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78화.
정시우는 작은 방 끝부분에 위치한 게이트…… 새파랗게 빛을 발하는 금속의 거대한 링과,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짙은 회색의 안개를 멍하니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거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야?”
“응. 텔레포트 게이트야.”
그가 모르는 사이 지구의 문명이 이렇게까지 진보해 있었다니! 그러나 마리나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B&Y에서 마석을 그렇게나 소모해 가며 연구한 끝에 얻은 결실이지. 기술은 이미 저쪽에서 완성되어 있었으니, 나머진 그걸 지구에 재현하는 것뿐이었어. 그리고…….”
기술과 자금력으로는 어디에도 꿀리지 않는 B&Y가 전력으로 나서 그것을 실현시켰다고.
물론 텔레포트 게이트의 존재를 확인하려거든 족히 30단계 이상의 던전에 진입해야 한다. 그 시점에서 지금 지구 대부분의 기업은 연구조차 시작할 수 없는 지경이지만…….
“어찌어찌 만들기까지는 성공했지만 발동할 때 너무 많은 마나가 소모되어서 써먹을 수가 없었는데, 다행이랄지 불행이랄지 지구가 이상하게 변하면서 공기 중에 마나가 넘쳐 나게 되었잖아?”
“그래서 자연의 마나를 소모해 게이트를 활성화했다 이거지.”
“빙고. 아직 우리 본사 건물과 한국 지사 건물을 잇는 게이트의 쌍방통행이 가능할 뿐이지만.”
이세계의 마도문명을 지구에서 구현해 냈다는 것은 실로 경악스럽지만, 그것을 일구어 낸 이가 기술력으로는 세계 탑 수준인 IT기업 B&Y와 세계 최강의 헌터 후보라면 얼추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문제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어째서 한국이야? 이런 말은 그렇지만 게이트를 연결할 후보지는 한국 땅 말고도 엄청 많았을 텐데.”
“한국엔 네가 있으니까.”
“프로포즈?”
정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마리나는 깔깔 웃으며 농담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으로 가야 할 참이었으니까 우선적으로 본사와 한국의 게이트를 연결했을 뿐이야. 하지만 처음부터 한국을 유력한 후보지로 꼽고 있기는 했어. 너는 너희 나라를 우습게 보는 모양이지만 지금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곳이거든.”
“아, 그건…….”
어째서냐고는 묻지 않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몬스터가 나타난 장소, 그리고 그 몬스터가 깔끔하게 사라진 장소. 여러모로 한국에서는 지구 전체를 뒤엎은 이 이변의 핵심과 관련된 사태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사태에 정시우가 깊게 관여되어 있었다.
마리나 또한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까. 그녀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정시우가 그런 의문을 떠올리던 때 그녀 본인이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아린은 대체 어떻게 된 거고, 또 왜 너와 함께 있는 거야? 게이트까지 보여 준 마당에 그 정도는 알려 줘도 되지 않아?”
더 이상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마리나가 여전히 품에 수아린을 끌어안은 자세로 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정시우 대신 수아린이 틱틱거리며 대꾸했다.
“게이트는 당신이 멋대로 오빠를 끌고 들어와 보여 준 것뿐이잖아요. 이쪽 사정을 그리 간단하게 말해 줄 것 같아요?”
“보아하니 네가 아린을 구해 준 것 같긴 한데……. 리타이어했다고 들었는데, 리타이어 과정에 난입이라도 한 거야? 그게 가능했단 말이야?”
깔끔하게 수아린의 말을 씹고 정시우 본인에게 물어 오는 마리나! 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부터 이 정도 추궁은 들어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긍정해 주었다.
“나한테는 가능하더라고. 하지만 함부로 따라하면 안 된다.”
“그러면 이렇게 작아진 건 패널티의 일종일까.”
“대충 그래. 지금은 이 둘 하고 같이 던전을 진행하고 있지.”
“무우척 흥미로워. 그러면 있잖아,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건데…….”
“이이이익.”
“아얏.”
마리나의 얼굴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수아린이 그녀의 팔뚝을 깨물어 버리곤 그녀에게서 벗어나 정시우의 품으로 돌아왔다.
“정말 무례하고 재수 없는 여자예요. 시우 오빠, 우리 돌아가요! 신의 흔적인지 뭔지 미국 사람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놔두고!”
“이름이 시우구나!”
“어…….”
여태 정시우와 영어로만 대화를 나누기에 안심했는데, 설마 한국어를 알아들을 줄이야. 자신의 실수로 정시우의 이름을 들키게 되자 수아린은 끝내 패닉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자숙하고 있겠습니다…….”
그녀는 정시우의 가슴팍 안으로 기어 들어가 축 늘어졌다. 십 년은 늙어 버린 얼굴이었다. 물론 그래도 귀여웠지만 사정을 알고 있는 용세하가 보기엔 딱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진정해. 어차피 계속 감출 생각도 없었으니 안심하고.”
“네에…….”
정시우는 수아린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고는 투구를 벗어 버렸다. 마리나에게 대충 자신을 드러내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그녀가 짝짝 박수를 쳤다.
“시우, 마스크 괜찮은데 왜 감추고 있었어!”
“이래저래 수상한 놈이라 그간 얼굴을 드러내 놓고 움직이기 힘들었거든.”
“스스로도 수상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구나…… 뭐, 괜찮지만.”
정시우의 정체도, 수아린의 상태도 이 이상 마리나에게 줄줄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다. 수아린도 얌전해지고 마리나도 만족한 지금, 정시우는 슬슬 본제에 돌입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일의 대가 말인데.”
“일일 데이트로는 만족을 못하겠다는 거야? 설마 아린이 있어서 나는 눈에도 안 들어와? 여자로서의 매력은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냐. 대가는 필요 없어.”
“그냥 도와주겠다니, 시우…….”
마리나의 눈빛이 총천연색으로 반짝였다. 분명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정시우는 빠르게 그녀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기로 했다.
“넌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실은 내가 너한테 진 빚이 있거든. 그걸 없애는 셈으로 치자.”
“빚……?”
“그래, 빚.”
마리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 드디어 올 때가 온 것이다. 정시우가 마리나를 순순히 따라온 이유에 대해서 설명할 때가.
정시우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이전, 뇌신의 소신전에서 있었던 일을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물론 이세계에 넘어갔다느니 하는 설명은 제하고, 단지 뇌신과의 충돌에서 뇌신의 라이플이 어떻게 활약을 했다는 정도로만.
“뇌신의 강림체와 싸웠다고!? 짱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마리나를 흥분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너 진짜 강하구나! 게다가 뇌신의 힘으로 라이플을 강화하기까지 했다구!? 뇌신한테 제대로 한 방 먹였네!”
“어쨌든 그 덕에 놈이 널 미워하게 된 것 같아.”
“그건 괜찮아. 어차피 언젠가 내 쪽에서 한 방 먹여 주려고 했었으니까. 나 대신 네가 나섰을 뿐이지. 그렇게 신경 안 써도 괜찮은데.”
그러니까 정말이지 어째서 이 여자는 정시우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굴며, 동료의식까지 품고 있단 말인가! 수아린은 태클을 걸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으나 자숙 기간이었으므로 꾹 눌러 참았다. 그사이 정시우와 마리나 사이의 대화는 순조로이 진전되고 있었다.
“정 그렇게 뭘 해 주고 싶으면 나중에 네 도움이 필요할 때 한 번 도와주면 그걸로 됐어.”
“후, 그거 마음에 드네. 그럼 날 따라와 준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지?”
“그래.”
이야기가 생각지 못했던 방향에서 급진전하기는 했지만, 이걸로 얘기가 대충이나마 정리되었다. 마리나에게 전달해야 할 얘기도 얼추 했고 그녀로부터 들어야 할 얘기도 모두 들었다. 남은 것은…….
“그럼 출발하자.”
“공간이동 실패확률이라든가 없겠지……?”
“성공률 100%야! 아직 한 번밖에 실험 안 해 봤지만.”
“야.”
“그럼 가자! 나 먼저 간다?”
설마 죽진 않겠지. 정시우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게이트에 몸을 던지는 마리나의 뒤를 따랐다. 운명공동체인 수아린과 용세하는 물론 거절 의사를 표할 틈도 없이 그와 함께 게이트를 통과하게 되었다.
“웩.”
자숙 중인 수아린이 헛구역질을 했다. 정시우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링 안으로 뛰어들어 반대편의 링으로 튀어나오는 그 짧은 순간, 그들은 롤러코스터를 100번 연속으로 탄 것만 같은 기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좁은 드럼통 세탁기에 갇혀 천 바퀴쯤 구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토, 토할 것 같습니다, 형님…….”
“으우윽.”
용세하도, 그들보다 먼저 게이트를 통과한 마리나도 같이 웩웩거리고 있었다. 유일하게 정시우만이 멀쩡했다. 어지럽기는 했지만 구역질은 나오지 않는 수준이다. 수아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물었다.
“오빠는, 왜 괜찮아요……?”
“원래 난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강해.”
“으으아, 재수 없는데 부러워……!”
그로부터 5분이 지나 가까스로 진정한 마리나가 입가를 스윽 닦고 고개를 들어 올리며 정시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 이제 괜찮으니까 출발하자.”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으니까! 괜히 귀찮은 사람들하고 엮이기 전에…….”
그녀가 말을 마치는 그 순간에 맞추어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당연하지만 마리나가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파악한 순간 수아린과 용세하가 잽싸게 은신을 구사하며 그의 품으로 기어들었다.
“마리, 정말 데려왔구나.”
“으, 에단…….”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를 듣는 그 순간 마리나의 표정이 구겨졌다. 그녀가 말했던 ‘귀찮은 사람들’이란 필시 그이리라. 반면 수아린과 용세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속삭였다.
“와, 미중년이네요.”
“저렇게 멋지게 늙을 수 있다니 역시 백인은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엘리베이터에서 걸어 나온 이는 마리나와는 조금 터울이 져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잿빛 머리를 올백으로 깔끔하게 밀어 넘기고 검은 정장을 입어, 굉장히 스마트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마리나를 부르는 애칭으로 보나, 그녀의 질색하는 반응으로 보나 친오빠가 맞겠지. 무엇보다도, 이쪽 게이트로 통하는 엘리베이터에도 장치를 해 두었을 텐데 그것을 이용했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였다.
“너무 늦기에 걱정했다. 정부가 냄새를 맡아서, 그걸 막느라 고생하던 찰나였거든.”
“……혹시 엠퍼러 애들이 나섰어?”
“일단 지금까지는 막아 두고 있지만, 혹시 충돌이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해라. 그리고…….”
남자가 정시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시우 자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지적인 분위기와 한 기업의 대표를 지내며 형성된 자연스러운 위압감이 느껴졌으나, 정시우가 다른 이를 상대로 조금이라도 위축되는 일 따위 있을 수가 없다. 남자도 그것을 느꼈는지 입가에 미약한 미소를 띠었다.
“협력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B&Y 대표 에단 비셋입니다. 동생이 많은 폐를 끼쳤으리라 생각됩니다만…….”
“폐는 무슨 폐! 시우와 나는 이미 완벽한 파트너야!”
정시우가 모르는 사이 그와 마리나는 어느덧 파트너 관계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에단 비셋은 동생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고는 정시우에게 다가와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는 마주 손을 내밀어 에단 비셋과 악수를 했다.
“정시우입니다. ‘임시’로 마리나를 돕게 됐죠.”
“하하. 동생은 원래 이런 성격입니다만, 마음에 드는 사람한테는 특히 더 귀찮게 구는 성격이기도 합니다. 아마 미스터 정에게는 앞으로 더욱 귀찮게 엉겨 붙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결코 악의는 없으니 너그러이 넘겨주시길.”
“헛소리 좀 그만해, 에단. 전할 말 다 했으면 가라고, 정말.”
국경이 달라도 남매 관계는 똑같은 것인가. 짜증난단 티를 팍팍 내며 오빠를 옆에서 밀어내는 마리나였으나, 플레이어가 아닌 그가 밀려나지 않는 것을 보면 진심으로 힘을 주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에단은 꿋꿋하게 할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유감스러웠던 녀석인데 플레이어까지 되어 버리는 바람에, 이제 이 녀석을 감당할 남자는 지구상에는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미스터 정을 만나 안심했습니다. 앞으로 녀석을 잘 부탁드립니다. ……제 말의 뜻, 아시겠지요.”
“어…… 모르겠는데요.”
알고 싶지도 않은데요. 그런 의사를 담은 정시우의 대꾸에도 에단 비셋은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었다. 반면 마리나는 본격적으로 오빠를 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에단 비셋이 오, 하며 살짝 뒤로 물러섰다.
“정말 맞을 것 같으니 이쯤 해 두죠. 마리에게도 말했지만, 이번 일을 방해하려는 작자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뒤처리는 제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미스터 정 마음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방금 살짝 으스스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정시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한들 그렇게 했을 테니 말이다.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아, 정말 에단! 남녀 사이에 끼어드는 거 아니라고 마마가 가르쳤잖아!”
“오, 미안미안. 이제 난 정말 구경만 하고 있을게. 마리, 잘 해 봐.”
“아아아, 정말!”
마리나는 정시우의 팔목을 잡아끌고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방 안에 에단 비셋이 혼자 남았지만 그까지 엘리베이터에 태워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실로 끈끈한 우애에 정시우는 감격했다.
“에단은 날 어린애 취급하거든. 저런 사람하고 깊게 어울려 주지 마, 시우.”
“그래.”
어린애니까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정시우였으나 그것을 고스란히 입 밖에 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멈추었고, 나오니 옥상이었다.
“애리조나의 그랜드캐니언까지 일직선으로 갈 거야. 준비됐지?”
“그랜드캐니언이라니 그것 참.”
설마 인생 첫 번째 그랜드캐니언 관광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이야. 정시우는 씩 웃으며 인벤토리에서 바이크를 꺼내었다. 솔직히 말하면 에단에 대한 인상보다도, 자신에게 호감을 표하는 마리나에 대한 생각보다도, 지금은…….
‘빨리 싸우고 싶은데.’
그를 기다리고 있을 전투가 기대되어,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