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77화.
“오랜만! 완전 반가워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상공을 질주하며 지상의 몬스터를 치우길 사흘, 이젠 슬슬 격변의 여파도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시점에 서울로 돌아온 정시우는 한 명의 여자와 조우했다.
“네 이동경로가 하도 정신없어서 한참을 찾았어! 그동안 잘 지냈어? 나도 잘 지냈는데!”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눈부신 흰색 깃털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들어, 허공을 가로지르던 바이크의 앞길을 부드럽게 가로막는 여자. 그 덕에 그때까지 정시우가 유지하고 있던 은신이 완벽하게 깨져 버리고 말았다. 자연히 정시우의 응대도 딱딱할 수밖에 없었다.
“섭섭하게 그러기야? 함께 치열한 전선을 돌파한 사이잖아, 우리.”
그러나 여자는 어지간히도 마이페이스인 듯, 정시우에게로 얼굴을 쑥 내밀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전선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영.”
시치미를 떼고는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라는 것을 정시우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여자, 마리나 비셋은 그만큼 마나 센스가 형편없는 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나 그녀는 정시우의 완벽한 안면몰수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 예전에도 감이 안 잡혔지만 지금은 더 모르겠는데…… 너 대체 그동안 뭐했어? 혹시 정신과 시간의 방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거야?”
정시우는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너도 강해졌으면서 뭘 그래. 후우…… 마리나?”
“훌륭해!”
마리나 비셋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번에 헤어질 때 했던 말을 그가 잊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생기 있게 흔들리는 트윈테일을 보며 그 나이에 어쩌면 그렇게 어울릴 수 있는 것인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슬슬 네 이름도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얘기 길어지냐? 그럼 장소 옮기자.”
마리나 비셋은 그 몸에 지닌 실력으로든 미모로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여자. 더욱이 정시우는 지금 대한민국이 집중하고 있는 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둘이 서울 상공에 덩그러니 떠 있으니 얼마나 많은 이목이 집중되겠는가!
“그야 얘기는 길어지겠지만…… 그보다 이름 하나 가지고 되게 쩨쩨하게 구네. 내가 그것 때문에 귀찮게 굴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야? 정답이야!”
“그러니까 얘기 안 해.”
“쳇.”
마리나 비셋은 툴툴거리면서도 다시 날개를 펼쳤다.
“어쨌든 내 얘기를 들어 줄 의향은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네. 그럼 따라와 줘. 준비해 둔 장소가 있으니까.”
“그래.”
정시우는 순순히 바이크를 몰아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한국에 나타난 몬스터는 얼추 정리했기 때문에 조금 정도는 여유를 낼 수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실은 정시우 쪽에서 그녀에게 해 두어야 할 말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바로 뇌신에 대해서다.
‘비록 내 쪽으로 완전히 소유권이 넘어온 물건이긴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마음에 걸리니까.’
바로 얼마 전, 뇌신 라이아의 소신전에서 뇌신의 라이플을 이용하는 바람에 정시우가 마리나로부터 그것을 넘겨받았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더욱이 놈은 강림체가 파괴되던 순간 자신의 선물을 자신의 적에게 넘긴 마리나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짖었었다. 둘 사이에 무엇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놈이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으리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저쪽에서 먼저 찾아왔으니 다행이지. 그것도 적절한 타이밍에.’
뇌신이 정시우에게 악의를 불태우는 것은 정시우가 저지른 일의 업보이니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마리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뇌신에게 적의를 샀다는 사실은 그를 제법 찜찜하게 했다.
그래서 일이 꼬이기 전에 마리나에게 그 사실만은 알려 두자는 생각을 했는데, 운이 좋아 이렇게 그녀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정말 그것뿐이죠? 다른 생각은 없는 거죠?”
수아린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캐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시우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그냥 전투 한 번 같이 치렀을 뿐인데 대체 왜!) 마리나 비셋을 보고 있자니 솟구치는 질투와 조급함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른 생각?”
물론 영문을 모르는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할 뿐. 수아린은 자기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도 없이 말을 뱉어 냈다.
“마리나 비셋을 어떻게 해 보려는 생각.”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은 사람을 내가 왜? 나도 그렇게까지 전투민족은 아냐.”
“어…… 네, 그렇겠죠.”
‘어떻게 한다’는 것을 ‘죽인다’고 해석한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전투민족인 것 같은데요, 라는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러면 원래 무슨 말을 하려고 했냐는 대꾸가 돌아왔을 경우 수아린이 무척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흐. 흐흣. 으흐흐.”
“얜 또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 보이지.”
“선배님…….”
용세하는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만드는지 수아린을 보며 나날이 깨달아 가고 있었다. 수아린은 자신이 얼마나 좋은 반면교사가 되어 주고 있는지 몰랐으나, 아마 앞으로도 모르는 쪽이 그녀를 위해 나을 것이다.
“여기야.”
마침 그때 마리나가 정시우를 소리 내어 부르며 하강했다. 날개를 접고 착지하는 그녀를 따라 바이크를 멈추고 확인하니 서울 중심지에 위치한 외국계 기업 빌딩이었다. 실리콘 밸리에서도 유명한 IT기업 중 하나인 B&Y 컴퍼니의 한국 지사.
정시우는 격변 와중 용케도 건물이 멀쩡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에게 물었다.
“넌 여기 고용이라도 되어 있어?”
“우리 오빠 거야.”
“네?”
“우리 오빠 거라구. 그러니까 이 건물의 모든 건 부담 없이 써도 돼.”
정시우는 순간적으로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으나 곧 감을 잡았다.
“설마 B&Y의 B가……?”
“당연히 Bisset의 B지. 자, 그런 것보다 중요한 얘기가 있으니까 얼른 따라와.”
“…….”
정시우 일행은 태연히 옥상 문을 열고 그에게 손짓을 하는 마리나를 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설마 했는데 타고난 미녀에 세계 최고를 노리는 플레이어이기까지 한 주제에 집안조차 유복하다니! 수아린이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은 너무 불공평해.”
“저 중 두 개는 가지고 있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
정시우는 이를 갈던 수아린을 깔끔하게 격추시킨 후, 인벤토리에 바이크를 집어넣고는 조용히 마리나를 따랐다.
밝은 복도로 내려온 마리나는 복도 한편에 마련된 엘리베이터 안으로 그를 끌어들이더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몇 개인가 차례대로 눌렀다. 그러자 엘리베이터가 위도 아래도 아닌 영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때?”
두근두근 반짝이는 얼굴로 돌아보며 묻는 마리나에게 정시우는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녀는 그의 리액션에 후욱 콧김을 뿜으며 만족스러워했다. 역시 그냥 애였다.
“그래서 널 찾은 목적부터 말하자면.”
엘리베이터가 이동하는 동안 마리나가 짧게 용건을 밝혔다.
“너한테 의뢰를 하러 왔어. 나랑 애리조나로 가 줬으면 해.”
“거기 뭐가 있는데?”
“신의 흔적.”
어라, 저쪽에서 먼저 치고 들어오다니. 정시우는 당황했지만 마리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우리 이 화제에 대해선 이미 한 번 얘기를 했잖아. 저쪽의 ‘신’이라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공동 전선을 펼치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지? 하여간 강해진다면 환장하는 플레이어들 하고는 다르다고 봐도 되지?”
“공동 전선은 무슨.”
마리나는 그의 반박을 듣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거, 저번과는 조금 다른 사태야. 지구가 요상하게 변해 가면서 여기저기서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있는데, 하필이면 지형 변경이 일어나면서 대량의 몬스터가 발생한 지역에 하필이면 이세계에서 나타난 몬스터들까지 겹쳐지면서 사태가 엄청 복잡해졌거든. 꼭…….”
놈들이 지구의 몬스터들을 흡수라도 하는 것 같다고, 마리나는 무척 불쾌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더욱이 그 중심부에서는 심상치 않은 마나 파장까지 느껴지고 있거든. 뇌신 라이아의 기운이라면 이전에 느껴 본 적이 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뇌신 그 이상이야. 아마 최악의 전투가 될 거야.”
“뇌신 이상, 최악의 전투라.”
이런, 그 말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정시우가 변태라는 증거였다.
“미국에서도 이래저래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개중에도 애리조나 건은 굉장히 이례적이야. 규모가 제일 큰 축에 속하기도 하고. 다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이 있다면, 그래도 이 사태의 희귀성과 중요성을 내가 제일 먼저 파악하고 담당하게 되었다는 것. 불행한 점은 믿고 내 등 뒤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
별이 통째로 변이한 지금, 전 세계가 미쳐 날뛰고 있다. 인력부족인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골머리 싸매고 있던 차에 남한 쪽은 거의 정리가 끝나 간다는 소식이 들리기에 아무리 땅덩어리가 작아도 그렇지 말이 되나 싶어서 찾아봤더니.”
“느그 나라 땅덩어리 커서 좋겠다그래.”
“그때 마침 내가 믿을 수 있는 강한 플레이어가 화면에 나오는 거 아니겠어.”
정시우의 태클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말을 끝맺는 마리나.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났다.
“그 순간 난 확신한 거야. 너와 내가 다시 함께할 때가 비로소 왔다는 것을! 그래서 바로 이곳에 와 널 찾은 거고!”
“착각 아닐까?”
정시우는 일단 튕겨 보았으나 마리나의 표정은 변함없이 여유로웠다.
“너무 경계하지만은 마. 결국 지구 전체의 문제잖아? 더구나 나도 아무런 대가 없이 널 데려가려는 건 아냐. 어디까지나 내가 부탁하러 온 입장인 만큼 합당한 대가는 지불할 셈이야.”
“뭘로?”
“그래, 그러니까, 어…….”
마리나는 자신 있게 말을 이으려다가는 이내 곤혹스러운 표정과 함께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피차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세상 대부분의 일은 돈이면 해결이 되기에, 그에게 무엇을 제시해야 할지 순간적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음…….”
정시우의 투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신음을 흘리던 마리나였으나 순간 좋은 생각을 떠올렸는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결코 정시우가 거절할 리 없다는 확신과 함께.
“나와의 일일 데이트 찬스!”
“그냥 당신이 오빠한테 관심 있을 뿐이잖아욧!”
“어라?”
“아.”
끓어오르는 태클의 의지와 질투를 참지 못하고 버럭 외치고만 수아린. 당연하게도 아주 시원스레 은신이 풀리고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용세하는 덤이었다.
“어라…… 아린?”
“사람 잘못 보셨는데요.”
그녀는 다급히 정시우의 품에 숨으려 했으나 이제와 그것이 될 리 없었다. 마리나는 그녀를 양손으로 붙잡고는 꺄꺄 소리를 질렀다.
“아린 맞네! 작아! 귀여워! 살아 있었구나! 귀여워! 작아!”
“이, 이거 놔욧!”
“아아, 선배님…….”
마리나가 환호하고 수아린은 기겁하고 용세하는 한숨을 쉬었다. 애리조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완벽히 뒷전으로 밀려난 순간이었다.
아니, 어차피 거래 조건이 어떻게 되든 애리조나에는 갈 생각이었고, 그렇게 되면 수아린과 용세하를 마냥 숨길 수도 없으니 적당한 시점에 공개를 하려고는 했지만 말이지…… 정시우는 막연히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그거 나보고 한 말이지? 너 역시 나한테 반했었구나.”
“넌 플레이어 말고 소설가 해도 대성했겠다.”
정시우가 마리나를 비웃은 다음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그 너머로 강한 마력을 뿜어내는 게이트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