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86화.
세리아 윌슨을 어떻게든 인간으로 남게 만드는 데 성공한 정시우가 그다음으로 행한 일은 물론 그녀가 이끄는 엠퍼러 길드원들을 살피는 것이었으나, 익히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루이오스 님을 버리고 그깟 인간에게 붙다니…….]
[당신을 마스터라고 따랐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지는군.]
[당신을 처리하는 건 이 빌어먹을 세트나크의 종자들을 마무리 지은 다음이니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너, 너희들…….”
그들은 이미 플레이어의 날개를 잃어버린 채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듯 번쩍이는 광채를 발하는 갑각질의 피부와 섬뜩하리만치 확장된 동공. 놈들은 플레이어였던 시절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해진 힘을 바탕으로 언데드들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놈들이 있어 방어막이 끝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감사인사를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빠, 가능할까요? 그래도 저번의 그 리자드맨들보다는 상태가 양호해 보이는데…….”
“아니, 내가 보기엔 더 안 좋아. 적어도 놈들에겐 지성은 없었잖아.”
정시우는 심드렁하니 대꾸하며 망치를 들었다. 그것은 거인의 비명이었다.
[거인의 비명]
[랭크 ? C+++]
[공격력 ? 1,450 ? 2,050]
[숙련도 ? 205/400]
[옵션 ? 1. 거대화 가능 2. ???]
[중급 언데드의 힘이 담긴 망치. 산 자는 이 망치에 닿는 것을 두려워한다. 많은 힘이 숨겨져 있다.]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역시나 거인의 비명에는 거대화 기능이 감추어져 있었다. 던전을 돌며 얻은 해머 두 개가 다 거대화 옵션을 품고 있다니 드물다 못해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직 이 무기의 비밀이 다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딱 잘라 말해 지금 정시우의 수준보다 낮은 무기를 애용하는 것은 비단 다른 무기가 없어서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기의 가능성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 잠깐만. 저들을 죽일 셈이야?”
“응.”
정시우는 자신을 붙잡는 세리아 윌슨에게 간단히 대꾸하며 바이크의 핸들을 붙잡았다. 그녀가 당황하며 그를 다시 붙들었다.
“나, 나를 구해 줬듯이 저들도 그렇게 할 수는 없는 거야?”
“넌 특별했어. 저들은 아냐.”
끝까지 저항하고 버텨 냈던 세리아 윌슨과는 달리 그들에게는 이미 고유의 자아가 남아 있지 않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뿐이지 신의 뜻을 따르는 몬스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무수한 세월이 흘러 이전의 자아가 주도권을 되찾을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을 믿고 풀어 주기엔 지금 저들은 너무 위험했다.
“큭…….”
“그리고 난 이미 아까 한 번 경고했지. 이젠 저들이 저들의 책임을 질 차례야. 아, 너는 다른 방식으로 책임을 지도록 해.”
“나는 물론 그럴 생각이야!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정시우는 세리아 윌슨을 돌아보았다. 루이오스의 영향을 모두 지워 내지는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피부에서는 미약하게나마 발광이 일어나고 있었고, 눈동자는 완전한 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걱정과 연민, 자책. 틀림없는 인간의 것이다. 저 몬스터들에게는 없는 것.
“그래도?”
“……미안해. 고마워.”
정시우의 반문에, 끝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이미 한 번 빚을 진 마당에 그에게 부담을 더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지. 탁월한 판단이다. 더 귀찮게 했으면 그냥 이 여자를 손에 쥐고 휘둘러 몬스터를 사냥할 참이었다.
“그러면 거기서 보고 있어. 마리나, 넌 아직 여력 있지?”
“응, 나 중간부터 계속 소리만 지르고 있었잖아.”
“저도 괜찮습니다, 형님.”
마리나를 도와 엠퍼러 길드를 저지했던 용세하 역시 아직 쌩쌩했다. 중간에 놈들의 타겟이 언데드로 바뀌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면…… 아린이 넌 살아 있냐?”
“어떻게든 축복은 걸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수아린은 신성 방어막을 해제한 후 강림 상태로 버티지 못하고 미니 사이즈로 돌아와 정시우의 품에 들어와 있었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신성 방어막을 유지했으니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정시우가 세트나크의 마나를 빨아들여 레벨을 올릴 때마다 서포터인 그녀도 같이 성장한 덕에 신체적으로는 안정이 유지되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저것들 후딱 정리하고 돌아가서 쉬자. 진짜 완전 지쳤거든.”
“겉으로 보면 멀쩡한데 말이지…….”
마리나는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만은 이전 설악산에서 함께 전투를 했던 그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늘 본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전부 그녀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들뿐이라 질투감조차 일지 않았다.
아니, 질투감보다는 오히려……. 그녀는 그 시점에서 사고를 중단했다.
“빠, 빨리 보내 주자!”
“그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말이지.”
“어쩜 이 사람들 대사가 최악이야!”
그들은 숭배할 대상을 잃은 언데드들과, 그 언데드들에게 무한한 적의를 품고 있는 루이오스의 종을 향해 돌진했다.
[놈들, 순순히 차례를 기다리지 못하고!]
[신의 뜻을 거스르는 버러지들! 원이 그렇다면 지금 당장 네놈들부터…….]
놈들 역시 일행을 의식하고 있었기에 금방 전투가 벌어지…….
[카흑!]
“내세엔 좀 더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태어나렴.”
[큭!]
[끄아아아악!]
“으랏차!”
……는 일은 없었다. 분명 루이오스에 의해 강화되었을 터인 그들은 마리나의 압도적인 난사 스킬과 정시우의 괴력을 머금은 강타 앞에 거짓말처럼 죽어 쓰러지고 말았다. 용세하까지 굳이 나설 차례도 없었다.
마리나와 정시우, 두 사람은 이미 레벨이 주는 강함과는 다른 영역의 클래스를 구축하고 있었으니까!
“후. 끝났냐?”
“도망친 놈 없어. 이걸로 완벽해.”
놈들이 전멸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7초. 면죄부의 효과는 확실했다. 그래도 한때 인간이었는데 과연 죽여도 되는 것인가, 같은 쓸데없이 감상적인 고민 따위는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목숨을 내건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나, 동료, 그 외에는 모두 죽여야 할 적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고선 살아남을 수 없다.
“사체는…… 녹아내리네.”
“……하지만 마석이 남았어.”
마리나가 바닥에서 금색의 마나 결정을 주워 들었다. 플레이어가 죽어도 마석이 남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지상에 나온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경험한 플레이어들에 의해 증명된 바 있다.
하지만 엠퍼러 길드원들은 죽어 마석을 남겼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놈들이 완벽히 몬스터화했다는 것이다.
한 가지 구원이 있다면 그들의 영혼이 정시우의 문신으로 빨려 들어왔다는 것. 어째선지 플레이어의 영혼을 수집하는 스킬의 특성상, 그들의 영혼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들이 몬스터로서 죽었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다.
“이 새끼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우연이네, 나도 같은 생각이야. 역시 우린 소울 메이트인가 봐.”
“지나친 가져다 붙이기는 자제해 주시죠.”
“아린, 질투하는구나!”
정시우는 투닥거리는 마리나와 수아린을 무시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데드 놈들의 집중공격을 당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황당하게도 언데드들은 그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우리가 이길 수 없다.]
[순간이나마 신에게 닿은 인간…… 그분의 마나를 이겨 낸 인간.]
[생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도 저자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면…….]
“후.”
이대로 있으면 알아서 저쪽이 퇴각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나약해 빠진 대사이지 않은가! 하지만 놔둘 수는 없었다. 세트나크의 힘이 사라졌다고 해서 죽음의 전염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리나, 그만 놀고 시작하자.”
“알겠어.”
“저도 갑니다!”
아직 무기 한 번 맞대지 않았는데도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놈들을 상대로 마나는 필요 없다. 정시우는 거대화한 두 해머를 마구 휘둘러 사방의 언데드를 깨부수었다. 마리나는 마나 소모를 최소로 낮춘 마탄으로 언데드를 쓸어버렸고, 용세하 역시 거침없이 랜스를 들고 돌격했다.
[캬아아아!]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휴식이…….]
“아, 대사 읊지 마! 읊지 말고 그냥 죽어!”
[아, 안식을 주어 고맙…….]
“읊지 말라고!”
한 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말라붙은 하류를 채우고 있던 언데드 무리의 일단이 쓸려 나갔다. 그러나 세트나크의 파편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던 언데드의 양이 너무나 많았기에 이대로는 언제까지고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구오오오오오!]
“얼씨구.”
더욱이 그랜드캐니언에 자연발생한 몬스터들이 언데드화하여 가세하니 몬스터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나는 느낌마저 들었다. 정시우는 갑각 몬스터가 죽고 남긴 갑각을 회수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곧 인벤토리 가득 차겠다.”
“저도 비슷합니다, 형님.”
“제 인벤토리가 아직 조금 남았으니 주세요, 오빠.”
서포터가 둘이니 인벤토리도 세 배! 그 세 명의 인벤토리가 모두 차기 직전이었으니 사태의 심각성을 과연 알 만했다. 참고로 마리나는 아까부터 볼을 팅팅 부풀리며 갑각 중 나은 것들만 골라 인벤토리에 던져 넣고 있었다.
“에단을 불러야겠어. 이대로 이것들을 버리고 갈 수는 없어!”
“축하해, 마리나. 네 뒤로 또 갑옷 몬스터 한 무더기 몰려온다.”
“아오오, 정말! 언제까지 이러고 싸워야…… 힉?”
마리나가 짜증을 내며 돌아서려던 그때, 허공에서 날아든 빛줄기가 마리나의 뒤를 덮치려던 언데드 무리를 일소했다. 어찌나 강력한지 빛줄기가 지나간 자리에 마나의 흔적이 남아 있어, 언데드들이 쉬이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것을 쏘아 낸 이의 정체는…… 그야 물론 모를 수가 없었다.
“세리아…….”
“이제 조금 괜찮아졌어. ……일단 여길 마무리하자.”
“……그래. 고마워.”
어느 정도 스스로의 감정을 정리하고, 뒤바뀐 스스로에게 적응한 세리아 윌슨이 드디어 전선에 합류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미국 서부의 패자 길드 엠퍼러의 마스터였던 그녀의 힘이 더해지니 확실히 몬스터 처리 속도가 빨라졌다.
“하!”
[끄아아아아악!]
[저, 저주스러운 힘이다……! 이건 너무 아파!]
[우, 우리의 적대자의 힘과 닮았다. 하지만 달라!]
더욱이 루이오스의 마나를 제 것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그녀의 마나 또한 변이를 일으켰는지, 그냥 마탄을 쏘아 내는 데도 빛 속성이 담겨 있어 언데드를 상대로 훨씬 효과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이 가능했다.
“오빠는 저런 변화 없어요?”
“그런 거 없는데?”
“참 한결 같아서 좋네요.”
세트나크의 마나를 순수하게 제 것으로 만든 정시우와는 달리, 그의 도움을 받는다는 한계 탓에 루이오스의 것과 어중간하게 섞인 마나를 갖게 된 세리아 윌슨. 성공도로 따지면 정시우가 100%고 세리아 윌슨이 82%쯤 되었는데 결과만 놓고 보면 그녀 쪽이 150% 정도의 출력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형님의 마나는 그대로가 좋습니다. 강하고, 올곧잖아요.”
“흥.”
아부라도 떨 생각이었다면 성공이다. 정시우는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소울 컬렉트 스킬이 소울 포스(Soul Force) 스킬로 진화합니다. 보유한 영혼을 불러내어 부릴 수 있습니다. 영혼은 일정량의 데미지를 받으면 소환해제 되며, 당분간은 불러낼 수 없습니다. 레벨이 오르면 보다 다양한 능력을 구사할 수 있게 됩니다. 보유한 영혼의 숫자 : 106]
“……이렇게 됐나.”
조금의 기다림 끝에 완성된 스킬의 능력은 이전과는 딴판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시우는 스킬의 진화 과정에서 세트나크의 힘이 영향을 주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세리아 윌슨처럼 본인이 바뀐 것이 아니라, 스킬 하나로 그 영향력을 모두 집중시킨 것이다.
과연, 마음에 드는 방식이다. 아마 스킬의 잠재력은 이 정도로 끝이 아니리라. 그가 스킬에 능숙해지면 능숙해질수록 이 스킬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소울 포스.”
그가 읊조리자 문신 바깥으로 영혼들이 차례차례 튀어나왔다. 영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영혼들 중에는 바로 방금 죽었던 엠퍼러 길드원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생전의 모든 것이 유지되지는 않는 듯, 모두가 살짝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과 마주하며 기분이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감정을 털어놓아도 지금의 저들이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정시우는 지금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해야 할 일은 알고 있겠지?”
[적을 물리치겠습니다.]
겉으로는 유령처럼 보여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정시우에게 종속된 존재. 스킬을 본격적으로 다루며 정시우 또한 깨달았다. 저들을 흡수한 시점에서, 그들은 정시우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그의 의사가 바로 반영되는 것도 당연했다.
“오빠, 이 사람들은…….”
“시우, 너!”
“소울 포스(Force)라고 했던가. 정말 절묘하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들었다. 완전히 변모한 소울 포스 스킬의 문신이 새겨진 손등이 미미한 빛을 발했다.
“돌진해! 내 적을 물리쳐라!”
[예!]
영혼들은 일제히 언데드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 뒤를 따라 정시우 또한 힘차게 내달렸다.
하늘의 영혼들을 거머쥔 지상의 별, 진격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