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99화.
정시우가 세리아의 전화를 받아 한 말은 어디서 만나자는 정도였다. 그런데 정시우가 가볍게 씻은 후 옷을 걸치고(이전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와 다른 점은 좀 더 빳빳한 드레스 셔츠를 걸쳤다는 점 정도였다.) 약속장소로 향하자, 그곳에는 리무진이 도착해 있었다.
“시우 님, 오셨습니까.”
그 안에서 나온 세리아가 무례하지도 과하지도 않게 고개를 숙이자 정시우는 생전 한 번 느껴 본 적 없는 묘한 느낌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러면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이렇게 정중할 데가…….”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하며 돈을 모은 정시우도 원한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정시우 본인에게는 아직 실감이 없었을뿐더러 그는 돈을 쓰는 방법도 몰랐다.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는 자신의 카드를 세리아에게 넘겼다.
“뭐 돈 쓸 일 있으면 이 카드로 해.”
“네!? 제가 가진 것으로도 충분…… 아니, 감사합니다. 맡겨 주시지요.”
세리아가 그의 카드를 소중히 받아 챙겼다. 여분의 카드가 하나 더 있으니 별문제는 없었다. 수아린은 괜히 뿌듯해하는 세리아를 묘한 눈으로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정시우의 품으로 기어 들어갔다. 굳이 인간 모습을 유지해 마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어, 시우야!”
“왔구나.”
리무진 안에는 이미 이서희가 타고 있었다. 그가 불렀으니 놀랄 것도 없었다. 오히려 마리나가 없다는 것이 더 놀라웠는데, 알고 보니 마리나는 미국 플레이어 대표들과 함께 움직여야 하기에 한국으로 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것은 이서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더 성장했구나.”
“세리아 씨 쩔어, 시우야. 마리나랑 둘이 옆에 있으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지 않더라구. 설마 셋이서 31단계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그래, 무사히 살아남아서 다행이다.”
혹시 모르니 이서희에게 목 보호구를 선물해 둘까, 생각하며 그는 차에 탔다. 촉각 스킬을 얻어서인지 몰라도 쿠션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우리 집 소파에 누워 있는 것 같은데…….”
“휴식처에 소파 없잖아요.”
“말이 그렇다고 말이.”
차는 곧 출발해서, 얼마 가지 않아 멈추었다. 적어도 정시우는 그렇게 느꼈다. 세리아가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바로 근처에 그들이 탈 여객기가 대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도착했습니다.”
“있잖아, 왜 세리아 씨가 저렇게 너한테 정중한 거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리무진으로 공항에 도착하여 마련된 전용 비행기를 타고 그대로 뉴욕으로 직행. 누려 본 적이 없는 호사다. 한 길드의 마스터였던 이서희도 그리 다르지 않은지, 스튜어디스로부터 와인 잔을 받아들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돈 관리에는 그리 신경을 안 썼거든. 우리 길드는 신생이었고, 다른 길드를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던전에 도전해야 했으니…… 생각해 보면 다들 제법 돈을 벌었을 텐데, 여유를 즐기게 해 줄 틈도 없이 너무 몰아치기만 했어.”
이서희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말로도 위로를 할 수가 없는데 스킨십도 안 되니 살짝 답답했다. 그러나 그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시우를 본 순간 이서희가 피식 웃어 버렸다.
“넌 뭘 신경 쓰고 있는 거야, 바보 같아.”
“그래, 바보 맞아.”
“그래도 네 그런 면이 난 정말…….”
“정말 싫다구요?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막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아지려던 찰나 수아린이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라먹으며 정시우의 무릎 위로 내려왔다. 그의 무릎 위에 정좌하는 수아린의 눈동자가 그렇게 차분해 보일 수가 없었다.
“굳이 서로에게 괴로운 대화를 이어 갈 필요도 없으니 이제 조용히 가죠.”
“와오…….”
비행기는 곧 이륙했다. 비행시간이 시간이었기에 정시우는 지그시 눈을 감고 오감 스킬을 단련하기로 했다.
“어, 시우야…… 이익.”
“으으으음.”
그와 좀 더 얘기가 하고 싶었던 이서희는 수아린의 괜한 참견 탓에 정시우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해 수아린을 째렸다. 수아린도 차마 정시우에게는 보여 줄 수 없는 험악한 표정으로 맞받았다. 그 뒷좌석의 세리아가 살기 어린 목소리로 둘의 다툼을 멈추었다.
“시우 님이 집중하고 계시니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하도록.”
“그러니까 세리아 씨는 대체 왜 시우한테…….”
“조용.”
“끄응.”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시우를 제외한 일행은 대부분 잠에 빠져들었다. 이서희와 세리아는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하늘성 던전에 들어가 있었고, 수아린과 용세하 역시 정시우를 걱정하느라 제대로 잠을 청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시의 여유를 만끽하며 휴식하는 동안 정시우는 자신이 놓쳤던 오감과 직감의 합일을 깊이 탐구했다.
‘내가 놓치고 있었던 게 있는 걸지도 몰라. 시각 스킬로 체내를 관조하고 오감 스킬을 해당하는 감각 기관과 연결하여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리고 분명 그게 맞는 모습이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완전한 모습이 아닐지도 몰라.’
지금껏 그가 얻은 패시브 스킬들은 오감을 극대화하며 없던 능력까지 만들어 내 주었다. 육신을 강화한다는 패시브 스킬의 본 목적에 충실한, 압도적인 능력의 스킬들.
하지만 그것으로서 정시우가 보다 높은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면, 답은 글쎄올시다, 다.
‘적어도 용의 육신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어. 놈의 육신은 이미 패시브 스킬과 구분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지. 그렇지만 지금 내 육신은, 내 스킬들은…….’
시각은 눈에, 미각은 혀에, 각각 종속되어 있는 형태다. 스킬을 만들 땐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아까의 공명은 신체 기관의 한계를 넘어선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렇다. 정시우는 아직까지도 물질적인 육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스킬과 육신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결과 그가 벌인 일은 스킬로 하여 육체를 쫓게 한 것. 마나의 결정체를 가지고 단순히 물리적인 연결을 이루려 했으니, 지금 완성된 오감 스킬은 과연 반편이가 맞았다.
‘그 공명 속에서 오감과 직감이 결합해 하나의 스킬이 되려고 했었지. 결과를 알고 있는 이상 역산은 어렵지 않아. 오감, 그리고 오감에서 비롯되는 직감. 더 이상 육신의 일부에 속박되지 않는 감각은 곧…….’
빠르게 답에 가까워 가던 그 순간, 마침 그가 관조하고 있던 직감 스킬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특급 위험신호였다. 만약 패시브 스킬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알아채는 것이 늦었으리라!
“세리아. 이서희.”
“예.”
“왜애?”
전혀 잠들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눈을 번쩍 뜨며 대꾸하는 세리아. 반대로 이서희는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지 본능적으로 정시우의 팔을 꼬옥 붙잡으며 애교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지만 지금은 그녀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정시우가 다급히 지시했다.
“배리어. 비행기 외부. 서쪽으로.”
“알겠습니다.”
“으, 응!”
발동은 동시였으나 완성은 세리아 쪽이 더 빨랐다. 그녀가 그저 손바닥을 전방을 형해 펼치는 것만으로 비행기 외부에 거대한 마나의 막이 생성된 것이다. 아련한 금빛을 품은 마나의 막, 그 세기는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믿을 만했다.
마탄의 사수로 전직하여 총기 관련 스킬만을 익힌 마리나와는 다르게 세리아의 클래스는 마나를 가공해 직접 다루는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기공사. 마탄의 사수보다 에너지 밀집력이 낮고, 순수한 마법사보다 응용력이 덜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기술 구현의 빠른 속도와 상당한 파괴력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세리아 외에도 기공사 클래스를 지닌 이들이 제법 되었지만, 세리아는 미국 서부의 패자답게 그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능력을 자랑했다. 아마 이번에 루이오스의 마나를 강탈하며 그 차이는 더욱 벌어졌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세리아가 만들어 낸 방어막이 한순간에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보다 조금 늦게 완성된 이서희의 결계가 보다 단단하게 비행기를 감쌌지만 연이어 날아드는 공격에 그 또한 이내 깨져 버리고 말았다.
“큭!?”
이 상황에 가장 당황스러운 점은 방어막을 부순 공격이 어디서 날아들었는지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세리아는 굴욕과 분노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재차 방어막을 만들어 내려 했지만, 그전에 다시 한 차례 강력한 공격이 덮쳐 와 이번엔 단숨에 비행기의 척추를 끊어 버리고 말았다.
“오빠!”
“시, 시우야!”
“에이씨, 진짜!”
비행기가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면서 그 안의 사람들 전원에게 끔찍한 충격이 닥쳐왔다. 플레이어들은 본능적으로 날개를 펼치며 상공으로 날아올랐으나 정시우와 다른 승무원들은 손 쓸 도리도 없이 그것에 휩쓸렸다.
“꺄아아아아아아악!”
“칫!”
자그마한 물건이나 물컵 같은 것들이 순식간에 허공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좌석이 90도 기울어지며 마침 그 옆에서 대기하던 스튜어디스가 만화처럼 상공에 뜨는 것을 본 정시우는 잽싸게 한 팔을 뻗어 그녀를 가볍게 낚아채며 이를 갈았다. 한 팔로는 좌석 밑바닥을 붙잡아 버티고 있었다.
“미국의 플레이어들은 원래 이런 식으로 환영 인사를 하냐!?”
“그랬으면 국가 문제로 발전했겠죠!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플레이어인 일행은 그냥 바깥으로 뛰어내려도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비행기에 탑승한 기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이다.
세리아 역시 거기에 생각이 닿았는지, 다급히 몸을 놀려 마나의 끈을 쏘아 내 정시우가 구해 낸 스튜어디스를 시작으로 승무원들을 하나하나 낚아채 확보했다.
“용세하, 사람들 보호해!”
“알겠습니다, 형님!”
“나도 도울게!”
세리아가 한데 모은 사람들을 이서희가 구형의 대형 결계를 만들어 내어 한꺼번에 보호했다. 비행기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결계가 깨진 순간, 바로 사태를 파악하고 사람들을 보호할 결계를 영창했기에 가능한 스피드였다.
“전부 확보했어! 기장까지!”
“지금부터 이 사람들은 제가 보호하겠습니다, 형님!”
“좋아, 맡겼다.”
정시우는 위아래가 사정없이 뒤집히는 가운데 한 팔로 천장을 붙들고 버티며 두 눈을 부릅떴다. 시각 스킬을 최대로 활성화하여 아직 아득한 거리 너머에 있는 적의 모습을 포착한다!
그러자 이내 얇고 투명한 피막…… 마치 잠자리의 그것과도 같은 날개를 지닌, 거대한 비행 몬스터의 무리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공격의 정체는 바로 놈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에너지 덩어리였다. 무척 빠르고 강력한 마탄, 그것이 여러 발 중첩되어 배리어와 결계를 깨트리고 기어이 비행기까지 아작 낸 것이다.
“찾았다.”
“같이 가겠습니다, 시우 님!”
“일단 보호막. 추가 포격이 날아올 거야!”
“넵!”
세리아가 사방에 동시에 여러 개의 배리어를 만들어 내 적의 공격을 막아 내는 동안, 정시우는 용세하와 이서희가 승무원들을 보호한 결계와 함께 까마득한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팬텀 바이크를 불러내어 안착했다.
승객을 모두 잃은 비행기가 두 쪽이 난 채 허공에 내팽개쳐졌다.
“저거 지상에 떨어지면 제법 큰일이 날 텐데.”
“아직 바다입니다, 시우 님.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정시우는 더욱 성대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미국 본토도 못 밟았단 얘기가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어째 편하게 여행한다 싶었다. 설마 잘 타고 가던 비행기가 두 쪽이 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저거 항공보험 들어 놨어?”
“몬스터의 공격으로 인한 물손은 아마 보상 받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래.”
정시우는 뺨을 다소 거칠게 간질이는 상공의 바람을 맞으며 인벤토리에서 아티팩트를 꺼내 쥐었다. 그것은 뇌신의 레이지 라이플이었다.
“그러면 저놈들한테 받아 내는 수밖에 없지.”
목표물은 잠자리 날개를 단 괴물들. 정시우는 망설임 없이 크리티컬 불릿을 활성화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까마득한 거리를 일순에 관통한 필살의 마탄이 괴물들 무리의 중앙을 관통했다. 몬스터들이 경악하며 날뛰는 가운데, 정시우는 담담하게 다음 탄환을 준비하며 중얼거렸다.
“시작해 보자고.”
정시우의 미국행을 방해하는 몬스터들, 놈들 뒤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는 벌써부터 기대되어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