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75화.
[지구가 ‘뉴 에이지’로 변화하는 중입니다.]
[변화가 모두 끝날 때까지 휴식처와 던전으로의 출입이 제한됩니다.]
“뉴 에이지라니 그런 단순하면서도 중2병이 느껴지는 용어는 누가 붙인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형님!”
정시우는 망막을 가리는 메시지를 걷어 내고는 주위를 살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가히 대격변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재앙이었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과 대지의 융기. 그것은 마치 지구가 팽창하며 겉껍질인 대지가 산산이 깨어지고, 그 틈으로 새살이 돋아나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새살에서…….
“짙은 마나가 느껴지네.”
“오빠가 어느덧 이렇게나 훌륭한 마나 유저로 성장해 줘서 참 기뻐요. ……지금 상황은 그리 기쁘지 않지만요.”
본디 지구에는 마나가 적거나 거의 없다. 있다면 그것은 플레이어들이 남긴 잔향, 혹은 지구에 나타난 몬스터들이 품거나 내뿜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파트를 찢어발기고 치솟는 저 돌산에서 느껴지는 마나는 다른 플레이어의 것도, 몬스터들의 것도, 그렇다고 신의 것도 아닌…… 지구 본연의 것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야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를 놓고 따지자면 당연히 가능하겠지. 정시우가 다녀온 이세계만 해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지구는 언제까지고 그 모습 그대로일 줄 알았다. 비록 하늘성이다 개미굴이다 몬스터다 침범을 받는 일은 있어도, 지구 자체가 변해 버리는 일은 없으리라 안일하게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도 침략자들이 만들어 낸 짓일까요?”
“그렇다고 보기엔 규모가 너무 커. 차라리 지구가 플레이어와 몬스터의 마나에 자극을 받아 스스로 변화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잠깐.”
그 순간 정시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정말 그 자신의 기억인지도 의심스러운,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의 기억 한구석에 달라붙은 단편적인 이미지. 그땐 분명 지구에 어마어마한 밀도의 마나가…….
“오빠?”
“……아, 아무것도 아냐. 빨리 움직이자.”
정시우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그런 애매한 기억이나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지구에 일어나고 있는 이 기괴한 변화다.
정시우는 그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지만 문제는 일반인에 불과한 그의 어머니. 그는 곧장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지만 받는 이가 없었다.
“이런 망할…….”
초조해진 정시우가 폰을 꾹꾹 눌러 보았지만 메시지는 물론이고 인터넷까지 먹통이라는 사실을 추가적으로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수아린이 조심스럽게 추측했다.
“어쩌면 이 난리통에 기지국도 몇 군데 날아간 것 아닐까요. 전화도 인터넷도 그래서 안 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요즘 세상에 건물 몇 개 날아갔다고…… 아니, 몇 개로 안 끝났을 수도 있나. 만약 그래서 안 되는 거라면.”
정시우는 머리를 매만져 자신이 투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곤(던전에 있다가 쫓겨났으니 투구를 벗을 시간도 없었다는 쪽이 정확했다.) 곧장 인벤토리에서 팬텀바이크를 꺼내었다.
“저, 저건……!?”
“혹시 TV에 나온 그 사람 아니야?”
“나, 나도 태워 줘!”
사방에서 이리저리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대번에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정시우는 그들 모두를 쿨하게 무시하고는 바이크에 올라탔다. 당장 위기에 처한 것도 아니고 단지 보다 안전해지고 싶을 뿐인 이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전화나 폰이 터질 때까지 달려보는 수밖에 없나.”
“다음날 신문이 나온다는 전제 하에, 1면 톱은 따 놓은 당상이네요…….”
정시우는 곧장 시동을 걸고는 이륙했다. 그 아래로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몰려드는 모습에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말았다. 난민이 따로 없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사람들…… 죽겠죠?”
“아마. 많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사방에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대지가 수백 미터 융기하는 시점에서 사망자가 없는 쪽이 기적이었다. 그는 바이크를 몰아 하늘을 내달리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아래, 도로에 무너진 표지판에 전라도 광주까지 3킬로미터라고 쓰인 것이 보였다.
“정말 멀리까지도 왔네.”
“그만큼 오빠가 한국의 던전을 많이 정리했다는 거죠.”
“그것 참 기쁘기도 하다.”
하늘을 고속질주하고 있으니 서울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믿고 내달리던 정시우의 눈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고속도로 한중간, 이곳저곳이 뒤집어지고 엉켜 아비규환을 방불케 하는 현장에…….
“몬스터?”
“설마 근처에 풀려난 던전이 있었던 걸까요. 어지간한 던전은 오빠가 다 정리했을 텐데!”
“맙소사, 이런 때 몬스터까지 날뛴다면 대체 얼마나 큰 피해가……!”
[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몬스터의 크기는 상당히 거대했다. 고속도로 두 개 차로를 가득 채우고 일어선 놈의 괴성에 뒤집어진 차 안에 갇힌 사람들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체고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 짙은 녹색 피부에 우락부락한 근육질…….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하는 그놈은 이미 몇 개인가의 차를 잘근잘근 밟고는, 그 안에서 짓이겨져 죽은 인간을 꺼내 먹어 치우고 있었다.
“저 새끼가.”
그것을 본 정시우의 머리에서 뭔가가 뚝, 끊어졌다. 그의 의지를 알아챈 팬텀 바이크가 곧장 아래로 방향을 전환했다.
“흡!”
“꺄아아아악!”
직후 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지듯 빠르게 내리꽂는 바이크. 날카롭게 가다듬어진 프론트 펜더가 몬스터의 머리통을 들이받았다. 크루얼 차지를 시전하고 있었으니 그 파괴력은 가히 절륜한 수준!
[쿠갸아아아아아아아아아!]
몬스터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다! 정시우는 잽싸게 바이크에서 점프하여, 놈이 손아귀에 쥐고 있던 인간들을 낚아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미 먹어 치운 이는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두 사람은 안전했다.
“고, 고맙…….”
“튀어라.”
어울리지도 않게 히어로 행세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다른 인간들이 어찌 되건 알 바 아니었고, 실은 이러고 있을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어머니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단지 인간으로서, 자신과 같은 인간을 잡아먹고 있는 괴물의 존재를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후딱 끝내자고.”
정시우는 바이크에서 내리며 인벤토리에서 거랑의 앞발을 꺼내어 쥐었다. 전의로 충만해진 그에게 수아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아직 만나 본 적이 없는 몬스터예요. 품고 있는 마나의 양만 따지면 레벨 200은 확실히 넘어 보이는데…….”
“흠.”
[그우우우, 크가아아아아아!]
정시우의 시선이 자신이 아까 펜더로 들이받은 몬스터의 머리통에 집중되었다. 그대로 죽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깊은 상처가 났지만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상처 부위로 피가 쏠리며 빠르게 상처를 복구하는 모습이 보였다.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자연회복력이었다.
“……트롤.”
그것만 보고 정체를 특정한 것일까? 용세하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정도 회복력이라면 트롤밖엔 없습니다. 저도 하늘성의 자료를 통해 확인했을 뿐이지만…….”
“플레이어들이 벌써 트롤이 나오는 던전에 도전했단 말인가요? 최소 35단계는 되어서야 나타날 줄 알았는데!”
“하지만 특징이 일치합니다. 녹색 피부도 그렇고 인간형의 거인, 회복력까지…….”
“싸우지 마.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정시우는 해머를 거칠게 비틀어 쥐며 있는 힘껏 도약했다. 그사이 재생을 마친 트롤이 무기 대신 쥔 자동차를 휘둘렀지만, 정시우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자동차 끝을 가볍게 밟고 오히려 더 높이 뛰어올랐다.
[쿠…… 쿠오오오오!]
“어차피……!”
정시우가 트롤의 머리통보다 높이 점프한 바로 그 순간, 거랑의 앞발이 순식간에 거대화하며 트롤에게로 쏟아지던 태양빛을 가렸다. 그러나 직후 그보다 더 환한 빛이 타올랐다. 거랑의 앞발에 붙은 화염 옵션의 힘이었다.
[거랑의 앞발]
[랭크 ? C+++]
[공격력 ? 900 ? 1,900]
[숙련도 ? 420/480]
[속성 ? 화염 C+]
거랑의 앞발은 과거, 뇌신의 강림체와 싸워 이겨내는 과정에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공격력도 랭크도 그리 올라가지 않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거랑의 앞발이 품은 속성. D+랭크에 불과했던 속성이 C+로 성장한 것이다!
워낙 대단한 것들을 많이 얻어 잊고 있었지만, 속성에 있어 C+랭크는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한 방이니까!”
[구아아아아아!]
트롤이 마구 성질을 내며 그에게 자동차를 내던졌다. 정시우는 흥, 코웃음을 치며 발로 그것을 걷어차 버리곤, 망치를 휘둘러 놈의 머리통을 정확히 가격했다!
[칵!]
놈의 머리통이 시원스레 터져 버렸다. 실로 경악스럽게도 머리통을 잃은 목에 피가 꿈틀거리며 맺혀 새로운 머리통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보였지만, 강렬한 화염이 타격 부위에 머무르며 피를 태워 버려 재생도 불가능했다. 이내 놈의 재생력이 힘을 잃었고, 그제야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다.
정시우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으나, 화염으로 공격한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경험치를 얻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던전에서도 못한 레벨 업을 여기서 하는구나. 정시우는 전투를 치른 후임에도 오히려 전신에 힘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작게 미소를 짓곤 트롤의 사체를 인벤토리로 회수했다. 그 어마어마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사람들이 트롤의 사체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뒤늦게 반응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이쪽도 도와주세요! 차가 뒤집어져서……!”
“후.”
정시우는 바이크에 타며 대꾸했다.
“그 정돈 당신들도 할 수 있잖아.”
“그, 그래도…….”
“때는 이때다 하고 나한테 전부 떠맡기지 말아 줘. 무겁거든.”
그는 사람들을 놔두고 곧장 이륙했다. 혹시나 몰라 사방의 마나를 탐지해 보았지만 방금 잡았던 트롤 외에 다른 몬스터는 없었다.
“이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죠.”
수아린이 긍정했다. 만약 던전이 터진 것이라 하면 근처에 다른 트롤이 없을 리가 없었다. 하다못해 던전이 터져나간 흔적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이 트롤이 저 멀리서부터 뛰어온 것이 아니라면 도출되는 결론은 단 한 가지.
“트롤이 아까 그곳에서 자연발생했다는 거지.”
“맙소사…….”
수아린이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구에 마나가 생겨나고 있기에 언젠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나 빨리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트롤씩이나 되는 고레벨의 몬스터라니!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마냥 나쁘지는 않아.”
용세하가 망연히 중얼거리는 말에 대꾸하듯 정시우가 툭, 한 마디 흘렸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지만 명약관화한 현실이기도 했다.
“변하는 건 세상만이 아닐 테니까.”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야말로 지구가 침략자들을 대비하기 위해 일으킨 변화일지도 모르지. 정시우는 추측에 불과한 뒷말을 속으로만 중얼거리며 바이크의 속도를 높였다.
전라도를 완전히 벗어나기 직전, 다행히도 그는 전화가 통하는 지역으로 들어와 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무사했고, 이미 지하의 대형 벙커 하우스로…….
“그런 게 어디서 났어!?”
[네 아버지가 준비해 놨었거든. 기가 막힌다, 이거. 너도 들어올래?]
“필요 없어……. 어쨌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안에 있다고 너무 안심하지 말고. 곧 그쪽으로 갈게.”
[엄만 안전하니까 굳이 올 거 없다.]
“갈게. 기다려.”
멀쩡한 땅에서 산이 하나 치솟는데 지금 세상에 안전한 장소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바이크 속도를 높이려던 그때 갑자기 세상에 정적이 찾아왔다.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로 굉음을 내던 대지의 융기가 멎고, 그의 망막 위로 간결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뉴 에이지로의 진입이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변화가 종료됩니다.]
[휴식처와 던전에 출입할 수 있게 됩니다.]
“어……. 그래. 이제 괜찮겠다.”
[그렇다니까 글쎄.]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와의 통화를 종료한 후, 정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지상을 둘러보았다. 비록 변화가 멈추었다고는 해도 그 동안 일어났던 일들마저 롤백되는 것은 아니다. 지상은 여전히 혼돈과 파괴의 한중간에 놓여 있었다.
“오빠…… 오빠?”
“아, 잠깐 멍해져 있었어.”
하늘성, 개미굴, 지상의 몬스터, 이세계, 바뀌는 지구…….
“그냥 이제부터 시작이란 생각이 들어서.”
“뭐가요?”
“글쎄.”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을 떠올린 정시우였으나 그는 그것을 입 밖에 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
“엄마는 그래도 안전해진 것 같으니,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할까.”
“찬성입니다, 형님.”
그는 바이크의 속도를 더했다. 어찌 됐든 지금 당장은, 지상에 새로 나타난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치워 버릴 생각뿐이었다.
지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