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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홀로 로그인-87화 (87/260)

# 87

87화.

영혼들이 생전의 힘을 모두 갖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마는 턱도 없는 소리였다. 영체에는 아무래도 물리력이 부족했고, 언데드 무리와 충돌한 순간 절반 이상이 소환해제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남은 반은 제법 분투하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이 성공적으로 적을 쓰러트리면, 그들로부터 아주 미약한 양의 마나를 흡수하여 부상을 회복하고 더욱 강해지는 모습까지도 보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다.

“육성이 가능한 군단이라 이거지…….”

“오빠가 지닌 어떤 힘보다도 무섭네요, 이건…….”

가장 무서운 점은 그들을 부리는 데에 마나가 소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체를 알 수도 없고 괜히 찜찜하기만 했던 스킬의 화려한 변신에 정시우는 매우 만족했다. 동시에 개미굴 던전 탐험의 필요성도 늘어났다.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할까.”

“저놈으로 마지막입니다, 형님!”

소울 포스를 발동하고 대략 다섯 시간, 유령들과 함께 쉼 없이 전투를 벌인 끝에 기어이 그들은 언데드 무리의 끝을 보고 말았다. 죽여도 죽여도 바퀴벌레처럼 어디선가 밀려 나오던 해골이며 유령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와, 끝났다! 다 해치웠다!”

“후…….”

몬스터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게 되자 마리나는 양팔을 높이 들고 만세를 불렀다. 반면 세리아 윌슨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한숨을 쉬는 것이 대비되었다.

“시우, 고생했어!”

“너도.”

그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깨달은 마리나가 날개를 한 번 펄럭여 그에게 부드럽게 날아왔다. 정시우는 그녀의 활짝 편 손바닥을 보며 마주 손바닥을 펴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역시 호흡이 딱 맞네!”

“하이파이브 정도로 무슨.”

수아린이 투덜거렸다. 그대로 정시우를 끌어안을 기세였던 마리나가 그 앞에서 멈추어, 대신 수아린을 끌어안았다.

“이으윽.”

“아린도 고생했어!”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이렇게 귀찮은 일을 겪은 건 전부 마리나, 당신 때문이었죠. 대가는 단단히 받아 낼 거예요.”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으을.”

“당장이라도 연을 끊어 버리고 싶은 사이죠.”

마리나는 수아린의 리타이어 이전에 그녀와 제법 친했던 모양이다. 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정시우는 마리나가 그 대신 수아린에게 달라붙어 귀찮게 하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영혼들을 회수했다. 용세하는 날개를 펼치고 전장을 돌아다니며 미처 수거하지 못한 전리품들을 수거하는 중이었다.

“앗, 그…….”

“음? 윌슨?”

그러던 중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세리아 윌슨이 눈앞에 서 있었다. 금색이 섞여 반짝이는 날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조심스레 물어 왔다.

“원리는 모르겠지만…… 그 영혼들 사이에 내 길드원들도 끼어 있는 거 맞지?”

“나도 어째서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맞아.”

그가 직접 플레이어를 죽였건 죽이지 않았건 상관없다. 플레이어의 죽음 순간, 혹은 직후 정시우가 그들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면 그들의 혼이 그의 문신에 흡수되고 만다. 스킬이 진화한 지금까지도 그 원리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내, 길드원들에게 말을…… 전달할 수 있을까?”

“닿지는 않겠지만.”

“크흑…….”

그의 무심한 대꾸에 세리아 윌슨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어느덧 자신 앞으로 다가온 엠퍼러 길드원들의 유령을 마주하며 어떻게든 입을 열었다.

“…….”

그녀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몇 마디인가를 정시우는 굳이 듣지 않았다. 그녀의 입술이 다물어진 것을 확인하고서, 그는 모든 유령들을 문신으로 빨아들였다.

“……후우.”

세리아 윌슨은 마지막으로 성대한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어 정시우를 마주했다. 언젠가의 이서희와 닮은 눈빛에 정시우는 아주 조금 동요했다.

“고마워. 여러 가지로, 모두.”

“아까 내가 한 말만 기억하면 됐어.”

“응. ……책임을 지겠어.”

그 말을 마치고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본 것들은 마음속에만 담아 두겠어. 너는……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플레이어가 아니지만, 난 그 덕분에 구원 받았으니까.”

“떠들고 다녀도 상관없어. 누군가 시우에게 트집을 잡으려거든 그전에 나와 B&Y를 무너트려야 할 테니까.”

“언제부터 우리가 운명공동체가 됐냐.”

정시우는 묘한 기류를 감지하고 잽싸게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말하는 마리나에게 반박했다. 그야 무척 고마운 일이긴 했지만 에단 비셋의 말과 그 호의로 가득한 눈빛을 떠올려 보면 고맙다며 덥석 물기가 저어되지 않는가!

“오늘은…… 조금 쉬고 싶어서, 이대로 물러날까 해. 그전에 네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아, 아직 쓰고 있었구나.”

불과 몇 시간 전 처음 만났을 때의 그녀를 상대로라면 말도 길게 섞지 않겠지만, 격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큰일을 겪은 그녀를 상대로라면 괜찮겠지. 더욱이 이미 다른 것들을 너무 많이 보여 줘서 이제 와 얼굴 정도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아.”

그녀는 투구를 벗고 드러낸 정시우의 맨 얼굴을 보며 아주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양인…… 최근 마리나 비셋의 행적을 생각하면, 한국인?”

“맞아. 덤으로 이름은 정시우다.”

“역시 그랬구나……. 얼굴을 보고 다시 말할게. 시우, 정말 고마워.”

“그래그래, 윌슨 양.”

정시우는 감사인사를 들을 만한 짓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냥 기분이 찝찝해지는 게 싫어 살렸을 뿐, 조금만 더 늦어 그녀가 몬스터가 되었더라면 가차 없이 망치로 짓눌러 죽였겠지.

그러니 감사를 하려거든 정시우보다는 마리나에게 하는 것이 옳았다. 마리나야말로 그녀를 계속 인간으로 붙들어 두려고 노력한 이였으니까.

“후.”

물론 그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만으로 어느 정도 그의 속내를 읽어 낸 모양인지, 세리아 윌슨은 곧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루이오스의 흔적이 남은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오늘은…… 정말 미안했어. 먼저 돌아갈게. ……마리나 비셋, ‘신의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어. 조만간 그 건에 대해 함께 얘기했으면 해.”

“얼마든지. 그런 일로 연락하는 거라면 환영이야.”

세리아 윌슨은 마지막으로 다시 정시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시우.”

정시우가 굳이 다시 볼 필요는 없다는 말을 하려던 그때 세리아 윌슨이 날개를 퍼덕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마리나의 곱지만은 않은 시선이 그 뒤를 날카롭게 쫓았다.

“저년이 설마 시우를…….”

“목숨 한 번 구원받았다고 반하는 건 너무 안이한 전개죠? 지금이 어느 시댄데.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정작 본인의 마음은 안이한 전개 일직선을 내달리고 있는 수아린의 질문에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솔직히 어떻든 상관없으니 이제 그만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벤토리가 부족해 미처 수거하지 못한 전리품들을 거대한 자루에 담아 B&Y본사 빌딩까지 마리나와 함께 날라야 했던 것이다.

“마리, 미스터 정! 둘 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그 결과 감사와 감격으로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 비셋과 다시 조우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있던 정시우는 성대한 한숨을 쉬어야 했다.

“이야기는 보고를 받아 알고 있습니다. 설마 이렇게 완벽하게 해결해 주실 줄은 몰랐는데…….”

“아, 으음. 미스터 비셋?”

“에단이라고 편하게 불러요. 아, 나도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까요? 이제 곧 성이 같아질지도 모르는데. 하하하.”

관계진전에서 그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정시우를 데릴사위로 맞이하려는 비셋 가문의 수장! 수아린이 재차 발끈했지만 그래도 학습능력은 있는 지라 어떻게든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참았다.

분명 참는 데 성공했을 터인데, 다음 순간 에단은 이렇게 말했다.

“실은 사과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이번 건, 마리나를 제외하고도 제가 부리는 수하들에게 해당 지역의 감시를 시켰기에…… 시우, 당신과 함께한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하게 되었거든요.”

“헉.”

용세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정시우는 대충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험한 지역이라지만 그렇게나 넓은 협곡을 무대로 신나게 날뛴 것이다. 그에게만 들켰다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결국 그는 수아린과 용세하를 불러내어 에단과 대면시켰다.

“수아린, 용세하입니다. 알고 계시죠?”

“용세하 씨는 모르지만 수아린 양에 대해선 알고 있습니다. 치유 능력으로 그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는 치유사를 모를 수가 없지요. 무엇보다도…….”

용오름 길드 주도하의, 세계 최초 32단계 던전 클리어 과정에서 희생된 치유사. 그녀의 사망 소식은 비단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그가 그것을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자세히는 묻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최대한 감출 거예요.”

“당분간이면 됩니다. 언제까지고 숨길 생각도 없거든요.”

정시우에게는 능력이 있다. 언제까지고 수아린과 용세하를 숨어 지내도록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말에 수아린과 용세하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에단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 당신은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는 이미 당신 편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요.”

“그 말은 이미 내가 했어, 에단! 나 대신 점수 따지 마!”

“하하하.”

솔직히 든든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를 같은 성씨로 만들려는 음모만 아니라면 좀 더 잘 지낼 수 있을 텐데…… 정시우는 실로 유감스러워지고 말았다.

그 후로도 온갖 찬사를 늘어놓는 한편으로 어떻게든 그를 더 붙잡아 두려는 에단을 강철의 의지로 처단하고 나서야 정시우는 간신히 서울로 향하는 게이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자연스럽게 마리나가 섰다.

“왜 따라오냐.”

“너랑 같이 하루 만에 그랜드캐니언 사태를 해결하는 바람에 할 일이 없어졌거든. 이게 다 우리가 너무 우수한 탓이야.”

“던전이라도 가시지.”

“그게 말이지, 33단계 던전 공략팀이 소집되려면 아직 멀었거든.”

“그럼 너희 집에서 푹 쉬어.”

“하지만 난 시우의 집이 구경하고 싶어!”

마리나는 어떻게든 그를 따라오려는 기세로 만만이었다. 정시우가 게이트의 주인도 아니니 그녀를 막을 수 없었고, 결국 정시우는 그녀와 함께 게이트를 넘어 서울의 B&Y지사 건물에 도착했다.

“우리 저녁 먹을래, 시우? 그렇게 땀을 흘리며 뛰었으니 스테이크로 기운을 보충해야지! 거기에 와인도 딱! 캬아!”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그에게 한 발짝 다가오며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마리나. 하지만 어째 권유 멘트는 예비군 훈련이 끝나고 삼겹살에 소주나 한잔 걸치러 가자는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아저씨는 아저씨고 마리나는 보고만 있어도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금발의 미녀라는 점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정시우는 머릿속으로 에단 비셋의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됐어. 집에 가서 먹을래. 이 녀석들 하고 같이 먹어야 하니까.”

“으응?”

“들었겠죠, 마리나? 그렇게 와인이 마시고 싶으면 고급 레스토랑에라도 혼자 가서 폼 나는 와인이라도 병째로 원샷하도록 하세요. 저흰 초라하지만 오붓하고 다정하게 모여 앉아 집 밥을 먹을 테니까.”

기분 탓인지 굉장히 우쭐해하며 말하는 수아린. 그러나 마리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럼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곳이면 되는 거지?”

“아직 얘네를 대놓고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

“그거라면 괜찮아. 오빠가 가진 레스토랑이 있거든.”

“뭐……?”

“여보세요. 응, 나. 마리. 있잖아?”

그게 있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인가, 순간 그렇게 생각한 정시우였으나 마리나는 순식간에 전화를 들어 용무를 해결했다.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오케이. 마침 브레이크 타임이거든. 저녁 영업 안 하기로 했으니까 이제 가면 돼. 그 안에서 일하는 이들 모두 오빠 사람이거든. 아린도 미스터 용도 신경 쓰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도 돼.”

“레스토랑…… 통째로?”

“뭘 놀래?”

냉정하게 생각해 보니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이 무식한 여자가…….”

“자, 가자!”

마리나가 정시우의 한쪽 팔에 팔짱을 끼고는 그를 잡아끌었다. 티끌 한 점 없이 맑게 웃는 얼굴에 어둠을 드리우기가 싫었던 그는 결국 쓰게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 가자.”

“야호!”

“아, 안 돼. 오빠가…… 오빠가 공략당하고 있어…….”

“선배님, 혹시 연애를 게임으로 배우신 게……?”

“닥쳐요.”

“넵.”

정시우의 첫 해외 출장이 성공적으로 종료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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