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89화.
[정시우]
[파괴자(Breaker)]
[Lv 110]
[근력 ? 405 민첩 ? 375 체력 ? 385 마력 ? 235]
[내성 ? 독 Lv10, 화염 Lv6, 저주 Lv6, 뇌전 Lv9, 빙결 Lv5, 바람 Lv5, 대지 Lv5]
[패시브 스킬 ? 직감 Lv9, 시각 Lv1, 미각 Lv1, 카오스 테일 Lv3, 무지는 용감 Lv9, 소울 포스 Lv1, 용의 위엄 Lv8, 헤비 웨폰 배틀 Lv7]
[액티브 스킬 ? 괴력 Lv3, 부여 Lv39, 강타 Lv38, 전투질주 Lv35, 크리티컬 불릿 Lv12, 워 크라이 Lv16, 스톤 스킨 Lv16, 크루얼 차지 Lv10]
“정말 미각이 생겼어…….”
“하암……. 축하드려요. 장금이가 부러워하겠네요.”
일어난 직후, 정시우가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아 상태창을 확인하며 멍하니 내뱉는 말에 수아린이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녀 역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조신하지 못하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무척 귀여웠다.
“어쨌든 스킬이 생겼으니 시험해 봐야겠지.”
정시우는 벌떡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10시간에 두 병씩, 어느덧 수십 병씩 생겨나 한켠을 채우고 있는 포션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보다 한꺼번에 인벤토리에 쓸어 넣고 안에 든 과일이라도 적당히 하나…….
“아침 차려 드릴게요.”
“어?”
그때 등 뒤에서 수아린이 다가와 과일을 뺏었다. 정시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보자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꾸했다.
“안 그래도 계속 던전이다 뭐다 해서 밥 제대로 못 챙겨 먹었잖아요. 휴식처에서 쉬는 동안만이라도 특별히 서비스해 드릴게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어째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무척 분하지만 그녀가 요리를 잘 한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셨습니까, 형님.”
정시우와 수아린이 일어나 부스럭대자 수련장에 틀어박혀 있던 용세하가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살짝 땀이 맺힌 이마를 수건으로 닦으며 나오는 녀석을 보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대충 5시간 정도가 흘러 있었다.
용의 꿈을 꾸느라 늦어진 것인가, 한껏 긴장한 육체가 평상시 호흡을 되찾는 데 오래 걸린 것인가.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다.
“넌 여태 창을 휘두르고 있었냐?”
“옙, 형님. 아무리 날뛰어도 멀쩡해서 조금 오기를 부리고 말았습니다.”
수련장의 모든 기물에는 파괴가 되지 않는다는 옵션이 붙어 있다. 그래서 오기가 생긴 용세하가 전력으로 날뛰었지만 그래도 눈에 띄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너 바보냐?”
“형님이 전력으로 내지른 펀치가 기껏 샌드백 하나 부수지 못한다면 형님도 화가 나시지 않을까요?”
“흠.”
정시우는 그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용세하를 따라 수련장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보기에는 방 하나 정도의 크기였던 수련장은, 막상 안에 들어서고 보면 그 안에 또 30평 아파트 하나가 들어갈 것만 같은 상당한 공간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련을 위한 링, 샌드백처럼 체육관에 비치된 기구 말고도 트레이닝 센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운동기구들로 가득했는데, 그 기구들이 어디서 전력을 공급받아 움직이는지는 그야 물론 알 수 없었다.
“슬슬 이 비현실에 적응해 가는 스스로가 짜증나는데.”
“형님, 한 번 쳐 보시겠습니까?”
“흠.”
샌드백은 그에게 향수를 느끼게 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어릴 적, 그가 힘을 제어하기 위해 온갖 무도를 수련할 때 샌드백은 그의 근육 제어를 가늠하는 중요한 시험 수단이었다.
“그리고 참 많이도 터트려 먹었지…….”
자신의 힘을 완벽히 컨트롤할 수 있게 되어, 더 이상 샌드백을 쳐도 터지지 않게 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이던가. 그 이후로 샌드백에는 손을 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힘 조절을 안 해도 되는 샌드백이라니 실로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후…… 흡!”
정시우는 주먹을 쥐고 짧게 끊어 샌드백을 가격했다. 용세하가 옆에서 보기에는 한없이 가벼운 일격이었으나, 주먹이 샌드백에 명중한 순간 끔찍한 굉음이 터지며 샌드백이 위로 치솟아 천장을 강타했다.
그 순간 수련장 전체로 터무니없는 수준의 진동이 퍼졌다. 용세하는 다리를 휘청했다가는 간신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형님…….”
“오, 진짜 안 터지잖아.”
“대체 힘이 얼마나 강하신 겁니까……?”
용세하는 마나조차 담기지 않은 일격의 여파만으로 균형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기 이전에 그저 황당한 심정이었다.
이 샌드백은 평범한 샌드백이 아니다. 지하 플레이어인 정시우의 수준에 맞추어 충격 흡수량이 인류의 상식을 벗어난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라니!
그의 스테이터스에 대해선 얼마 전에 들은 적이 있다. 물론 레벨이 더 올랐으니 스테이터스 또한 더 성장했겠지만, 방금 그가 낸 파괴력은 결코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드웨어가 같다고 모든 컴퓨터가 똑같은 성능을 내는 건 아니잖아. 소프트웨어다, 소프트웨어. 너도 네 육체를 다루는 데에만 10년 이상 골몰해 봐. 나처럼 될 테니까.”
“큭,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도 있었더라면!”
정시우는 헛소리를 하는 용세하를 놔두고 양손으로 번갈아 샌드백을 두들겼다. 한 번 두들길 때마다 반동이 극심했기에 도저히 권투를 연습할 수는 없었지만 뭐 하나 터지지 않고 전력으로 펀치를 내지를 대상을 찾은 것만으로도 정시우에게는 행운이었다.
‘육체와 정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 확실히 예전엔 그걸로 충분했어. 하지만 더 이상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되었지. 이제 내겐 마나가 있으니까.’
마나를 얻은 시점을 기준으로 정시우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나가 깃들어 강화된 그의 육신은 보다 무리한 동작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게 되었고, 반응속도도 터무니없이 빨라졌다. 여태까지 정신없이 전투에 골몰하느라 그 자체를 연구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 천추의 한이었다.
“당분간은 육체와 마나의 조화에 집중해야겠어.”
“그 이상으로 말입니까?”
“지금은 그냥 육체를 마나로 강화하는 데에 만족하는 수준이잖아.”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정시우가 만족하는 그 수준을 달성하지 못해 끙끙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만으로는 안 돼. 꿈속의 용은 좀 더…… 둘을 하나로 만들었어. 육신이 움직이면 마나가 움직이고, 마나가 움직이면 육신이 움직이는 그런 경지였지. 아니, 아예 둘을 구분하지 않았어.”
“그게 가능합니까?”
“아직은 모르지.”
정시우의 초인력은 마나의 영향을 받아 근본적으로 강화되었으며, 원한다면 여기에 마나를 더욱 주입하여 강화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용의 육신은 굳이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것도 없이 언제나 만전이었다. 그것은 무수히 많은 패시브 스킬과 액티브 스킬이 교류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육신이 하드웨어라면 정신은 소프트웨어. 육체가 하드웨어라면 마나는 소프트웨어.
패시브 스킬이 하드웨어라면, 액티브 스킬은 소프트웨어. 최후에 그 모두가 하나가 된다.
“형님은 지금 하나의 이론을 창조하고 계시군요. 더구나 그것을 실험하기엔…….”
“나도 알아. 마력이 부족하지. 터무니없이.”
덤으로 시간도 부족하다. 그러니 부족하게나마 지금의 정시우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수밖에 없다. 첫째로는 오감의 스킬화, 둘째로는 전투질주의 생활화였다.
오감을 스킬화하는 것으로 정시우는 육신과 패시브 스킬을 얕게나마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전투질주를 항상 펼치는 것으로 액티브 스킬을 육신에 동조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여태까지는 그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마나가 적었지만 이제는 가능했다.
“미각은 어째선지 몰라도 얻었으니까 이제 후각과 청각, 촉각만 해결하면 되겠네.”
“형님께서 하신다면 저도 해 보겠습니다! 오감의 스킬화, 전투질주…… 는 아직 없지만 대충 간단한 육체 활성화 계열 액티브 스킬로 시도해 봐야겠군요.”
“그래, 분명 네 실력도 더 좋아질 거야. 그러면 일단…….”
정시우가 내지르던 주먹을 멈추고 한 손을 내밀어 천장에 거세게 부딪혔다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잡아 세우고는 뒤돌아섰다.
“밥을 먹자.”
“아, 이제 끝내셨군요.”
수련장 안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미는 수아린의 모습이 보였다. 요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어 내린 모습이 깜짝 놀랄 만큼 예뻤다.
“그만한 소음이 방 바깥으로 안 나오는 게 이상하네요. 어쨌든 두 분 다 식사하세요.”
“……형님. 전 어째선지 지금 무척 비참해졌습니다.”
“아니 왜. 절로 푸근해지는 광경 아니냐.”
수아린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앞치마를 두른 수아린의 모습은 영락없이 참한 새댁이었다. 저 모습을 본 남자 중 96%는 반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설마 용세하가 나머지 4% 중 하나였다니.
“차라리 TV에 나오는 연예인이라면 그냥 흐뭇하겠는데 말이죠.”
“눈앞에 있으니까 더 좋은 거잖아.”
“그게…… 하.”
정시우는 수아린의 시선이 그에게만 꽂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알고도 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까. 말을 해 무엇하리, 괜한 말을 꺼냈다가 또 수아린에게 벌을 받는 것은 싫었던 용세하는 그냥 침묵하기를 택했다. 정시우만 고개를 갸웃할 따름이었다.
“오늘 식사 준비하면서 보니까 그새 식재료가 많이 줄었더라구요. 아무래도 장을 한 번 더 봐야겠어요.”
“그럼 오늘 해치울까.”
“네! ……흐히히.”
음, 역시 미소가 쓸데없이 상쾌했다. 정시우는 그 이유에 대해 탐구하기를 포기하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 시간이 많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식탁은 실로 풍성했다.
돼지고기와 감자, 두부가 듬뿍 들어간 된장국에 갈치구이, 고구마 순 볶음, 계란찜에 두부전……. 김장까지 할 시간은 없어 김치는 공산품이었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훌륭한 상차림이었다.
“요리사 해도 되겠다.”
“드셔나 보고 말씀하시죠.”
수아린의 득의한 표정을 보니 맛을 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것 같았지만……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국을 한 술 떴다.
머릿속으로 우주가 펼쳐졌다.
“윽!?”
“맛 이상해요!? 그럴 리가 없는데, 간 제대로 봤는데…….”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미각 스킬을 잊고 있었다! 사실 정시우의 미각은 그리 섬세하지 못한 편이었는데, 용의 꿈을 꾸고 개방된 지금은 지나치리만치 감각이 확장되어 된장국에 어떤 재료가 어떤 비율로 들어갔는지 알아맞힐 수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맛있어, 자세히는 묻지 마. 난 지금 이 된장국이 어째서, 어떻게 맛있는지 A4용지 다섯 장으로 서술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처음부터 순순히 칭찬해 줬으면 될 것이지.”
순식간에 수아린의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그녀가 흐뭇하게 웃으며 정시우를 바라보는 꼴을 견디지 못한 용세하는 빠르게 그릇을 비우고 일어섰다.
“전 곧장 수련 돌입하겠습니다. 두 분이서 장 보고 오시죠.”
“이 녀석이 귀찮은 일에 혼자 빠지려고…….”
“그래요, 셋이 다 나갈 필요는 없는 일이죠. 그렇게 하세요.”
“쳇, 그것도 그렇지.”
정시우는 수아린이 차려 준 한 상으로 미각 스킬을 한껏 시험할 수 있었다. 사실 미각 스킬은 실전에서 활용할 길이 그리 없는 스킬이었지만, 다른 감각과 연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익혀야 하는 것도 맞았으니…….
무엇보다도, 후각 스킬을 얻기 위해선 결코 미각 스킬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다. 그는 무척 진지하게 식사에 임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수아린의 기분을 무척 흡족하게 만들었다.
“좋았어.”
“오빠, 알죠?”
식사를 마칠 때쯤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묻는 수아린. 정시우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거지는 내 담당, 맞지?”
“잘했어요.”
그로부터 30분 후, 설거지를 마친 정시우는 수아린과 함께 휴식처를 나섰다.
순조로이 마트에 도착해 장을 다 봤을 즈음, 그의 문신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