오기 시작했으나, 그때엔 이미 복도와 한 층을 해먹은 정시우가 다음 층으로 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