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
83화.
세트나크의 파편은 실로 거대했다. 저것이 하늘성 던전에 어떻게 감추어져 있었는지, 지금 그 하늘성 던전은 어떻게 된 것인지 절로 궁금하게 하는 사이즈의 검은 바위 파편. 그것이 뿜어내는 막대한 양의 검은 기운이 일대의 언데드를 모두 강화하고 있었다.
[용감하구나, 인간.]
그리고 그것을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것은 창백한 얼굴의 기사였다. 반투명한 몸체를 보고 놈의 정체가 고스트라는 사실을 금세 파악했다. 그러나 돌진을 멈추지는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유성처럼, 정시우는 바이크와 한 몸이 되어 지상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죽음을 향해 올곧게 돌진하는 그대의 모습은 적임에도 실로 찬란하다. 우리의 동료가 될 자격이 있다.]
“마리나, 떨어져.”
사격이 장기인 그녀는 적진에 돌격하는 것보다 날개를 활용해 날아다니며 사격을 하는 쪽이 훨씬 나을 것이다. 정시우는 바이크의 속도를 더욱 높이며 마리나를 밀어냈고, 마리나 역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날개를 펼쳤다.
“알겠어.”
“용세하, 투구 쓰고 나가. 마리나를 지켜.”
“알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단 더 차근차근 놈들을 공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뒤에서 날아오는 엠퍼러 놈들을 생각하면 도무지 느긋이 있을 수가 없었다. 저 녀석들이 신의 힘에 의해 변하는 것은 둘째 치고, 놈들에게 세트나크의 파편을 넘길 수도 없으니까.
“오빠, 무기에 축복을 걸게요.”
“부탁해.”
“후우…… 모든 그릇된 것을 무로 되돌리는 힘이여. 디바인 인챈트!”
수아린의 영창이 이루어지자 거랑의 앞발이 새하얗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물론 쓸데없이 무기를 거대화하지는 않았다. 커다란 건물이나 거대한 몬스터라면 몰라도 체구가 그와 별로 차이 나지도 않는 놈을 상대하기 위해 무기의 몸집을 부풀릴 필요는 없었다.
[그 가상한 용기에 경의를 표하며…….]
그를 맞이하며 고스트 나이트가 희미하게 반대편이 비쳐 보이는 유령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타오르는 창백한 검은 불꽃은 확실한 힘을 품고 있었다.
[죽어라!]
“흡.”
정시우는 차분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비록 첫 발동은 우연에 불과했지만 지금 바이크를 통해 펼치는 크루얼 차지는 확실히 발동되어 그의 전신 기력을 북돋고 있었으며, 부여 스킬로 인한 육체 강화도, 그것을 전부 옮겨 담아 펼쳐 낼 강타 또한 확실히 준비되었다.
“후우…….”
[크오오옷!]
지금 그의 전투력이 만전이냐고 묻는다면 물론 그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파괴자로 전직하며 얻은 괴력 스킬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놈 한 마리 없앤다고 전투가 끝나는 것이 아닌 이상, 지금은 섣불리 괴력을 구사하고 지쳐 나가떨어지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저놈은…….
“굳이 괴력까지 필요 없어!”
[크하아아아아압!]
고스트 나이트가 대검을 치켜드는 것과 동시에, 그들이 모시는 신 세트나크의 파편을 노리는 간덩이 부은 인간을 징벌하기 위해 다른 무수한 언데드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들 모두를 한눈에 담으며 거세게 일갈했다.
“꿇어라!”
[컥!?]
그로부터 퍼져 나온 파장이 일대를, 적어도 그의 시야 안에 들어오는 모든 언데드를 휘어잡았다. 마력으로 화한 목소리는 끔찍한 압력이 되어 놈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분명 눈앞에 있는 적이 인간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 안에 내재된 흉포한 무엇인가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죽어 있음에도 본능적으로 숨을 들이쉬는 언데드들. 놀랍게도 놈들은 정시우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드, 드래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말도 안 돼!]
“뭔진 모르겠지만 나이스!”
정지한 표적의 약점에 총알을 꽂아 넣는 것은 그녀에게는 식은 스프 먹기보다도 쉬운 일이다. 순식간에 자신이 해야 할 움직임을 모두 계산해낸 마리나의 쌍권총이 불을 뿜었다.
[칵!?]
[크아아아악!]
그녀 역시 지금 상황이 단기결전을 요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정시우가 고스트 나이트와 그가 지키는 세트나크의 파편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녀는 연사로 그 외의 나머지 모두를 부수었다!
‘역시 우린 완벽한 파트너야.’
마리나의 아름답기까지 한 쌍권총 사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세트나크의 파편 주위에는 고스트 나이트 한 마리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인간, 네놈을 죽이고 다시 탄생시켜 주마. 그 힘, 우리의 신을 위해 쓰게 될 것이다!]
“후우……!”
그러나 놈은 그 사실도 깨닫지 못할 만큼 정시우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용의 위엄의 힘이 실린 워 크라이에도 유령 대검에 실린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단지 놈의 움직임과 기세가 아주 조금 위축되었을 뿐이었다.
“흡!”
[칵!?]
정시우의 일격이 놈의 머리통에 틀어박힌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신성력을 머금은 해머의 첨단이 영체에 집결되어 있던 사기를 깨끗하게 소멸시키고, 놈의 몸통을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네, 놈은……!?]
“미안, 아까부터 한 마디 해 주고 싶었다만.”
정시우는 재차 스로틀을 당겨, 해머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그 자리에 무너져 내리는 고스트 나이트를 날카롭게 날이 갈린 바이크의 프론트 펜더로 들이받으며 말했다.
“너 약한 주제에 입만 살았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바이크와의 충돌 순간 유령의 몸통이 유지력을 잃고 완벽하게 박살 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마나를 느끼며 놈이 완벽히 소멸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보스전치고는 터무니없이 싱거운 한 판이었으나, 이는 그만큼 정시우가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전투이기도 했다.
“후.”
정시우는 놈이 소멸되며 남긴 마석과 유령 대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는 바이크에서 뛰어내렸다. 눈앞에 세트나크의 파편이 있었다.
언데드를, 그리고 인간까지도 유혹하는 사악하고도 매혹적인 기운을 흩뿌리는 그것. 근처에 도달하니 과연 그에게도 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일종의 사념이었다.
[편안한 죽음으로 오라. 고통 받지 않는,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
“내가 여기서 뺑이치고 있는 언데드들을 보고 있는데 잘도 이런 구라를.”
[나의 종이여…….]
그 누구든 신의 파편에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 놓고 정시우처럼 태연한 말을 내뱉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품에 있는 수아린도 정신오염을 막기 위해 신성력을 끌어 올리고 있는 상황에! 어쩌면 이미 한 번 신의 파편과 전투를 벌였기 때문인가?
“끄응, 한세월이겠는데 이거.”
그는 심드렁하니 신의 파편을 두들겨 보며 보통 충격량으로는 부술 수 없겠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욱이 보스급 몬스터의 빠른 소멸 탓에 멘탈이 붕괴되었던 언데드 몬스터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정시우 주위로 빠르게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리나, 이거 부수는 동안 다른 놈들 좀…… 아.”
“이이이익!”
마리나에게 도움을 구하려던 정시우는 위를 올려다보다 말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믿기지 않게 빠른 속도로 그들의 뒤를 쫓아온 엠퍼러 길드가, 놀랍게도 마리나에게 직접 공격을 가하는 모습이 보였다. 물론 늦지 않게 그녀 앞을 막아선 용세하 덕에 마리나는 멀쩡했지만 말이다.
이때 정상인이라면 어째서 용세하라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를 캐물었을 것이나 안타깝게도 엠퍼러 길드에는 지금 정상인이 없었다.
“너희 무슨 짓이야! 설마 직접 공격을 가해 오다니…… 정말 나랑 한 번 해보자는 거야!? 신의 힘을 조금 나누어 받았다고 이 마리나 비셋이 우습게 보이나 보지!”
“큭…… 너, 너희. 그만둬! 우리는 저 세트나크의…… 큭!?”
이건 뭘까. 데자뷰? 정시우는 길드 마스터의 말을 듣지 않고 폭주하는 엠퍼러 길드원들을 보며 아련한 눈빛이 되고 말았다. 바로 그 길드 마스터의 눈빛도 살짝 탁하게 물든 것이 장난 아니게 위험해 보였다.
“세트나크를 죽여야 해!”
“세트나크……!”
“난 세트나크가 아니야, 이 머저리들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뚜렷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보여 그래도 가만히 놔뒀었는데, 세트나크의 권역으로 들어온 순간부로 놈들의 낯짝이 여름철 식탁에 올려놓은 김밥처럼 빠르게 맛이 가고 있었다. 아까 면죄부 발행했던가? 분명히 발행했지? 그러니까 괜찮겠지?
“마리나, 적당히 상대해 줘. 혹시 몬스터로 변하거나 하면 가차 없이 쏴 죽여. 기왕이면 다른 데로 유인해서.”
“가차 없는 건 너 같은데!?”
“나는 그동안…….”
저들이 갑자기 저렇게 맛이 간 것은 루이오스와 세트나크의 대립 탓이겠지. 그러니 세트나크의 흔적을 이 자리에서 지워 버리면 일이 해결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사태가 호전되지 않는다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좋아, 완벽하다.
“이 거대한 바위를 부숴 주지.”
[미천한 인간 놈이이이이이이이!]
[세에에에에트나아아아아아아크의 이름으로!]
“쟤넨 왜 신 이름 부를 때만 저렇게 말을 늘이는 거야.”
하지만 놈들의 말버릇이 우스운 것과는 별개로 수만이 넘어가는 숫자의 언데드가 동시에 덤벼드는 것은 제법 무서운 광경이다. 놈들을 상대하며 동시에 이 단단한 파편을 부수는 것은 단언컨대 무리였다.
“아린아, 넌 혹시 방어막 같은 거…….”
“돼요, 오빠.”
수아린이 그의 품에서 뛰쳐나와 강림 스킬을 발현, 원래의 모습으로 현현했다. 순수한 백색의 사제복으로 전신을 감싼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리타이어하기 전까지 그녀가 애용하던 스태프. 정시우의 성장이 워낙 빠른 덕에 그녀가 지닌 장비들의 성능도 모두 복원된 상태였다.
[새, 생명의 힘……!]
[저런 강대한 힘을 지닌 사제가 어디서!?]
“오래는 못 버텨요. 특히 저 파편 때문에.”
그들을 중심으로 반구형의 반투명한 막이 퍼져 갔다. 당연히 그 안에는 세트나크의 파편도 존재했고, 그 탓에 방어막의 형태는 매우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로 달려오던 언데드들 모두가 신성 방어막을 뚫지 못해 튕겨 났다.
“나이스! 멋져!”
“그래요, 제가 이 정도라구요!”
과연 사제! 제대로 된 활약을 하는 건 이게 처음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녀가 있어 살았다!
아무리 레벨이 그리 높지 않다지만 그래도 무려 수만에 달하는 언데드의 돌진을 동시에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그녀의 능력은 명백하게 리타이어 이전을 뛰어넘고 있었지만, 한시가 바쁜 전장에서 능력을 새삼스레 체크하고 있을 시간은 그녀에게도 정시우에게도 없었다.
“파편을 많이 부수면 방어막이 더 오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걸 알면 서둘러 주세욧!”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엠퍼러 길드는 마리나와 용세하에게 완전히 맡겨 버리고, 수만의 언데드는 수아린에게 떠넘기고, 그 자신은 무책임하게 양손에 하나씩 해머를 움켜쥐고 막무가내로 세트나크의 파편, 검은 바위 덩어리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어리석구나. 한낱 미천한 존재가 지금 나를 거부하느냐?]
“흐아아아아아아아아!”
[나의 능력에, 기운에 익숙해질 시간을 주마. 라이아 같은 하급 신과는 격이 다른 나의 힘을 충분히 느껴 보거라.]
그러나 바위는 단단했다. 정말 빌어먹게 단단했다. 거랑의 앞발과 거인의 비명을 단단히 움켜쥔 정시우가 드럼을 두들기듯 거침없이 번갈아 바위를 두들겼지만 부스러기만 떨어져 나올 뿐 바위에는 실금조차 가지 않았다. 반발력 때문에 망치를 쥔 정시우의 손아귀만 아파 왔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부수질 못한다고……?”
[이제는 좀 알겠느냐?]
얼마나 바위를 두들겼을까, 분명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일의 성과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자신이 신의 힘에 조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못했음을 깨달은 정시우가 황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뇌신의 흔적과 싸울 땐 이렇지 않았는데, 자신도 어느 정도는 견적을 뽑고 이곳에 찾아온 것인데 어째서?
“시우우우우우우우! 얘네 점점 더 이상해지는데!”
“큭, 형님!”
“오빠, 방어막! 금!”
[크아아아아아아!]
그쯤에서부터 정시우는 슬슬 짜증이 났다.
“하아…….”
[힘을, 원하는가?]
자기 힘 하나 주체를 못해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로 변하고 있는 엠퍼러 길드 애송이들도, 맹목적으로 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방어막에 덤벼드는 언데드 놈들도, 그의 일행이 그들과 맞서며 상처를 입는 것도 짜증이 났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짜증 나는 건 영웅을 타락시킬 때의 전형적인 대사를 지껄이는 저 세트나크 놈이었다.
“힘은 언제나 내가 원해 왔던 거야.”
그것이 정시우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과연, 네가 지닌 순수한 힘만큼이나 순수한 갈망이다. 그 또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힘은 다른 누가 주는 게 아니야.”
이미 부여 스킬을 사용하여 육신을 강화하고 있던 정시우다. 그런 그의 팔 근육이 갑자기 두 배 이상으로 부풀어 올랐다. 손아귀가 빠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두 해머를 거칠게 붙잡았다. 다음 순간, 거랑의 앞발과 거인의 비명이 동시에 그 크기를 불렸다.
[뭐……?]
“언제나 나 스스로 쟁취해 왔거든!”
그의 양팔이 동시에 아래를 향해 내리쳐졌다. 팔이 그리는 궤적을 따라 두 거대한 해머가 쇄도하여, 궤적의 끝에 있는 거대한 검은 바위를 두들겼다.
[무, 슨……!?]
쩌적, 소리가 났다. 자신의 파편을 통해 지구의 상황을 살피던 세트나크는 그대로 말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신의 파편에 금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