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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로그인-91화 (91/260)

# 91

91화.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가 열리는 날. 정시우는 오전 중에 적당히 단련을 마무리하고 씻었다. 원래 옷에 그리 신경을 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혹여 엄레이더에게 등짝을 얻어맞는 일이 없도록 정장을 입기로 했다.

물론 답답한 것을 싫어하는 정시우에게 있어 정장의 허용선은 화이트 셔츠 정도였다.

“이젠 긴 팔도 괜찮겠지.”

“미리 옷 사 두길 잘했네요. ……그런데 바지는 진짜 그 청바지 입고 갈 거예요?”

“블랙이니까 조금은 정장 바지 같지 않아?”

“전혀요.”

그가 플레이어가 되었을 때만 해도 낮에는 죽도록 더웠지만, 두 달 정도가 흐른 지금은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제법 살 만했다. 더욱이 화염 내성을 지니게 되면서 더위에 더한 저항력까지 덤으로 높아져, 이제 정시우는 어지간하면 땀을 흘릴 일이 없었다.

“후우. 고등학생 시절 이후로 오랜만이네.”

“대학생 때는 어땠습니까, 형님?”

“진격의 반팔이었지.”

“반팔이 아니라 다른 부분이 강조되고 있다는 건 잘 알겠네요.”

“아, 아으으.”

가뜩이나 훌륭했지만 레벨 업이 반복되며 점점 예술품에 가까운 무엇인가로 탈바꿈하고 있는 그의 나신 위로 화이트 셔츠가 걸쳐지는 모습을 수아린은 차마 직시하지 못했다. 사실은 넥타이를 매어 주고 싶었는데 그가 목이 졸리는 느낌을 질색하는 탓에 미수로 돌아가고 말았다.

“후으, 넥타이…… 하면 멋질 것 같은데.”

“옛날 만화에나 나올 법한 망상을 하고 계시군요, 선배님…….”

“닥쳐욧.”

“셔츠만으로 이미 내 인내심은 한계에 가깝거든. 넥타이는 악마가 만든 것임에 분명해. 각 기업에서 넥타이를 강요하는 건 사축들이 회사에 목줄이 매인 신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지.”

“자의적인 해석은 그쯤 해 두세요…….”

지나치게 창의적인 발언에 두근거리던 마음까지 식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수아린의 표정이 짜게 식건 말건 혹여 자신이 빼놓은 것은 없나, 휴식처를 비우기 전에 해 두어야 할 일은 없나 고민했다.

그러다가 인벤토리에서 여태까지 잊어 먹고 있던 것이 신기할 지경인 아티팩트 하나를 발견했다.

“오빠, 그건 뭔가요?”

“케이나 머리통.”

“꺄악!”

케이나의 얼굴은 이전보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져 있었다. 아니, 보다 생생해졌다는 말이 맞을까. 기분 탓인지 몰라도 창백하던 피부에는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와 있었고, 은빛 머리카락에는 이전에 없었던 생기가 흘렀으며(기름기는 아니었다.), 보랏빛의 커다란 두 눈은 어딘가 초점이 잡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무서워, 무섭잖아요! 왜 초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오, 시선이 나를 쫓는 것 같은데.”

“무섭다구욧!”

“내가 케이나를 왜 여태 잊고 있었을까. 아, 용꿈 때문인가.”

자기 자신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매달려, 상대적으로 전리품이나 아티팩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이번 전투에서 획득한 마석들도 그대로 쌓여 있는 것이 새삼 자신의 실수를 실감하게 했다.

‘수련에 전념하느라 다른 데 너무 무신경했어. ……그보다 일단 정보나 확인해 볼까.’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정시우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데스나이트 케이나의 핵]

[랭크 ? S-]

[마력 완성도 ? 54%]

[언데드의 신성을 품은 마나를 대량으로 흡수한 끝에 상위 언데드의 가능성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혼이 없이 육체와 본능만이 남은 좀비, 육체가 없이 원혼만이 남은 고스트와 달리, 혼과 육체를 모두 품어 존재만으로 이치를 거스르는 데스나이트의 가능성이다.]

[데스나이트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강자의 사체 여럿과 핵을 완성시킬 막대한 양의 마석, 강한 마갑, 마지막으로 육신에 깃들 강한 혼이 필요하다. 데스나이트의 컨트롤은 혼을 지배하는 것으로만 성립하니, 혼의 소유권을 확실히 하지 않고서 제작에 나서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정시우는 다른 무엇보다도 아티팩트의 랭크를 본 순간 너무 놀라서 머리통을 바닥에 떨어트릴 뻔했다.

“S!?”

“마이너스가 붙긴 했지만…… S랭크는 생전 처음 봐요!”

“그리고 완성을 위한 요구조건이 더 늘어났네요!”

다들 장난 아니게 흥분했다. 그야 물론 세트나크가 언데드의 신인 만큼 듀라한의 정수를 활용해 효과적으로 힘을 거둘 수 있으리라곤 생각했지만, 그것이 설마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이야!

비록 S랭크에 마이너스가 붙는 바람에 A++랭크인 뇌신의 레이지 라이플이나 팬텀바이크보다 현재 가치는 떨어지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아직 미완성 상태라는 사실이다. 완성되어 데스나이트로 재탄생하는 순간엔 S랭크, 혹은 그 이상의 가치를 품게 될지도 몰랐다.

그것이 뜻하는 바는 즉, 완성될 데스나이트의 레벨이 최소 300이라는 얘기!

“마석이 필요하다는 부분이 불안한데…… 어디.”

정시우는 인벤토리에 잔뜩 담겨 있던 마석 중 몇 개를 집어 머리통에 부딪혔다. 그 방식이 맞았던 것인지 순식간에 마석이 흡수되었다. 그러나 딱히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퍼센티지는 아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살짝 열이 받은 정시우가 마석 스무 개 정도를 더 흡수시키자 그제야 간신히 55%가 되었다. 세트나크의 마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깨달을 수는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짙은 짜증이 밀려왔다.

“이 상황에 이게 또 내 발목을 잡네.”

“유령을 활용해 마석을 많이 모을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엊그제 맞거든.”

정시우는 잔뜩 투덜거리며 인벤토리에 남은 마석을 모두 데스나이트의 핵에 먹여 버렸다. 핵을 얻은 이상 데스나이트를 만들지 않을 수도 없으니 더는 망설일 것도 없었다.

58%까지 퍼센티지가 차오르는 것을 보며 정시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앞으로 얼마나 되는 마석을 소모해야 하는 것인지 까마득할 따름이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으니, 바로 이 녀석이 데스나이트의 핵으로 진화한 바로 그 장소, 그랜드캐니언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 어쩌면 세트나크가 다스리는 세계로 넘어가는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시엔 마리나가 있어서 추가적인 수색을 못했었지.”

“세트나크는 라이아보다 강한 신 같아요. 그 너머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구요.”

“하지만 무턱대고 마석을 쏟아붓는 것보다는 그곳에서 세트나크의 힘을 찾아보는 게 더 나을 거야. 좋아, 전력을 가다듬고 나서의 우선 목표가 정해졌어.”

지구로 넘어온 흔적만 해도 그렇게 끔찍했는데, 정시우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시 반대편 세상으로 넘어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정시우의 이런 성격을 알고 지하 플레이어로 만든 것이라면 실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수아린은 한숨을 쉬며 그를 붙잡고 흔들었다.

“오빠, 어쨌든 지금은 회의! 이러다 늦겠어요. 어서 나가요.”

“아, 그래.”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태산인데 불확실한 일에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다. 정시우는 핵을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수아린, 용세하와 함께 휴식처를 나섰다.

세상은 여전히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었다. 지반의 융기와 침식이 반복되며 지구 환경이 극적으로 바뀌었으나 그럼에도 인간들은 뒤바뀐 대지 위에 다시 문명을 옮겨 심고 있었다.

강남 땅은 여전히 비쌌고 교통 체증은 더해졌다. 도심지에 솟아오른 지반을 깎아내어 옮기는 공사가 지금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는 일 중 하나였다.

“이럴 때 새삼 인간이 대단하다는 걸 느끼게 되네요. 통신망도 다 복구되었다고 하니.”

“아마 조만간 다시 무너질 거야.”

그러나 정시우만은 그들이 복원한 세상의 허와 실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현대 기술과 마도 공학의 접목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문명을 마력으로 보호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한은 언제고 다시 무너질 허약한 구조니까.”

“각 기업에서 마법을 다루는 플레이어들을 모집하는 이유네요.”

기업뿐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은 현재 강한 플레이어들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한국의 플레이어들 또한 빠른 속도로 타국, 그중에서도 주로 미국에 스카우트되어 나가고 있었다.

플레이어로 활동하면서도 확보할 수 없는 많은 양의 돈, 그에 걸맞은 권리, 복지. 능력이 있는 이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 주는 나라로 쏠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열리는 대표 회의가 중요한 거야. 우리나라가 자국의 플레이어들을 잡아 둘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변화한 사회에 맞는 공공사업 구조, 보상 체계를 확립하지 못하면 그 순간 끝장이겠지.”

“오빠 되게 유식해 보여요.”

“주워 들은 대로 얘기하는 것뿐이야. 이렇게 입만 놀리는 남자한테 속지 않도록 조심해라.”

“안 속아요, 절대로.”

“응……?”

정시우는 수아린이 방금 속아 넘어간 주제에 어째서 저렇게 단언하는 것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설명을 이었다.

이번 회의에는 플레이어 대표들과 정부 인사들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의 대표들이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역량으로 보나 범위로 보나 정부가 홀로 감당할 사안이 아니었으니까.

B&Y 정도로 어마 무시한 능력을 갖고 있어 단독으로 연구가 가능하다면 몰라도 한국의 대부분 기업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아마 정부와 타 기업과 협력하는 체제가 확립될 터였다.

“형님, 저는 이해를 포기했습니다. 핵심만 간추려서 얘기해 주시죠.”

“지금까지도 갑이었던 플레이어들 중에서 슈퍼 갑이 탄생하는 순간이라는 거지.”

“굉장히 직관적이네요!”

얼마나 많은 인간군상이 모여 더러운 꼴을 만들어 낼까. 그것이 예상되어서라도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이렇게 된 이상은 어쩔 수가 없다. 정시우는 수아린과 용세하를 다시 확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회의는 서울 시청에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켁, 사람들 많네.”

시청 앞은 무수한 군중으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가장 강한 플레이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때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기업 수장들이 모이는 순간이기도 했으니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저기 용오름 길드의 마스터가 날아오고 있습니다. 친위대도 함께네요.”

“용오름 길드의 마스터 김하룡 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 중 가장 강한 플레이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무력에 대해선 굳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나머지 대표 플레이어의 선정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마침 근처에서 방송용 카메라를 든 남자와 마이크를 든 여자가 다른 남자를 붙들고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디서 본 사람이다 싶더니 플레이어로 정부 인사가 되어 뉴스에 나온 경력이 있는 남자였다.

“하늘성 던전은 단계가 높아질수록 솔로 플레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아집니다. 솔로 플레이를 즐기는 이라 해도 파티를 구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결국 강자의 목록이 어느 정도 추려지게 마련입니다. 최근 신흥 강자로 알려진 사람도 있고요. 그래서 이번 대표 회의는 31단계 던전의 도전 자격이 있는, 즉 30단계 던전을 클리어한 플레이어들을 위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던전에 대한 정보가 전혀 주어지지 않으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요!”

“레벨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엔 곤란하지만, 대략 200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200레벨의 전사 클래스는 코앞에서 기관총 사격을 당해도 멀쩡할 만큼 굉장한 체력을 갖게 되죠. 방어구가 없다 해도 그 정도입니다.”

“탱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겠어요.”

얘기가 흥미로워 계속 듣고 싶었지만 계속 그러다가는 용오름 길드와 마주치게 될 것 같았다. 저 자식, 일부러 천천히 날아오는 것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자신에게로 끌어당기고 싶어 환장을 한 모양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자기과시 욕구인가!

굳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과 지금부터 부딪히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는 서둘러 회의장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굉장히 중요한 자리인 만큼 두 자리 숫자의 경호원들과 공무원들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실례지만 입장하시기 위해선 신분을 밝히셔야 합니다.”

“정시우입니다.”

어머니는 본명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정시우 씨, 명단 확인 한 번만 하겠습니다.”

“응? 정시우 씨?”

그러나 그냥 명단을 확인하고 조용히 들여보내 주면 될 상황에서, 입구에 모여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인가가 그의 이름을 듣고 움찔했다. 당혹에서 놀람, 경악으로 그들의 표정이 순조로이 에스컬레이트 하는 것이 아주 조금 웃겼다.

“잠깐만, 정시우 씨라면 그 정시우 씨?”

“동일인 없지? 그러면 정말로 그저께 명단에 추가된 그……?”

아, 이건 글렀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파란의 예감에 정시우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한숨을 쉬는 그때, 허공에서 마악 내려오던 용오름 길드의 수장 김하룡과 그의 눈이 마주쳤다. 정확히 그다음 순간.

“김하룡 씨가 내려오고 있…….”

“중국집 라이더! 중국집 라이더다!”

“투구 길동!?”

“대, 대박! 중국집 라이더가 나타났다는데!?”

“음.”

김하룡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져야 하는 순간, 시청 앞에 모인 모든 이의 시선이 정시우에게 쏠렸다. 정시우는 여기저기서 찢어 죽이고 싶은 별명으로 자신을 부르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허허,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되면 미리 어머니한테 부탁해 둔 보람이 전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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