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90화.
“이게 뭐야.”
“왜 그래요, 오빠?”
카트를 밀다 말고 정시우가 당황하며 멈추어 서자 품 안의 수아린이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그는 오색의 빛을 뿜어내는 문신을 다급히 가리며 대꾸했다.
“이 녀석들 나오고 싶어 하나 본데.”
“여기서 불러냈다간 큰일이 날 걸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 더 살 거 없지?”
“네.”
정시우는 다급히 카트를 계산대로 끌고 갔다. 어른스럽지 못한 전력질주에 다른 이들이 뜨악하며 몸을 비켰다. 그는 순식간에 결제를 마치곤 카트를 기둥 뒤로 끌고 가 내용물을 인벤토리로 옮겼다. 문신은 점점 더 밝은 빛을 점점 더 빠르게 내보이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으음…… 나한테 영향을 받은 것 같긴 한데.”
정시우는 항상 싸우고 싶다. 날뛰고 싶다. 그런데 그랜드캐니언 사태를 정리하고 돌아와 제법 오랜 시간 싸우지 못해선지, 그런 마음만이 그에게 귀속된 영혼들에게 지속적으로 전달되어 녀석들을 반응하게 한 것이다.
“뭐 얼마나 오래 쉬었다고…….”
“요즘 너무 눈에 띄게 설치기도 했고, 당분간은 수련만 할 생각이기는 하지만…… 음, 가만.”
그는 빠르게 마트를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그랜드캐니언에서 확인한 바, 이 유령들의 힘은 결코 작지 않았다. 전부 다 합쳐 봤자 정시우 한 명보다 약하긴 하지만 어지간한 플레이어 파티보다는 더한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면 얘네만 있어도 어지간한 몬스터 무리는 정리할 수 있다는 얘기지. 이거 제법 괜찮은 결론이 됐잖아?”
“정말 무서운 결론이 됐는걸요……. 으으, 그 많은 유령이 거리를 배회한다고 생각하면.”
“왜 거미도 곤충이긴 하지만 모기 잡아먹고 그러잖아. 그거라고 생각해. 익령?”
“익령…….”
마트 1층을 빠져나와 적당히 사람이 없는 골목에 접어들었다. 원래도 사람이 없는 편이었지만, 지구의 뉴 에이지 진입 이후 사람들은 대로변이 아니면 아예 다니려 하질 않았다. 사람이 많다고 해서 몬스터가 나타날 확률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당할 확률은 줄어들 테니 말이다.
“아직 일반인이 마나를 다룰 정도로 마나에 익숙해지지는 못했겠지.”
“신이 튜토리얼 기간이라도 주었더라면 좋을 텐데 말이죠.”
“전 인류를 대상으로? 그러다 누구 한 명 빠지면 재밌겠다.”
“끔찍한 소리를.”
정시우는 시답잖은 소리를 하며 스킬을 활성화했다. 순식간에 골목이 희뿌연 유령으로 가득 찼다. 개중 가장 강한 이들이 앞으로 나섰고, 그 뒤로 생전의 무력 순서로 나열했다. 숫자는 106명. 이전의 전투에서 소환해제된 이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회복된 모양이었다.
“저도 시기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저들 중 하나가 되었겠죠……?”
“그럼 내가 플레이어가 안 됐지. 쓸데없는 소리하기는.”
정시우는 그들의 수준을 일일이 확인했다. 전생의 레벨은 개무시하고 지금의 수준만 따져 제일 수준이 높은 이가 130레벨, 제일 낮은 이는 10레벨이었는데, 대충 뭉뚱그리면 100레벨을 넘는 게 절반 정도였다. 그만한 전력의 플레이어 길드를 거느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새삼스레 대단했다.
“더욱이 마나를 다루는 능력만은 생전보다 나아 보일 정도야.”
“어쩌면 영체는 육신이 없는 만큼 보다 마나에 민감한 것 아닐까요?”
정시우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당연하지만 영체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다. 영체로서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은 계속 마나를 소모해야 했다. 마나로 이루어진 신체라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나가 얼마 없는 녀석은 금방 리타이어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아. 즉…….”
영체의 마나 회복 속도는 육신을 지닌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그도 그럴 것이 영혼이라는 핵을 중심으로 마나가 뭉쳐 있는 상태인 만큼, 마나를 내보내는 것만큼이나 받아들이는 것도 자연스러웠기 때문. 정시우는 그로부터 자신이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육신을 벗어던질 수는 없으니 결국 육신을 보다 마나에 친화적으로 만들어야 해. 어렵구만.”
“영체와 육체는 근본 구조부터가 다른걸요. 천천히 하세요. 시간은 많으니까요.”
“쩝.”
하루 이틀 고민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그도 바로 본론에 돌입했다.
“지금부터 너희는 나를 대신해 몬스터를 사냥한다. 우선은 레벨이 낮은 녀석들의 레벨을 끌어 올리는 데에 중점을 둬. 쉬지 않고, 죽지 않고, 들키지 않고. 이 세 가지를 유념해.”
[예.]
스킬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만큼 의념만으로도 지시를 할 수 있겠지만 옆에 선 수아린을 바보로 만들지 않기 위해 굳이 입 밖에 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커다란 자루를 꺼냈다. 언제 만들었는지 몰라도 몬스터 가죽으로 만들어 굉장히 튼튼해 보였다.
“이 안에 엘리트 몬스터의 마석을 담아 올 것. 자루가 다 차면 귀환해라.”
자루 담당도 한 마리 정해 넘겼다. 레벨이 높아 어떤 상황에서도 자루를 지킬 수 있을 만한 녀석이었다.
“좋아, 이제 가라.”
[옙!]
[알겠습니다!]
106명의 유령 군단이 세상으로 풀려나는 순간이었다. 처음 소울 컬렉트 스킬을 얻었을 땐 그 찝찝함에 이루 말할 바가 없었지만 지금은 이 스킬을 익힌 스스로가 그저 대견할 따름!
“부디 뉴스에 나오지만 않기를…….”
“가자. 우리도 할 일 많아.”
“흐음.”
수아린이 의류 매장의 윈도우 스크린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애타게 오빠를 찾는데 안 가실 거예요?”
“아…….”
화면에는 요즘 들어 자주 볼 수 있게 된 긴급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부는 언제나처럼 정시우를 찾고 있었는데, 지금은 한국 내 플레이어 대표 회의라는 것을 만들어 그를 꼬시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것은 한국이 단독으로 진행한 일이 아니라 UN에서 추진하는 일로, 각국에서 대표 회의를 거쳐 선발된 플레이어들을 모아 세계 플레이어 대표 회의를 열려는 모양이었다. 그 회의가 끝나고 나면,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세계 플레이어 연합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다.
“기존의 플레이어 연합이 반발하겠네.”
“하지만 더 이상은 그들만의 리그를 진행할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오히려 발 빠르게 반응해서, 이번에 새로 생길 연합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이도 많아요. 보세요.”
의류 매장 윈도우에 설치된 스크린에 한창 용오름 길드의 마스터 김하룡의 얼굴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플레이어로서 기꺼이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플레이어를 꼽으라면 누구나가 그를 말하겠지. 최근 들어 정시우가 급부상하기는 했으나 그의 얼굴은커녕 본명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니, 중국집 라이더라는 별명만 떠돌 뿐이었다.
“관심 받는 건 귀찮아. 영웅 대접도, 구세주 취급도 곤란해. 중2병이 아니라 실제로 그래. 다른 이들 뜻대로 놀아나는 건 질색이거든.”
“그래도 슬슬 정체를 드러내시는 쪽이 오히려 나중에 덜 귀찮을걸요. 그냥 눈 딱 감고 회의장 쳐들어가서 앞으로 귀찮게 하지 마! 콰아아아아아! 하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오세요.”
그리고 이번 그랜드캐니언과 같은 사태가 한국에서 발생할 경우, 아무래도 다른 플레이어나 국가 기관과 연결되어 있는 쪽이 스무스하게 활약할 수 있을 터였다. 수아린은 이번 기회에 정시우가 스스로 지하 플레이어임을 드러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흠. 하긴 너희도 이제 슬슬 편하게 지낼 때가 됐지.”
“꼭 그것만은 아니더라도요.”
“좋아, 갈까.”
만약 소울 포스를 익히지 못한 상태였더라면 그는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을 조금은 더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소울 포스를 익히는 것으로 인해 그는 어떤 상황에 놓여도 혼자만은, 아니 수아린과 용세하를 데리고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는 강해졌다. 그렇다면 더 이상 망설일 것은 없었다. 때가 온 것이다.
그때 마침 전화가 왔다. 마리나였다.
[시우, 나 잠깐 미국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말해 주고 가려고 전화했어.]
“너희 집 미국에 있잖아. 그냥 가면 되지 뭘 잠깐이야.”
[파트너가 한국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 아니면…… 너도 미국으로 올래?]
“잘 가.”
[너무해!]
마리나는 정시우의 매정한 태도에 한참을 찡얼대다가는 덧붙였다.
[실은 곧 서부 대표 플레이어 회의가 있어. 거기서 대표가 되면 그다음은 USA 대표 플레이어 회의. 그리고 거기서 또 대표가 되면 세계 대표 플레이어 회의.]
“그래, 너희 땅덩어리 넓어서 좋겠다. 나라 대표 회의도 나눠서 치르고 말이야.”
[명단 나왔는데 그 안에 세리아 없더라. 혹시 너한테 갔어?]
“아니 그 사람이 왜?”
[나한테 네 전화번호 물어봤었거든. 연락 안 왔어?]
처음 듣는 얘기였다.
“너 그렇게 내 번호 뿌리고 다닐래?”
[안 알려 주면 한국을 다 뒤지고 다닐 기세라서 어쩔 수 없이 줬는데…… 이상하다. 그래 놓고 연락을 안 했다니.]
“후. 다른 사람들한테는 알려 주지 마. ……세계 대표 플레이어 회의에서 보자.”
이미 번호를 줬다는데 더 따질 수도 없는 노릇. 그는 적당히 일러 두며 자신 또한 대표 플레이어 회의에 출두할 것을 밝혀 두었다. 그에 돌아오는 마리나의 대꾸에는 기쁨이 듬뿍 담겨 있었다.
[오, 결심했구나! 앞으론 데이트도 좀 더 당당하게 할 수 있겠다!]
“데이트는 던전 몬스터들이랑 해. 끊는다.”
[야, 잠깐, 시우!]
끊었다. 수련할 시간도 죽겠는데 데이트는 무슨 얼어 죽을 데이트. 그는 깔끔하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수아린이 그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저 회의에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구청에라도 쳐들어가야 하나.”
“그냥 회의장에 갑자기 나타나도 되지 않을까요.”
그랬다간 더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지만 실질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수아린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일단 TV에서 나오는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의 날짜와 주최 장소를 기억해 두었다. 바로 이틀 후였다.
“오빠, 또 전화 오는데요?”
“응? 아. 마리나면 곧장 끊어야…… 겍.”
전화를 건 사람은 어머니였다. 타이밍이 절묘한 것도 정도가 있었다. 조심스레 받아 보니 그 내용은 더욱 기가 막혔다.
[아들, 이번에 미국 다녀왔지? 이제 본격적으로 활동하려고 그래?]
“엄마 혹시 나한테 녹음기 같은 거 붙여 놨어?”
[엄마가 아들을 모르겠니.]
엄레이더의 능력은 놀라운 정도를 넘어 경악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쯤 그랜드캐니언에서 있었던 일이 전파를 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그에게 전화를 해 온 것도 마냥 부자연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누가 아빠 아들 아니랄까 봐 또 새 처자를 꼬셨더구나.]
“아니거든.”
[아니긴 뭐가 아니니.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서희한테 연락 왔었는데 그건 또 어떻게 된 일이니? 설마 아린이 대신 서희랑 다시 잘 해 보려는…….]
“끊을게.”
그가 망설임 없이 통화종료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어머니가 살짝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국 플레이어 대표 회의, 참석할 거면 엄마가 손 써 두마.]
“어떻게?”
[이번에 엄마가 거기 한 발 끼었거든. 네 아빠 빽으로.]
어떤 식으로 끼었다는 것일까. 너무 무서워서 물어보기 싫었다.
[우리 아들이 플레이어니까, 엄마가 도와주기 쉬운 입장에 있으면 좋잖니.]
“정말 잘도 그런 말을…….”
분명 아버지의 사업 파트너였던 적도 있지만 어머니는 어디까지나 현직 주부였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다시 비즈니스를 하게 되다니, 말은 안 해도 어지간히 정시우를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결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래, 참석해 보려고 해. 신경 써 줘서 고마워, 엄마.”
[칠칠맞지 못한 아들 챙기는 게 엄마 역할이잖니. 아린이는 잘 지내고?]
“네, 어머님.”
[어머나. 같이 있었구나.]
수아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교대했다. 그는 뭐가 좋은지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그녀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하늘을 보았다.
소설에서는 괜히 할 것 없을 때 하늘을 보면 뭔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곤 하던데, 현실은 어디까지고 냉정했다. 하늘은 어디까지고 푸를 뿐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흘러, 대표 회의가 열리는 날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