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79화.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주는 인접해 있다. 실리콘밸리가 캘리포니아의 서쪽에 위치한 반면 애리조나는 캘리포니아 주의 동쪽에 있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를 합치면 남한 면적의 7배 정도가 되지.”
“아, 글쎄 땅덩어리 커서 좋겠다고.”
“계속 날아가는 것도 힘드니 도착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릴 줄 알았는데…….”
마리나는 한 손으로 바이크 안장을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얘 덕에 이동에 소모될 시간이 많이 줄어들겠어.”
“우리 니르가 좀 빠르긴 하지.”
“그새 애칭까지 붙었어…….”
“슬레이프니르의 준말이야.”
“해설해 줄 필요 없어욧.”
첨예하게 날아드는 태클로 판단컨대 수아린의 자숙 기간은 몇 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히죽 웃으며 바이크의 속도를 올렸다. 비행기보다도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를 지닌 팬텀바이크가 바람을 찢어발기며 허공을 내달렸다.
“이 바이크, 어떻게 만들었는지 안 알려 줄 거지?”
“게이트도 만들어 내면서, 이 정돈 B&Y에서도 만들 수 있잖아.”
“응, 일단 그 대답으로 이 바이크를 네 힘으로 만들어 낸 게 아니라는 것만은 깨달았어.”
마리나는 한 손으로 정시우의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으며(단순히 편하게 고쳐 앉는 동작일 뿐이었으나 그것을 보는 수아린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그에게 말했다.
“이세계의 마법을 지구에서 발동하는 것과, 이세계의 마도공학을 지구의 기술과 합성하는 건 완전히 다른 개념이란 말이야. 혹시 무슨 신의 힘이야? 뇌신과 적대하면서 다른 신의 힘을 얻었다든가.”
“그럴 리가. 그냥 외부에서 몬스터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바이크가 이렇게 됐어.”
“원리를 밝혀내는 건 힘들겠지……? 소형화기에 적용할 수만 있으면 어지간한 몬스터는 경찰과 군부대 선에서 처리할 수 있게 될 텐데.”
휴식처 부엌에만 가면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을 고스란히 마리나에게 알려 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체계적으로 성립된 기술이 아닌, 한정된 자원을 대상으로 한정된 장소에서만 가능한 마법과도 다를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음.”
게이트를 재현해 내는 B&Y조차 감도 잡지 못하는 휴식처의 특수능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정시우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마나의 집합체가 그를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기운인데, 이거.”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밟아 봐.”
이젠 마리나에게 방향을 지시받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발 아래로 보이는 협곡과 고원에서 느껴지는 사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바이크를 몰았다. 이쯤 되면 기운이 그를 이끄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건 느껴 본 적이 있는 기운이네. 빌어먹게도.”
“그래, 플레이어들이 가장 기피하는 몬스터들을 지배하는 신…….”
[키이이이이이이이!]
바로 그 순간,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던 허공에 돌연 거대한 괴물이 나타났다. 뼈밖에 남지 않은 날개,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는 동체, 위협적으로 쳐든 해골의 텅 빈 동공 안에서 타오르는 푸른 귀화…… 바로 언데드였다.
[키하아아아아아!]
“언데드의 신 세트나크의 흔적이지.”
마리나는 갑자기 나타난 적을 보면서도 침착하게 말하며 한 손을 들었다. 인벤토리에서 튀어나온 권총이 자연스레 그 손에 쥐였다.
이미 장전이 끝난 권총의 방아쇠를 그녀가 당기는 순간 튀어나온 마탄이 그 즉시 언데드의 미간을 꿰뚫었다.
놈은 그 순간 즉사, 떨어지다가 마리나의 인벤토리에 절로 빨려 들어갔다. 너무나 능숙한 스왑 테크닉은 그렇다 치고 방금 그녀가 구사한 마탄은…….
“크리티컬 불릿이구나.”
“정확히는 거기에 다른 전투 스킬들의 힘까지 더해 하나로 만들어 낸 고유스킬이지만.”
과연 이전보다 성장한 것은 정시우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 많은 마나를 소모하지 않고도 빠르고 강력하게 몬스터를 끝장내 버린 그녀의 마탄은 정시우에게 있어 지극히 인상적이었다.
설마 그가 가르쳐 준 것을 따라하는 데에 지나지 않고 다른 전투 스킬들의 힘까지 섞어 낼 줄이야! 해 보지 않고선 모르겠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자명했다. 정시우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말도 안 된다며 엄살 부리던 사람 어디로 갔냐.”
“내가 그만큼 천재라는 거지.”
“아오, 재수 없어.”
수아린은 사돈 남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아니었으면 떠올리지도 못했을 발상이니, 일단은 내가 이뤄 낸 성과를 보고하는 거야.”
“그래, 이만 하산해라.”
“이젠 네가 내 스킬을 따라잡아야지! 너라면 분명히 더 나은 방법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과연. 정시우는 그녀가 어째서 자신에게 살갑게 대하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의 스킬에 영향을 받아 더 좋은 스킬을 만들어 냈으니, 앞으로도 그에게 자극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닐까?
“글쎄, 나중에 시간 남으면. 난 원래 그쪽은 주력이 아닌지라.”
“패배 선언이야?”
“그래그래.”
“그 태도 살짝 열 받는데…….”
정시우는 바이크를 천천히 하강시켰다. 그러는 중에도 아까 그 언데드와 비슷한 비행 언데드 여럿이 날아들었으나 놈들 모두가 마리나의 마탄 하나씩을 이마에 박고 허무하게 쓰러졌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걸쳐 있는 거야?”
“그것까지 확인 못했지만,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놈들의 영역은 넓어지고 있지 않을까? 나도 모두 해치우려는 생각 따윈 하지도 않아. 핵심만 어떻게 하자구, 핵심만.”
그녀는 이전 설악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야 정시우도 거기에 찬성이었지만…….
“그 핵심이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는?”
“그것까진 나도 모르지.”
“그거 참 믿음직하네.”
그는 투덜거리며 다시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평탄한 지형이 아니기도 하고, 몬스터를 패 죽이는 데에 집중할 필요도 없는 만큼 후딱 탐색을 개시할 작정이었다.
[기아아아아아!]
[크그, 그그그그! 세에트나아크으으으으으!]
“아, 시작됐다.”
간절하게 세트나크의 이름을 부르짖고 있는 언데드 무리를 보고 있자니 과거 그와 듀라한이 쌓은 추억의 나날들이 떠올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크흑, 케이나…….”
“뭐, 뭐야. 연인을 언데드에 잃기라도 한 거야?”
“굳이 말하면 언데드를 잃었지…….”
“연인은?”
“그런 거 없다.”
마리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으나 두 손만은 부지런히 놀려 그들에게 날아오는, 혹은 달려오는 언데드들을 박살 냈다. 정시우는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고 나머지 한 손에는 망치를 쥔 채 그녀가 미처 막지 못하는 언데드를 마무리 짓는 역할.
다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다면 바이크가 쌩쌩 달리고 있음에도 마리나가 워낙 정확하고 빠른 사격으로 언데드들을 쓸어버려 정시우의 턴이 오질 않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아직까지 나타나는 놈들의 레벨이 낮은 편이라 경험치를 놓쳐도 별로 아쉽지는 않았지만, 망치를 쥐고 있는 손이 조금 뻘쭘하기는 했다. 표정이 미묘한 것은 마리나도 마찬가지였다.
“하필이면 언데드라서 사체에서 건질 것도 별로 없고. 엘리트나 잔뜩 나타나 주면 좋겠네.”
“보스급 정도 되면 뭔가 지니고 있겠지.”
“그때 그 방울처럼 말이야.”
마리나는 여전히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했지만 그녀는 앞으로 얼굴을 쑥 내밀면서 그에게 캐물었다.
“그 방울 결국 뭐였어, 시우?”
“깨져 버렸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는 기억이 안 나네.”
“능청 떠는 거 봐. 으으으, 이번에 그런 아티팩트 나오면 내 거. 나한테 양보해 줄 거지, 시우?”
아무래도 마석과 사체 때문에 방울을 정시우에게 양보했던 것이 어지간히도 한이 맺혀 있는 모양이었다.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짓곤 좋은 향기가 나는 머리카락으로 그의 뺨을 간지럽히며 애교를 부리는 마리나에게, 정시우는 지극히 상쾌한 표정으로 답했다.
“안 뺏기려면 나도 열심히 해야겠네.”
“큭, 안 넘어오네.”
“저기 저 언데드는 넘어올지도 몰라.”
“으득.”
방아쇠가 당겨졌다. 정시우가 가리켰던 언데드가 폭사했다. 정시우가 괜히 자신이 총에 맞은 것처럼 움찔하는 가운데, 마리나는 이 남자가 혹시 게이가 아닐까, 하고 굉장히 실례되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녀는 봄에서 겨울로, 계절이 단숨에 바뀐 표정으로 선언했다.
“이렇게 되면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압도해 주지.”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으면 좋을걸.”
“오빠는 정말 바보예요.”
그랜드캐니언을 비롯한 애리조나 북부 일대에서 언데드 몬스터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피해는 다행히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 직전에 격변이 일어나는 바람에 죽을 사람은 이미 진즉 죽고, 나머지 인간들은 그나마 안전한 도심지로(아무래도 문명화된 곳보다 자연환경이 유지되어 있던 곳의 변화가 더욱 격렬했다.) 피신했기 때문이었다.
언데드 무리가 한데 모여 만들어 내는 마력은 어마어마했으나 불운하게도 플레이어들은 거기에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지구가 만들어 내는 몬스터들을 처단하기에도 바빴던 탓이다.
그러던 중 가장 먼저 언데드의 발현을 감지한 것이 다름 아닌 마리나 비셋. 처음 그녀는 혼자서 신의 흔적을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언데드들과 본격적인 격돌을 벌이기 전 끔찍한 사태가 발생했다.
“아까도 대충은 말했지? 격변을 겪으며 애리조나 북부 고원에도 몬스터가 대량으로 발생했는데, 하필이면 언데드 몬스터들이…….”
“처음 네가 ‘흡수’라는 표현을 썼을 때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만.”
대충 눈에 띄는 언데드들을 걷어 내며 보다 진한 마력 반응을 찾아 움직이길 수 분, 정시우는 협곡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언데드 무리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헛다리를 짚은 것인지 ‘신의 흔적’은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놔두고 지나갈 만한 송사리들은 아니었다. 특히나.
“저걸 보고 있으면 이해할 수밖에 없네.”
“그렇지?”
실로 다종다양한 언데드가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중 특히 눈에 띠는 것이 있었으니 전신에 단단한 갑각을 두른, 사슴처럼 보이는 몬스터였다.
집단을 이루고 있고, 사체의 손상도가 심하지 않다는 두 가지 점을 들어 놈들이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몬스터였으며, 지구에서 자연발생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
“언데드들에게 당해 고스란히 놈들의 전력이 되었다 이거지. 만약 다른 신의 수하들이었다면 상황이 이것보단 나았을 텐데.”
“내 말이.”
생명은 전염시킬 수 없어도 죽음은 전염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언데드의 신 세트나크는 그 점에 있어서 다른 신들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더욱이 저 자연발생한 몬스터들이, 한국에 나타난 트롤을 제외하면 아무래도 가장 까다로워 보이는 놈들이라는 게 더욱 성가신 문제야.”
“그나저나 저 갑각…….”
정시우는 인벤토리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협곡 아래에 있던 몬스터에게 던져 보았다. 별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힘을 담아낸 돌멩이가 갑각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오는 것이 보였다.
[쿠륵!]
“확실히 갑각을 뚫진 못했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해 기절했어! 언데드가!”
“저것들 방어구 소재로 딱일 것 같지 않냐?”
“……끄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모두 회수해야지.”
비단 방어구뿐만이 아니다. 보호를 요구하는 시설의 외벽으로 쓰기에 저만한 소재는 없으리라. B&Y의 실험소라든가.
‘우리 케이나의 새로운 육신이라든가.’
기왕이면 저 몬스터 놈들의 대장 격인 놈도 한 마리 있었으면 좋겠는데. 정시우는 입맛을 다시며 그립을…….
“잠깐만, 시우.”
마리나가 딱딱한 목소리로 그를 멈춰 세웠다. 그녀의 시선은 협곡에서 벗어나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에단이 경고한 그놈들과 곧 만날 것 같아. 엠퍼러, 미국 서부의 패자 집단이야.”
“응?”
그도 차분히 마나를 감지했다. 과연 주위 언데드들과는 이질적인 마나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마나는…….
“플레이어…… 맞는 거지?”
“응.”
“호, 그렇단 말이지.”
정시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가 전투를 앞두고 짓는 사나운 미소. 마리나는 그 섬뜩한 표정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히고 말았다.
“좋아, 일단 가 보자고.”
“야, 잠, 꺄악!”
그러나 정시우는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해 주지도 않고, 곧장 투구를 쓰곤 스로틀을 당겼다. 바이크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굉음을 발했다.
일대에 있는 모든 존재를 도발하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