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88화.
마리나와의 저녁식사는 무척 즐거웠다. 물론 서빙을 하는 직원들의 흐뭇한 시선이나 마리나와 수아린의 신경전이 아주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마리나의 말마따나 스테이크가 훌륭했기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즐길 수 있었다. 고기의 질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정시우도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으아, 소주 땡기는데.”
“그 소독용 알코올을 말하는 거라면 난 널 경멸할 거야.”
“아직 제대로 소주를 안 마셔 봐서 그래. 다음에 내가 아는…….”
“다음? 이다음?”
마리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째선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기분이 무척 좋아진 모양이었다. 아니, 실은 그 이유가 대충 예상은 가지만.
“그래, 그러면 뭐 한 번 속아 주지 뭐! 난 당분간은 한가하니까 어울려 줄게!”
“어, 응. 순순하니 좋네.”
“그르르르르르.”
“아린이 너는 왜 비스트 모드냐.”
“그루밍이라도 해 주시지요, 형님.”
무신경한 정시우와 현실을 외면하는 용세하는 홀가분하게 만찬을 즐겼다. 마리나의 목적은 정시우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수아린과 용세하를 밀어내려 하지도 않았기에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수아린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늦기 전에 들어가서 쉬어야죠, 오빠. 다 드셨으면 일어날까요?”
“아니, 원래 이럴 때 많이 먹어 둬야지. 가볍게 세 그릇만 더 먹을까.”
“누가 보면 레스토랑이 아니라 고기 뷔페라도 온 줄 알겠네욧!”
“뭐 어때, 아린. 잘 먹으니까 보기 좋잖아. 우리 파파는 항상 나한테 뭐가 됐든 잘 먹는 남자를…… 아, 아무것도 아냐.”
정시우는 스테이크를 큼직하게 썰어 입에 우겨 넣으며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마리나가 말하는 파트너를 말 그대로 함께 전투를 하는 파트너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어쩌면 아닌 걸까. 어쩌면 마리나는…….
‘음. 말도 안 되지.’
제아무리 마리나가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고 집안도 좋고 심지어 플레이어 중에서도 톱으로 우수하다고 해도 정시우는 그녀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었지만, 그것을 마리나가 전부 알아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정시우를 연애 대상으로 보고 있지는 않겠지. 아마도, 그렇지만.
‘드러낸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어마어마하니까…… 나랑 보다 친밀한 관계를 쌓아 부려 먹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지나치게 친근한 태도를 취할 리가 없어. 음, 좋아. 완벽한 정리야.’
마리나와 에단 또한 그를 분석했겠지만 정시우 역시 나름대로 그들을 판단했다. 그 결과 친하게 지내서 손해 볼 것은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마도 공학 연구의 첨단에 서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도 큰 영향력을 지닌 B&Y. 마리나가 지닌 능력과 플레이어로서 확보할 수 있는 정보. 친하게 지내 나쁠 것이 없다. 개인의 무력에는 자신이 있지만 아직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정시우에게는 말이다.
“시우?”
“너무 맛있어서 그래. 여기 고기 한 접시 더!”
정시우는 그 즈음에서 생각을 밀어내고 접시를 들어 올렸다. 기다리고 있던 웨이트리스가 접시를 받아 드는 것을 보며 마리나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 많이 먹어!”
“누가 보면 스스로 요리라도 한 줄 알겠네요.”
수아린은 끝까지 투덜거렸지만 마리나의 미소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이쯤에서 마리나가 정시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았더라면 테이블을 뒤엎고 그의 뺨에 전력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겠지만 정시우에게는 실로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게는 마음을 읽는 능력이 없었다.
“와인도 맛있지, 그렇지?”
“개인적으로는 좀 더 달달한 게 좋지만 이것도 나쁘진 않네.”
“그치그치?”
어울리지도 않게 머리를 지나치게 굴리는 남자와 지나치게 솔직하고 순수한 여자의 첫 저녁식사는 그렇게 즐겁고도 유감스럽게 끝났다.
마리나와 정시우는 비로소 번호를 교환하며 다음을 기약했으며, 수아린은 울상이 되어 그것을 지켜보았고, 용세하는 그저 한숨을 쉴 따름이었다.
마리나를 배웅하고 되도록 티가 나지 않게 휴식처로 돌아온 정시우는 우선 옷가지를 모두 벗어 던지고 곧장 샤워를 했다. 묵은 때와 피로까지 모두 깨끗이 씻어 낸 후 옷을 대충 걸치고 침대에 드러누우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어 샤워를 하고 나온 수아린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그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입은 가벼운 파자마 너머로 슬쩍슬쩍 드러나는 흰 살결이 실로 눈부셔, 눈을 둘 곳이 없었다.
“어차피 또 2시간 자고 일어나서 다시 던전에 들어가자고 할 거죠?”
“아니. 레벨도 많이 오르고, 세트나크의 힘까지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마력도 추가로 올랐으니…… 조금 정도는 재정비를 할 생각이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사실 수아린 역시 그의 성장에 따라 힘이 리타이어 이전보다 늘어나는 바람에 스스로를 점검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동안 사용하지 못했던 스킬들을 다시 능숙하게 다룰 수 있도록 연습도 해야 했고, 또 이번에 새로 얻은 스킬도 있었다.
“그래요, 그럼. 용세하 씨도 마찬가지죠?”
“예. 이제 둠 나이트의 스켈레톤 랜스를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게 손에 익을 때까지 연습을 해야겠죠. 아니, 말이 나온 김에 지금부터 해야겠네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있었지……. 난 좀 잘 테니 너 먼저 수련장 개시해라.”
“옙!”
C+++등급. 분명 얻을 당시엔 굉장히 좋은 아이템이었는데 지금은 심드렁했다. 정시우는 스켈레톤 랜스를 꺼내 들고 휴식처 안쪽에 새로 생긴 수련장으로 돌격하는 용세하를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배웅하다가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코앞에 수아린의 얼굴이 있었다.
“흐익.”
“오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순백의 피부, 빤히 그를 들여다보는 맑고 큰 눈망울. 정시우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수아린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자고 싶으니까 좀 떨어지라고 말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거리, 조금 가깝지 않냐?”
“오빠, 마리나 비셋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녀는 뒤로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하고 정시우는 생각했다. 정시우는 혼자가 아니다. 수아린과 용세하, 둘의 서포터와 운명공동체였다. 그들의 정체를 마리나에게 들킨 이상, 그것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하는가, 에 대해선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우리가 그나마 믿을 만한 여자. 그러니 아마 괜찮을 거야.”
“그러면 세리아 윌슨은?”
“주제파악 잘 하는 여자. 그러니까 얘도 아마 괜찮을 거야.”
“…….”
제아무리 수아린이라도 동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정시우의 냉혹한 평가! 이번 미국행에서(미국에서 본 것이라곤 B&Y 본사 건물과 엉망진창으로 무너지는 그랜드캐니언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녀를 불안하게 했던 요인들이 깔끔하게 해결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리나와 세리아의 매력적인 미모를 떠올려 보면, 정시우의 이런 초연한 반응이 오히려 역으로 그녀를 불안하게 한다고 해야 할까, 제아무리 전에 여친이 있었다고 해도 이쯤 되면 그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이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러면 저는요?”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해 수아린이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정시우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너?”
“저, 저요. 오빠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어요.”
저질러 버렸다는 생각에 얼굴을 화악 붉게 물들이면서도 수아린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더 꼴사납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폭사하는 한이 있어도 돌격, 돌격이었다!
“음.”
정시우는 안절부절 못하는 수아린을 보며 솔직한 생각을 입에 담았다.
“네가 걔네보다 훨씬 예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믓.”
그 말을 듣는 순간 수아린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뭐야. 그런 말 해 주길 바란 거 아니었어?”
“그, 그게.”
맞았다. 맞았지만…… 설마 정말로 그가 원하는 말을 해 줄 줄은 몰랐다! 정시우의 성격에 맞는 유감스럽고 짜증나는 답변이 돌아오리라 생각해서 이렇게 과감한 말도 할 수 있었던 건데!
“그게, 오빠. 어, 그러니까…….”
“에휴.”
수아린의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그러나 정시우는 고작 그런 이유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냐는 듯 픽 한숨을 쉬며 그녀의 머리에 한 손을 얹었다.
“어쩐지 마리나한테 너무 신경을 쓴다 싶더라니. 얘기 끝났으면 난 이제 잔다. 너도 쉬어라.”
“아, 아니 오빠, 잠깐만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는 말을 해 줘야 저도 앞으로의 입장, 아니 태도를…… 오빠?”
“쿠우으으으…….”
“이 사람 잠들었어!”
정시우는 비기 3초 만에 잠들기를 발동해 기분 좋은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버렸다! 홀로 남은 수아린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렇게 심장 두근거리게 하는 말을 해 놓고 비겁하게 혼자 잠들어 버리다니!
‘치, 침착해라 수아린. 이건 공명의 함정이야! 오빠는 분명 별 생각 없이 던진 말일 거야. 그렇지 않고선 저렇게 태평하게 잠들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나니 살짝 허무해지는 한편으로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어쨌든 정시우가 그녀를 마리나나 세리아보다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은 그것으로 되었다. 만족할 수 있었다.
“……자자.”
괜히 기력을 소모하는 바람에 지치기만 더 지쳤다. 그녀는 성대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침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본인이 정시우 못지않게 유감스럽다는 사실을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정시우는 꿈에서 용이 되어 있었다.
‘또냐.’
이번엔 방울도 없었는데, 어째서일까. 혹시 그 방울에 애프터서비스까지 첨부되어 있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실로 거대한 크기의 용이 되어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것. 지나치게 리얼한 공기의 감촉을 느끼며, 정시우는 그 무한한 자유감을 만끽하기로 했다.
‘이전과는 달라. 아주 조금이지만 내 마나 감각이 확장되었기 때문인가? 한결 더 많은 것들이 느껴지는데.’
용의 육신은 실로 굉장했다. 품고 있는 마나의 양도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육체의 구성이 인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정시우의 감각으로도 미처 다 파악할 수 없는 압도적인 밀도의 뼈와 근육. 심장에서 비롯되어 혈관을 타고 전신을 일주하는, 마나를 잔뜩 머금은 피.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정시우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나가 육신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나왔다.
마나와 육신은 다르면서도 같았다. 용은 순수한 마나가 될 수도 있었고, 순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었다. 어째서 그것이 가능한가, 그 원리는 지금의 정시우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영역에 있었다.
[후우…….]
그 육신을 앞에 두고 ‘종이 다르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생물의 극에 이른 그 육신은 그 자체로 무수한 세월과 영육의 격, 다른 모든 생물의 기록을 끌어모아 스스로 만들어 낸 궁극의 ‘스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가.’
정시우는 그 시점에 이르러 간신히,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이 용을 이루는 모든 것이 스킬이다. 어쩌면, 스킬의 궁극에 이르면 스킬과 육신이 하나 되는 것인지도 몰라. 스킬은 육신을 완성하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몰라!’
필요한 것을 더하고, 불필요한 것은 빼며, 그렇게 자기 자신의 방향성에 맞는 완벽한 육신을 만들어 낸다. 창조는 신이 이루었으나 육신의 완성은 스스로에게 달린 것. 그것이 이루어지면 더 이상 종을 구분할 필요조차 없었다.
‘하지만 스스로 이루는 것을 포기하고 신의 힘, 마나를 받아들인 인간은 육신이 변모했지. 그자들은 자아 또한 무너졌다. 그도 당연하다. 육신과 영혼, 마나는 하나나 마찬가지니까.’
정시우의 사고는 점점 더 빨라졌다. 용의 육신에 깃들어 하늘을 나는 것, 단지 그것만으로 정시우는 무수한 영감을 얻었으며 새로운 감각을 일깨웠다.
그것이야말로 정시우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다른 이였더라면 생소한 감각에 적응하지 못해 기절하거나 괴로워했을 것이다.
‘스킬을 만든다는 나의 방침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도 맞는 말이야. 육신이 하드웨어라면 마나는 소프트웨어. 둘 중 어느 한쪽이 월등해선 결국 자멸하게 될 테니까.’
정시우가 간단한 결론에 이른 그때, 문득 용이 허공에 멈추었다. 용의 눈은 폐허가 된 지상에서 쩔뚝이며 걷고 있는 소 한 마리에게 꽂혀 있었다.
[마지막 사치인가.]
용은 씁쓸하게 웃고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대로 하강하여, 단숨에 소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거대한 입 안으로 퍼지듯이 들어오는 부드러운 소의 살점과 피, 근육과 뼈. 용은 그 모두를 쉽게 씹어 부수었다. 극한으로 강화된 미각이 그것들을 세밀하게 느꼈다.
‘아.’
정시우는 그제야 자신이 이 꿈을 꾼 까닭을 깨달았다.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어서 꿈으로까지 꿨단 말이야!?’
정시우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새로운 감각 스킬 미각을 획득했다.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