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84화.
정시우는 아, 저질렀다, 고 생각했다.
[괴력 스킬이 Lv3이 되었습니다. 스킬의 지속시간이 늘어납니다.]
그래, 이 타이밍에 스킬 레벨이 올라 준 건 확실히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킬이 끝난 다음 다가올 파멸의 순간은 피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 안에 레벨을 올린다면 후유증을 버텨 낼 수 있을까? 없겠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의 양팔만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충격이 고스란히 바위에 전달되어 그것을 깨부수는 덕에 손아귀의 반동도 훨씬 덜해진 상황. 거대화한 두 해머가 번갈아 가며 바위를 두들길 때마다 조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굉음과 함께 바위 위로 커다란 금이 내달렸다. 부술 수 있다는 확신이 정시우를 지배했다.
“흐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어째서 거인의 비명까지 거대화한 것인지는 금세 깨달았다. 여태까지 감추어져 있던 옵션의 힘이 드러난 것이리라.
설마 거인의 비명의 옵션이 거랑의 앞발의 그것과 완전히 같을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로는 좋은 일이었다. 괴력을 구사한 정시우에게는 충분히 거대 해머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휘두를 힘이 있었으니까!
[어떻게, 나의 힘이 담긴 비석을……!]
“네가 나한테 따로 힘을 줄 필요는 없겠지. 어때, 인정하는 부분이냐?”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제 곧 놈의 목소리는 이곳에 닿지 않게 될 테니까. 괴력 스킬의 유지 시간이 끝난 후 닥쳐올 격통을 알고 있기에 정시우는 더더욱 빠르게 해머로 바위를 내려쳤다. 급기야는 바위가 조금씩 갈라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너의 힘은 놀랍구나. 하지만 과연 부순다고 해서 모든 일이 끝이 나리라고 믿느냐?]
“안 믿어. 그냥 부수고 싶어서 부수는 거야.”
[비석은 그저 내 힘을 담고 있는 함에 불과하다. 네가 이것을 부수면 나의 힘은 풀려나 퍼지게 될 것이다!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나의 종을 강화하고, 저기서 몸부림치는 어리석은 루이오스의 종을 자극하겠지! 나와 루이오스는 결코 양립할 수 없으니, 그는 저 종들의 자아를 모두 파괴해서라도 내게 대적하며 나의 힘을 수거하려 들 것이다!]
가뜩이나 심란한 상황에 엠퍼러 길드 얘기까지 꺼내는 세트나크. 정시우는 정신없이 해머를 내리치는 와중에도 힐끗 고개를 들어 상황을 살폈다.
수아린의 방어막은 앞으로 1분도 더 버티지 못할 만큼 위태한 상황이었으며 공중에서는 엠퍼러 길드 정예 중 가장 의지력이 약한 두 놈의 변이가 진행되고 있었다. 전신이 새하얗게 물들고, 날개가 부러지며 얼굴 위로 광채를 발하는 갑각이 솟아나는 모습이 영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 이이이이익. 루이오스! 우리를 속였단 말인가!”
“마스터!”
길드 마스터 세리아 윌슨을 비롯해 몇몇 인물들은 그것을 용케 버티고 있는 듯하지만 곧 한계가 찾아오리라. 정시우가 상상했던 그대로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으니 그는 어딘가 덧없는 감상마저 느껴야 했다.
‘앞으론 조금 범법적인 일이라 해도 저렇게 될 만한 일을 미연에 방지해야 할까. 다른 이들에게 이것을 대대적으로 알려야 할까?’
그런 나약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가는 곧 사라졌다. 정시우가 말하기도 뭣하지만 인간은 어리석다. 정답이 눈앞에 제시되어 있어도 그것을 본인이 겪기 전에는 결코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아악!”
“저들에 대한 적의가…… 죽음, 언데드를……!”
하지만, 인간이 몬스터로 변하는 저 꼴을 다시 눈앞에서 보게 되니 기분이 더욱더러워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마 그는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여 이것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해도 막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지금 저 광경은 도저히 두 눈을 뜨고 봐주기가 싫었다.
그렇다. 단지 그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이 따위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보고 있으니 기분이 더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세트나크의 목소리가 더욱더 짜증이 났다.
[너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거야. 놀라운 힘의 아이야.]
“닥쳐!”
그는 있는 힘껏 해머를 내질렀다. 어쩌면 두 개를 동시에.
굉음이 일었다.
[카하아아아아아악!]
바위가 부서져 내렸다. 무수한 세월 속에 마모되지 않고 보존되어, 시공의 틈을 뚫고 지구에 강림한 신의 흔적이 한낱 인간의 망치질에 부서진 것이다. 자연히 그와 연결되어 있던 세트나크에게도 충격이 전달되었다.
물론 그의 본체에는 아주 미약한 상처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통은 고통. 세트나크는 괴로움과 그것을 상회하는 즐거움에 울부짖듯이 웃었다.
[카학, 크…… 크흐흐! 아주 재미나구나! 지닌 힘에 비해 마음의 크기는 실로 조그마하지 않은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 생떼를 쓰며 눈앞의 장애물에만 집착하다니 그것은 갓난아기와 대체 무어가 다르더냐!]
“직접 나타나지도 못하는 주제에 혓바닥만 길어 가지고……!”
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봉인의 역할을 다한 비석은 뒤늦게 찾아온 세월을 따라 순식간에 풍화해 버렸으나, 그 안에 담겨 있던 신의 힘은 순식간에 퍼져 나왔다. 다행히도 수아린이 펼친 방어막 바깥으로 빠져나가진 않았으나…….
[크샤아아아아!]
[세트나크의 은총! 세트나크의 힘!]
[세트나크 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일부를 나누어 주신다……!]
“으그그그그극…… 오빠!”
방어막에 달라붙어 있던 언데드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방어막의 안과 밖에서 가해지는 압력이 순식간에 커지며 술자인 수아린을 압박했다. 이대로는 불과 수십 초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젠장……!”
저 너머 하늘에서도 마찬가지. 대기 중으로 직접 노출된 신의 힘에 광분한 엠퍼러 길드원 몇몇이 기어이 완벽히 몬스터로 모습을 바꾸더니, 마리나를 무시하고 다짜고짜 대지로 돌진했다. 그리고 언데드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스터, 우린 이놈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루이오스 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루이오스 님께서 그렇게 명하고 계신단 말입니다!”
“너, 너희들…… 루이오스는 우리의 주인이 아냐, 정신 차려!”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 마스터입니다!”
놀랍게도 놈들은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겉모습이 변한 것 외에는 별문제가 없지 않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 빛을 발하는 몬스터로 변이한 그들은 이미 이전의 그들이 아니었다. 모든 사고가 루이오스를 중심으로 개편되어 오직 그만을 따르는 충실한 종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저것은 그저 명을 받은 대로 움직이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저 남자의 말이 맞았어…… 제길, 젠장……!”
세리아 윌슨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도 자신의 길드원들이 당한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미 신체의 변이는 조금씩이나마 시작되었고, 전투를 대비해 언제나 또렷하게 유지해 왔던 의식에는 김이 서리고 있었다.
[놈의 힘을 없애라. 놈의 힘이 지구에 퍼지는 것을 막아라. 나의 종이여, 계약을 수행할 시간이 왔다. 너는 내 것이며, 네가 곧 나의 대리자가 될 것이다. 너는 이미 나의 힘을 받아들였다. 너는 이제 행동해야 한다.]
그녀의 판단과 생각, 욕망을 억누르고 타인의, 신의 의지를 강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자신을 유지하는 축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도적인 공포감을 그녀에게 안겨 주었다.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을 때 떠나라는 정시우의 말에는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마리나의 파트너라는 이유만으로 배알이 꼴려 그의 말을 모두 무시했던 것이 후회되었지만 이미 모두 늦었다. 그녀는 이대로…….
“그게 무슨 한심한 꼴이야, 세리아 윌슨!”
돌연 들려온 새된 목소리에 순간이나마 그녀의 의식이 각성했다. 흐릿한 시야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그곳에는 눈부신 깃털 날개를 펄럭이는 그녀의 숙적, 마리나 비셋이 있었다.
언제라도 그녀의 숨통을 끊을 수 있도록 권총을 들어 그녀의 목을 조준한 채, 마리나는 실로 용감하고도 당당하게 지껄였다. 언제나 그래 왔듯, 오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깔아 보며.
“결국 다른 놈의 힘이잖아. 그런 거 받아먹었다간 배탈 나는 법이라고! 그딴 거 빨리 쳐 내 버리고 덤벼. 아무리 나보다 못났다지만 다른 놈한테 휘둘릴 만큼 네가 멍청한 여자는 아니잖아!”
“이이이이이익!”
마리나의 말에 반박해 주고 싶다. 저 잘난 척하는 쓸데없이 고운 면상에 바람구멍을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감각을 가다듬어도 그녀의 적의는 인간 마리나가 아닌, 루이오스와 반대되는 마나를 지닌 저 언데드들에게로 향했다.
그녀에 대한 적의를 키우면 키울수록, 그와 반대로 언데드를 박살 내고 싶어 몸이 움찔거렸다. 그녀가 그대로 행하는 순간 그녀의 모든 의지는 소실되고, 그녀의 길드원들이 그랬듯 몬스터로 전락해 버리리라.
“하, 할 수가 없어…….”
“윽.”
끝내 세리아 윌슨은 눈물을 보였다. 오기와 악의로 똘똘 뭉쳐 자신을 적대해 왔던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보는 눈물에 마리나마저 순간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를 조준한 총구는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것은 언제까지고 마탄을 토해 내지 못했다.
“내 뜻대로, 네년을 때리고 싶은데…… 그럴, 수가……!”
“자, 잘 하고 있잖아. 그대로 더 버텨 보지 그래? 그사이 시우가 일을 정리해 줄 테니까!”
“으, 그윽…… 넌, 그렇게 항상……!”
마탄 스킬을 익힌 모든 플레이어의 우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마탄의 사수라는 클래스를 획득한 여자. 마리나 비셋의 그림자는 언제나 그녀를 가렸다.
그녀가 마리나보다 앞서는 점은 길드를 구축하였다는 것뿐. 그것으로 위안 삼았고, 언제고 그녀를 제쳐 주겠다며 벼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어란 말인가. 마리나는 홀로 협곡을 박살 내는 무지막지한 파트너를 데려왔고, 그녀의 길드는 강해지겠다는 욕구만으로 덥석 받아들인 신의 힘과 함께 침몰하는 신세가 되었다.
너무 한심하고 바보 같았다. 이게 소설이라면 등장인물 안내 페이지에도 실리지 못할 조연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것이 너무 분해 견딜 수가 없다. 공포보다도, 적의보다도 분함이 컸다.
“버텨…… 주겠어……!”
그 감정이 신의 힘으로부터 그녀를 지켜 냈다.
[나의 종이여……!]
“닥쳐……!”
그녀가 아무리 버틴다고 해도 상황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신의 힘을 품고 있는 한 지금 이 현상은 평행선을 달리듯이 이어질 것이고, 언제고 그녀는 무너져 루이오스에게 잠식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저년 앞에서…… 무너질 수는…… 없어!”
그것은 자존심이었다. 신의 힘에 저항하는 인간의 자존심.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던 마지막 한 명의 엠퍼러 길드원조차 끝내 몬스터가 되어 그녀 곁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세리아 윌슨은 날개를 펄럭이며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무의미해 보이는 잠시의 시간, 그녀와 완전히 똑같은 감정으로 움직이는 인간이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흐오오오오오오오오!”
그것은 물론 정시우였다.
“오, 오빠!?”
수아린이 당황하여 외쳤다. 정시우가 기합을 주며 소리를 질러 대자 당장 안에서 방어막을 두드리는 신의 힘이 줄어들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이 2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력이 5 올랐습니다.]
“오빠, 지금 대체……! 신의 힘은 거부한다면서요!”
“이건 신의 힘이 아니거든……!”
정시우가 외쳤다. 마리나에게 배운 대로 필사적으로 호흡하여, 일대의 모든 마나를, 그 대부분을 잠식한 세트나크의 힘을 흡수하여.
자신의 마나로 만들면서, 외쳤다.
“이건…… 이제 내 힘이야!”
[뭣……!?]
신의 힘을, 한낱 인간이 강탈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