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홀로 로그인-97화 (97/260)

# 97

97화.

한 가지 다행한 점이 있다면 그녀가 영어로 말했기 때문에 카페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시우는 정확하게 알아들었고,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해석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하.”

그 끝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무척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다. 비웃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아니, 비웃는 게 아니라 단지…… 그래. 일단 얘기나 들어 보자.”

그들은 비어 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게스트들이 최대한 그들을 훔쳐보기 위해 카페 중앙의 가장 좋은 자리를 비워 주었기 때문에 사방으로부터 날아드는 시선이 무척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저들 대부분은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알아듣지도 못할 테니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건데? 그리고 날 따르겠다는 건 뭐야, 애초에 난 길드가 없는데. 길드는 당신한테 있지.”

“그랬지.”

세리아 윌슨은 헤어졌을 때와는 다른, 처음 마주했을 때와도 다른 제법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랜드캐니언에서의 일이 그녀를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길드는 정리했어. 핵심 멤버들을 잃은 이상 그것을 그대로 끌고 가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리고…… 나도 더는 길드를 이끌 의지가 없어. 나는 한 번 실패했으니까.”

“…….”

한 번 실패한 정도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엔 그녀가 겪은 실패가 너무 치명적이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위로를 할 수도 없기에 정시우는 담담히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들이라면 다른 길드에서도 잘 해 나갈 수 있겠지. ……굳이 길드에 집착하지 않아도 되고.”

“네가 길드를 정리한 건 그렇다 치고 결국 날 찾아온 이유가 뭐냐니까.”

“당신은 내게 대가를 치르라고 말했지. 그 후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고 나름의 결론도 내릴 수 있었지만, 이제 난 도저히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할 수가 없어.”

지울 수 없는 실패의 흔적을 머금은 눈빛이 정시우를 직시했다.

“그러니 당신에게 판단을 떠맡기러 온 거야.”

“이 여자 끝까지 최악이네.”

“정말 최악이에요. 미국으로 돌아가 주세요.”

정시우가 한탄하고 그의 품에서 삐져나온 수아린이 매몰차게 말했지만 세리아 윌슨은 그 정도로는 물러나지 않았다.

“당신은 현 시점에서 내가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마리나 비셋이 믿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 당신을 따르게 해 줘.”

“나도 내 판단에 확신을 못 가지는데 누구 어깨 위에 짐을 얹으려는 거야. 아린이 말이 맞아. 너 미국으로 돌아가라.”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 당신에게 부담을 지울 생각은 없으니 좀 더 가볍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는데.”

길드를 이끌어 본 그녀라면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지 알 것이다. 정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자 세리아 윌슨은 스스로도 멋쩍은 듯 두 손을 저었다.

“내가 멋대로 따라갈 뿐이니 나를 책임질 필요는 없어. 마음껏 부릴 수 있는 하인을 얻었다고 생각해도 좋아. 나를 맡기는 이상은,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따르겠어. ……그, 그래도.”

세리아 윌슨(25세 독신)의 뺨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그래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으니…… 성적인 요구는 조금, 곤란하지만.”

“이 여자 뭐래냐.”

“미국으로 돌아가고 싶대요. 그러니 그냥 돌려보내죠?”

당사자인 정시우는 아무 생각도 없는데 그녀 혼자 머릿속으로 거기까지 상상하고 있었다니 조금 징그러울 정도였다. 그런데 정시우와 수아린이 짜게 식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자니 의외로 용세하가 나섰다.

“형님, 내치실 건 없다고 봅니다. 세리아 윌슨은 세계최강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이지 않습니까. 물론 엠퍼러 길드의 수장으로서의 입지가 컸지만, 그녀 본인의 무력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이전 그랜드캐니언에서 정시우의 도움을 받아 루이오스의 힘을 강탈하는 과정에서 능력이 크게 강화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루이오스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신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갖게 되었죠. 적어도 당분간은 형님과 뜻이 어긋날 일이 없는, 믿을 만한 인재가 아닐까요.”

“당신……!”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용세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처럼 보이자 세리아 윌슨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러나 정시우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내 서포터가 될 수 없으니 개미굴에 대동할 수도 없는데.”

“하늘성 측에 부릴 수 있는 플레이어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형님.”

용세하가 첨언했다.

“스스로는 판단할 수 없다고 윌슨이 말했지만, 형님을 따르겠다는 것도 결국 그녀의 판단입니다. 그러니 형님께서 이 여자에게 책임감을 느끼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형님의 평소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것저것 생각 안 하시고 그녀가 말하는 대로 마음 편하게 대하셔도 좋지 않을까요.”

“너…….”

용세하의 강한 의지에 정시우는 한풀 꺾이고 말았다. 그는 솔직히 이 이상으로 사람과 깊이 연관되는 것이 귀찮을 따름이었지만, 용세하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좋아. 세리아 윌슨, 받아 주지. 아마 좋은 일 하나 없겠지만.”

“오빠?”

“후우…… 앞으론 편하게 세리아로 불러 주시면 됩니다.”

“형님.”

정시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수아린이 불만스레 볼을 부풀리고, 세리아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으며, 용세하가 감격했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역시나, 하고 생각했다.

‘이 녀석, 세리아가 마음에 들었구나. 하긴 처음 봤을 때 하도 인상을 험악하게 구겨서 그렇지 지금처럼 가만히 있으면 프랑스 인형처럼 예쁘긴 해. 처음에 마리나 비셋에도 관심이 있었던 걸 보면 확실해.’

오해였다. 용세하는 그저 정시우가 보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며 보다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길 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그런 열정과 욕망을 정시우는 완벽히 다른 방향으로 오해하고 만 것이다. 애초에 사람 위에 설 생각이 별로 없는 그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내가 밀어 주마, 세하야. 걱정 마라.”

“네? ……네, 감사합니다! 전 형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용세하는 밀어 준다는 말이 무엇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그가 자신을 2인자로 삼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수아린 선배님은 언제고 아내로 맞이하실 테니 내가 2인자가 되는 것도 그리 무리는 아닌가, 하고 결론을 내려 버리는 용세하!

그러나 한국어를 모르는 세리아는 그저 자신을 받아 준다는 말에 기뻐했으며, 오직 수아린만이 뭔가 이상한데, 하는 생각으로 용세하와 정시우를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면 우선 말씀을 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정시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세리아의 말투가 공손해졌다. 정시우가 팔뚝에 돋은 소름을 벅벅 긁으며 뒤를 재촉하자 그녀가 침착하게 말했다.

“시우 님과 헤어진 후로…….”

“히어윽.”

“왜 그러시죠, 시우 님?”

“좀 더 편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냥 반말이라도 괜찮고.”

“후후, 반말이라니.”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로 말했으면 이미 수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시우의 간절한 부탁을 그녀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냥 조크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시우 님과 헤어진 후로, 길드 정리 외에 집중적으로 한 일이 있습니다.”

“이 여자 벌써부터 내 말을 안 듣는데…….”

“그것은 바로 지금 플레이어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는 ‘신’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정시우의 귀가 쫑긋했다. 뭐야 이 여자,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었다더니 되게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잖아……?

“마리나 비셋의 도움을 받아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신의 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 세계적으로 ‘신을 믿는 행위’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이겠죠. 비단 플레이어들뿐만 아니라 일반인이라 해도 신앙을 품을 가능성은 있으니까.”

“그렇지. 그렇다면…… 아. 세계 플레이어 대표 회의?”

“바로 그렇습니다.”

세리아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곳에서 공표할 생각입니다. 따라서 저는 미국 대표가 아니라, UN 내부 인사의 초청을 받아 특별위원으로 참석합니다.”

“가만, 그러면 혹시 내가 초대된 것도?”

“맞습니다.”

세리아가 당당하게 자기 가슴을 두드려 보였다. 진동이 적다. 마리나와는 달리 작은 편이구나, 정시우는 그런 감상을 자기 가슴속에만 묻어 두기로 했다. 세리아의 말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저는 제 존재로 신의 일그러진 면을 드러낼 겁니다. 시우 님께는 그 순간의 증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시우 님께서 옆에 계시는 것만으로 설득력이 더해질 겁니다. ……앗, 미리 말씀을 드리지 않고 멋대로 진행한 꼴이 되어 죄송합니다. 원래는 먼저 찾아뵙고 싶었는데 일이…….”

“아니, 그건 괜찮아. 협력할게. 오히려 잘도 이렇게 일을 정리해 줬다 싶을 정도야.”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를 비우곤 말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냥…… 너, 이미 혼자서 판단 잘 하고 행동하고 있잖아. 굳이 누가 누굴 따르고 하는 관계보다 그냥 수평적인 협조 관계여도 됐던 거 아니야?”

“아니, 제가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모든 신을 적대하는 당신이 있어 주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날, 제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 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단언한 세리아는 이내 조금 움츠러들며 말했다.

“하지만 그 후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되어 결국 이렇게 찾아오게 된 겁니다. 저는…… 뭔가를 차지하기 위해,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움직여 본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여 본 적은 없으니까.”

“……그래. 어쨌든 잘 말해 줬다. 이제 좀 파악이 됐어.”

어쨌든 속은 시원해졌다. 대표 회의에서 취해야 할 스탠스도 보다 분명해졌다. 남은 건 그때에 맞추어 출석하는 것뿐이다.

“며칠 남았지?”

“5일입니다. 날개가 없으시다고 들어, 따로 비행기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여자 유능하잖아!?

“그때까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마리나와 달리 서민 출신입니다. 잡일에도 자신이 있습니다.”

“응? 아…….”

그러고 보면 세리아를 비롯해 다른 이들은 아직 휴식처를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 미안하지만 네가 못 들어오는 곳이야. 내가 지닌 지하 플레이어로서의 특성 때문에 말이지. 미안하다.”

“앗…… 그렇군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곁에서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세리아는 굉장히 노골적으로 풀이 죽었다. 그런데 그는 그녀를 보고 있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녀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UN 대표 회의에서 증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그게 누굽니까?”

“이서희라고, 내 지인이야.”

세리아의 귀가 쫑긋하는 것이 재밌다고 생각하며 정시우는 이전 회의에서 만났던 전 여자 친구의 이름을 댔다. 세리아가 마냥 밝지만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서희. 알고 있습니다.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요즘 마리나가 눈독을 들이는 플레이어이기도 하죠.”

“맞아. 녀석을 대표 회의에 출석시키고 싶어.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성장을 도와주고 싶은데, 나는 지하 플레이어라서 불가능하거든. 부탁할 수 있을까?”

“마리나와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무척 불만족스러운 일입니다만…… 그래도 처음으로 지시를 내려 주셨으니.”

세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시하신 대로 수행하겠습니다.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래, 부탁해.”

역시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시우는 그녀를 따라 일어서며 괜히 한 번 세리아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조금 너무 친하게 굴었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다음 순간 세리아의 표정이 밝아진 것으로 보아 유효한 스킨십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응?”

그의 친근한 태도에 용기를 얻은 듯, 세리아가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그런데 질문이 조금 생뚱맞았다.

“마리나와는…… 정말로 연인 관계이십니까?”

“아니, 그 녀석이 파트너라고 떠들고 다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냥 친구 같은 건데.”

“역시 그랬군요!”

실로 눈부신 미소다. 자신의 경쟁자가 아직 솔로라는 사실에 안도한 것일까? 세리아는 흐림 한 점 없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 요령 없는 여자가 그리 쉽게 시우 님을…… 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쿠후.”

세리아는 바람처럼 카페를 나갔다. 카페에 남은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정시우에게 꽂혔지만 그는 그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일어섰다.

“마리나 녀석, 왠지 엄청 놀림당할 것 같은데…….”

“당해도 싸요.”

“세리아 윌슨, 행동력 넘치는 여자라서 좋군요.”

“그렇게 좋아? 알겠어. 조금만 기다려.”

“네……? 아, 네…… 음?”

무수한 이의 오해와 오해가 한데 엉키는 가운데, 정시우는 다시 오감 스킬 수련을 위해 휴식처로 향했다.

세계 플레이어 대표 회의가 열리기까지 앞으로 5일, 남은 시간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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