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
85화.
정시우는 이미 아까 대기 중의 마나에 섞인 세트나크의 마나를 흡수하여 놈의 흔적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맞힌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량에 불과할 뿐, 그가 이 막대한 신의 마나를 그대로 빨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한 이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아린이 너도 은근히 그런 거 좋아하는구나.”
“저, 저는 그냥 긴장감을 풀어 보려고!”
따지고 보면 정시우에게 옮은 것이다. 수아린은 벌써 제법 여유를 찾은 듯한 정시우의 말에 화들짝 놀라 아무렇게나 대꾸하며 스태프를 높이 들었다.
방어막 내부를 가득 채우던 세트나크의 마나가 정시우에게로 빠르게 흡수되며 그녀가 방어막을 유지하는 데 가해지는 부담은 줄어든 상태였다. 문제는 이제 그녀가 아니었다.
“오빠, 정말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마나는 마나야. 난 이 사실을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어.”
정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으나 수아린은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명백히 타인에게, 그것도 신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힘을 지닌 위인에게 길들여져 오랜 세월 묵었던 마나가, 지금 정시우에게로 들어와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고 그의 심장을 타고 흐르며 그의 마나로 변이되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언데드의 신 세트나크조차 그것을 이해하지 못해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설마 아까 느꼈던 용의 힘은!]
“그렇게 짤막하게 말하지 말고 제대로 설명이나 해 보든가.”
[…….]
꼭 대놓고 물어보면 입을 다문다니까. 어쩌면 저것은 적의 복장을 긁어내기 위해 단련한 정신 공격 스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에게는 애석하게도 정시우는 이미 대충 감을 잡았다. 그에게 난청 따위는 없으니까.
여자애가 고백해 올 때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분다고 해서 그녀의 말을 못 알아들을 리가 없는 것처럼, 비밀 얘기를 할 때 말을 흐린다고 해도 알아들은 단어 몇 개를 조합해 보면 진실은 얼마든지 파헤칠 수 있는 것이다.
놈은 분명 용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렇다면 정답은 간단하다. 정시우가 지하 플레이어가 되며 얻은 도마뱀의 꼬리, 방울로 인해 꾼 꿈에서 보았던 용, 그 꿈에서 깨어나 얻은 힘!
분명 정시우는 용, 혹은 드래곤과 같은 존재와 연관이 있는 것이리라. 그것이 정시우에게 마나에 대한 지배력을 부여하고, 다른 존재의 마나를 자유자재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지구에서 잡은 몬스터들의 마나로 레벨이 오르는 것 또한 그와 마찬가지 이유가 아닐까. 그 이상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이 3 올랐습니다.]
[소울 컬렉트 스킬이 변이를 일으킵니다. 변이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슬슬 몸이 삐걱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좀 처먹으라고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다. 한정 없이 빨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신의 마나를 직접 몸에 받아들여 전환하고 쌓는 일에 부담이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의 마나와 기록을 받아들여 레벨 업을 거듭하며 얻는 회복력으로도 미처 커버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에서의 ‘피로’였다.
아마 조만간 한계는 온다고, 그는 직감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속된 레벨 업으로 괴력 스킬의 후유증을 어떻게든 이겨 냈다는 정도일까.
“그래도 이 마나를 다른 데로 새어 나가게 할 수는 없지……!”
“오빠, 너무 무리하시면…….”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정시우가 인벤토리 안에서 꺼내어 든 것은 다름 아닌 듀라한 케이나의 정수, 즉 그녀의 머리통이었다.
“윽!?”
“역시 반응하네.”
수아린은 무심코 또 그거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그것이 노출된 순간 세트나크의 마나가 그것에 반응하는 것을 보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정시우는 바로 답을 찾아낸 것이다!
“케이나를 새로이 탄생시키는 데에 필요한 자원 중 보다 강한 신의 힘, 이라는 문구가 있었지. 아마 다른 신의 힘이 있어도 되었겠지만, 그것이 언데드의 신의 힘이라면 두말할 나위도 없을 거야.”
[불가능하다!]
“가능해!”
신의 힘에 노출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머리통밖에 남지 않은 케이나가 눈을 번쩍 뜨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양손으로 그것을 움켜쥔 채 본격적으로 세트나크의 마나를 인도하기 시작하자, 시체와 별다를 바 없었던 케이나의 뺨에 아주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뭣……!?]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모자라, 정시우는 일대의 마나를 듀라한의 정수에 성공적으로 밀어 넣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가공할 마나 컨트롤이 아닐 수 없었다.
“무서워요! 이러다 눈뜰까 봐 무서워요!”
“걱정 마, 이 정도로는 완성이 안 되니까!”
[듀라한의 정수…… 한낱 듀라한에게 내 힘을 담아내겠다니. 그것을…… 실제로 해내다니.]
이래저래 믿기지 않는 광경과 조우한 덕에, 무엇보다도 이 일대의 힘을 정시우에게 실시간으로 뺏기고 있는 탓에 세트나크의 목소리에선 힘이 많이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슬슬 수아린의 방어막에도 한계가 찾아오고 있다. 여태까지 버텨 준 것만도 기적이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실패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시우는 또다시 무리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세트나크에게 엿을 먹여 주겠다는 일념 아래!
“흐…… 으오오오오오오!”
케이나의 머리통에 신의 힘을 집중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것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마나를 자신의 육신에 받아들인다! 즉 멀티태스킹이었다.
“으득…… 으드드드득……!”
“어떻게 해요, 오빠!”
“쉬운…… 일이라니까!”
육신의 깊은 곳, 마나를 생산하고 다루는 심장이 삐걱거리며 고통에 찬 비명을 질러 대는 것이 느껴졌지만 정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이 정도 고통도 이겨 내지 못해서야 언젠가 직접 신과 조우했을 때 놈들의 힘을 어찌 버텨 내겠는가! 무지막지한 근성론이었으나 정시우의 육신은 과연 그의 육신다운 내구력으로 마나의 폭격을 버텨 냈다. 오히려 그 과정에서 단련되어 보다 강해지기까지 했다!
[용의 힘을 지닌 인간이여…… 내가 너를 기억하겠다.]
단순한 의지의 영역을 넘어선 그의 분투에 세트나크는 경악을 넘어 일종의 경외마저 느꼈다. 목소리에 버퍼링도 안 걸고 순순히 떡밥을 뿌린 것이 바로 그 증거! 그러나 정시우의 대꾸는 실로 간단하고 단순했다.
“지금 당장 기억 안 해도 돼. 어차피 앞으로 질리게 보게 될 거거든!”
[크…… 하하하하!]
신의 힘과 조우하여 고생하고 있으면서도 다음을 논하는 정시우의 태도에 세트나크는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말을 섞어 봤자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놈은 그것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되는 고통의 시간을 버텨 낸 것일까? 오직 자기 자신과 마나에만 집중하고 몰두하던 끝에, 정시우의 망막 위로 나란히 두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마력이 1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듀라한 케이나의 정수가 데스나이트 케이나의 핵으로 진화합니다.]
그와 동시에 마나의 유입이 끊겼다. 케이나의 머리통으로도, 그의 육신으로도 세트나크의 마나를 빨아들일 수 없었다. 흡입의 한계를 맞이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일대에 세트나크의 마나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냈다.”
정시우가 막연히 중얼거리며 두 팔을 늘어트렸다. 결국 그랜드캐니언에 나타난 세트나크의 파편, 그 안의 모든 마나를 자기 자신의 육신과 케이나의 정수에 쏟아붓는 데에 성공했다. 스스로도 참 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어 쓰게 웃고 말았다.
“정말 해 버렸어…….”
“아, 진짜 지쳤다. 괴력 스킬의 후유증 같은 건 정말 아무래도 좋을 만큼 다른 방향으로 지쳤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그 자리에 축 늘어져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럴 수만도 없다는 게 실로 짜증나는 일이다.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이 잔뜩 남아 있었으니까.
“후우.”
정시우는 자신의 스테이터스, 그리고 어딘가 기대감을 품게 하는 이름의 핵으로 진화한 머리통의 정보를 열람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꾹 참으며 케이나의 핵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힘의 소실에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언데드들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바이크에 탔다.
그리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리나, 그 여자 아직 버티고 있어?”
“버티고 있어! 놀랍게도!”
하늘의 상황은 여전했다. 마리나 비셋과 세리아 윌슨의 대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마리나가 최선을 다해 세리아 윌슨을 도발하면 금방이라도 루이오스의 힘에 잠식될 것 같던 그녀가 어떻게든 정신을 되찾고 그녀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퍼붓는 것이다.
그렇게 몇 분, 그들은 용케도 그 기묘한 대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실은 나도 모르겠어!”
“야!”
정시우의 대답에 마리나는 날갯짓도 멈추고 그대로 떨어져 내릴 뻔했다. 그랬다간 잔뜩 성이 난 언데드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고 말겠지. 그녀가 빤히 노려보자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 모르겠는데 어쩌라고. 그래도 가능성이 있으니 시험해 볼 수밖에 없지.”
“세트나크의 힘을 뺏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할 거야?”
“타인에게 이미 안착한 힘을 뺏는 재주는 누구에게도 없어.”
지금 세리아 윌슨은 굉장히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녀의 마나와 영혼, 육신 모두가 루이오스의 힘에 잠식되어 지금 당장이라도 몬스터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요는 그녀의 내부를 잠식한 힘이 그녀의 것이 아닌 루이오스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조금 전까지 세트나크의 마나를 계속 받아들여서인지 대충 마나를 변환하는 감이 잡히거든. 그러니까 신의 마나를, 인간의 마나로 바꾸는 것 말이야. 즉 세리아 윌슨을 잠식한 루이오스의 마나를 그녀의 것으로 바꾸면…….”
“난 이해를 포기했으니까 일단 어떻게든 해 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는 묻지 않고, 마리나는 그를 세리아 윌슨에게로 떠밀었다.
어쨌든 세리아 윌슨은 하늘성이 열린 시점부터 얼굴을 보아 온 악우 중의 한 명이다. 라이벌로 인정해 줄 생각은 없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는 꼴을 보는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가능하면 살아 주었으면 했다.
“좋아, 해 보자고.”
비단 마리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찝찝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정시우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손을 덥석 붙잡았다. 바로 공격이 날아와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체내의 기운에 반항하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잘 들어. 지금부터 네 마나를 분석하고, 루이오스의 마나를 어떻게든 네 것으로 바꿔 볼…… 아, 안 들리면 어쩔 수 없지.”
조금 난폭하게 가는 수밖에. 물론 정시우는 여태까지 타인의 마나에 간섭해 본 적 따윈 없지만 어째설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시우는 스스로의 직감을 대단히 신뢰했기 때문에 마나를 발하는 그의 움직임에도 망설임 따윈 없었다.
“시작해 보자고.”
그녀와 붙잡은 왼손의 손등, 그곳에 새겨진 소울 컬렉트의 문신이 찬란한 빛을 발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스킬이 변이되는 중이었기에 문신의 형태가 제법 흐릿해져 있었지만, 어쩌면 지금 그가 행하는 행동이 스킬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긍정적인 영향이면 좋겠는데 말이지!’
“큭, 크흑……!”
“버텨. 아직 탐색에 불과하니까.”
그녀와 접촉하고 고작 몇 초, 정시우는 세리아 윌슨의 마나를 분석해 완벽히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제아무리 개개인의 마나 특성이 다르다지만 결국 아주 조금의 차이. 일반인의 마나라면 그 정도였다. 문제는 신의 마나다.
“버텨……!”
“끄으아악!”
세트나크의 마나를 막무가내로 받아들여 자신의 마나로 전환하는 것은, 튼튼한 육신의 내구도와 마나를 생산하는 심장의 힘을 빌어 어떻게든 이루어 냈다. 하지만 세리아 윌슨을 인도하는 것은 그와는 또 차원이 다른 난이도였다.
‘그래도 해내는 수밖에.’
왜냐면 해내고 싶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날 따라와! 알겠어? 신의 마나를 너의 것으로 바꿀 거야!”
“끄으으어어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정시우는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마나를 주입하며 본격적으로 신의 마나를 꺾어 눌렀다. 루이오스의 힘은 세트나크의 그것보다도 거칠게 반항했으나, 숙주가 반항하고 있었기에 정시우에게 직접 위해를 끼칠 수가 없었다.
루이오스의 힘과 정시우 사이에 위치한 세리아 윌슨의 의지, 그녀의 저항이 완충재가 되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충격을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것이 실로 놀라웠다.
“제법 쓸 만한 근성이잖아!”
“당연…… 하지……!”
바로 그 순간. 이미 의식을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세리아 윌슨이 용케 그의 칭찬을 캐치해 내고는 미약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의지가 육신을 다시 되찾은 순간이었다!
그녀의 의지가 표면에 떠오른 순간 루이오스의 힘이 더욱 약해지고, 반대로 정시우의 마나는 강해졌다. 그녀의 마나가 적아를 파악하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정시우가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그의 마나가 물밀듯 그녀의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그녀의 마나와 힘을 합쳐 루이오스의 마나를 억압했다. 그녀의 내장 기관에 스스로의 의지를 부여해, 루이오스의 마나를 [변환]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타인의 육신을 통해 자신의 패시브 스킬을 발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이었으나, 그는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가 부족하다.
그것은 정시우가 아니라, 세리아 윌슨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거부해.”
정시우가 말했다.
“놈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해. 거부해 버려.”
“나는……!”
루이오스의 힘에 도취되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세리아 윌슨은 입술을 짓씹었다. 점점 더 그녀의 의지가 육신에 반영되고 있었다. 이미 변화된 부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전했다. 그렇기에 말할 수 있었다.
“루이오스…… 신 따위, 이제 필요 없어!”
[어리석은 필멸자여!]
“잘 했어!”
인간이 신을 거부한 바로 그 순간 신의 힘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녀의 의지와 육신이 정시우를 따라 움직였다. 그녀의 마나가 신의 마나를 뒤덮어, 변화시켰다.
[잊지…… 않…….]
“나야말로! 반드시…… 네놈을 죽여 버리겠어!”
루이오스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세리아 윌슨의 절규가 그것을 완벽히 묻어 버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그녀의 체내에 신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정시우는 그로써 신의 파편과의 전투에서 3전 3승을 거두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