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73화.
분하지만 정시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맛있잖아……!”
“왜 분해 보이시는 거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도 수아린은 자신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는 못했다. 물론 정시우의 옆에서 열심히 덮밥을 퍼먹고 있는 용세하는 완전히 무시했다.
“이래봬도 자취 및 요리 경력이 제법 되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생전 처음 본 몬스터 고기를 이렇게 맛있게 만들어 놓다니.”
“손질하면서 느꼈는데 고기 질감이 장어와도 잉어와도 돼지고기와도 소고기와도 다르더라구요. 대충 장어와 돼지고기의 중간 즈음에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무난하게 간장 베이스의 양념으로 조리해 밥 위에 올렸다고. 설마 날개를 퍼덕거리며 태클을 거는 능력밖에 없는 줄 알았던 수아린에게 이런 뜻밖의 재능이 있었을 줄이야, 완벽한 오산이었다.
“치유 능력도 있거든요! 이번에도 저 없었으면 위험했잖아욧!”
“아, 그래그래. 치유치유.”
“으으으…….”
덮밥 외에도 적어도 고기 두 근 이상을 구워 내놓았는데 정시우와 용세하는 그동안 던전에서 못 먹은 것을 전부 먹어 치우겠다는 기세로 그릇을 비웠다. 만든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습에 수아린도 뿌듯해졌다.
“많이 남았으니 더 드세요. 구체적으로는 삼천 근 정도.”
“몇 년은 먹겠네…….”
보관할 수 있는 만큼만 냉장고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버리기로 했다. 괜히 휴식처의 냉장고가 아닌지라, 양념이 된 고기도 족히 몇 년간은 멀쩡하게 보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바이크는 어땠나요?”
“…….”
“…….”
수아린이 자신 몫의 밥공기를 앞으로 끌어당기며 묻자, 열심히 전기뱀장어 고기를 먹어 치우던 정시우와 용세하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그것을 보는 수아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사고치고 왔어요.”
“사고는 무슨. 그냥 조금…….”
“조금?”
용세하가 살포시 웃었다.
“어쩌면 각국의 기술개발 경쟁이 조금 치열해질지도 모를, 그런 계기를 만들고 말았다고나 할까요…….”
“들켰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로 들켰군요!?”
이게 다 투명화가 너무 빨리 풀린 탓이다. 다행히도 얼굴은 들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정시우는 앞으로 바깥세상에서 바이크를 탈 때는 반드시 투구를 쓰자는 다짐을 했다.
그가 다짐하는 사이 폰으로 검색해 보던 수아린이 대문짝만하게 찍힌 정시우와 용세하의 사진을 보며 기겁을 했다. 정말로 얼굴만 안 나왔다 뿐이지 하늘을 나는 거대한 바이크와 그 위에 탄 두 남자의 등짝이 제대로 나와 있었다.
“인간 사이즈로 탔단 말이에요!?”
“승차감을 좀 더 제대로 느끼고 싶어서…… 죄송합니다.”
“아아아, 벌써 추측성 기사가 난무하고 있어…….”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산하동의 소동을 정리한 남자, 중국집 라이더일 것이라는 기사 또한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체구가 비슷하고 바이크의 형태도 너무나 흡사했던 것. 오히려 아니라고 밝혀지면 더욱 놀라울 것이다.
바이크가 처음부터 아티팩트였을 것이다, 특수한 기술로 아티팩트로 거듭나게 했을 것이다, 기타 등등 바이크에 대한 추측도 난무했고, 그의 동행인에 대한 의문도 많았다.
더욱이 각국 정부는 벌써 한국 정부에 중국집 라이더의 정보와 현대 기술로 아티팩트를 생산하는 방법에 대해 문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과거 설악산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를 찾는 방송이 나왔던 것처럼, 지금도 곳곳에 정시우의 행방을 찾는 메시지가 나돌고 있었다.
“이야, 이거 정부가 참 곤란하겠네. 하하하.”
“어쩜 이렇게 그늘 한 점 없이 상쾌한 미소를.”
물론 정부가 곤란하건 말건 지금 정시우에겐 전기뱀장어 구이가 제일 중요했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나중에 얼마나 많은 공돌이들이 구르게 될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천연덕스레 식사를 이어 갈 뿐이었다.
정말이지 마음 편히 넘어가는 날이 하루도 없구나, 수아린은 한숨을 쉬며 그에게 말했다.
“설거지는 오빠 몫인 거 알죠?”
“제가 하겠습니다.”
용세하가 나섰지만 수아린은 그를 가볍게 무시해 버리곤, 기묘한 박력이 어린 목소리로 다시금 정시우를 향해 강조해 말했다.
“시우 오빠, 몫인 거 알죠?”
“그, 그래.”
정시우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뒷모습을 수아린은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용세하는 대충 그녀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지만 입 밖에 냈다간 맞을 테니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후, 끝났다.”
“이젠 쉬세요. 과일이라도 깎아 드릴까요?”
“고마워.”
설마설마 했는데 수아린은 사과도 잘 깎았다. 원래 저 정도로 예쁘면 뭔가 하나 단점이나 약점이 있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완벽한 초인이 아닌가. 정시우는 사과를 깨물어 먹으며 기묘한 감상에 빠지고 말았다.
“계속 던전을 전전하다가 이렇게 가만히 쉬고 있으니 뭔가 어색하네요.”
“하지만 직접 던전을 클리어할 때에 비하면 긴장이 훨씬 덜했습니다. 저희가 던전에서 적극적으로 날뛸 수 없는 입장이기도 하지만, 형님이 던전을 클리어하시거나 몬스터를 상대하는 모습에선…… 위기나 패배를 상상하기가 힘들었으니까요.”
용세하의 말에 수아린 역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 뇌신의 강림체와 상대할 때 심장이 떨리긴 했지만 결국 그것도 정시우와 대등하게 싸운 정도였다. 아무리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신의 강림체씩이나 되어서 겨우 동수를 이룬 것이다!
괴력 스킬을 구사하고 헐크처럼 우락부락해진 정시우가 썬더 서펜트를 정면으로 맞서 밀어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수아린은 아그작, 멍하니 사과를 깨물었다.
“아마 오빠가 초기 플레이어였더라면 지구의 역사가 바뀌었을 거예요.”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단언하는 부분이, 참.”
멋지다. 수아린은 그 말과 함께 사과를 꿀꺽, 씹어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용세하가 히죽 웃다가 사과 심에 머리를 얻어맞았다.
“후, 늘어진다…….”
이젠 정말 휴식처가 그들의 집만 같았다. 정시우는 침대에 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한시적인 자유를 만끽했다.
그는 새삼스럽게 침대가 넓어졌음을 깨달았다. 이전엔 전력으로 굴러 0.3초면 반대쪽 끝에 닿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무려 2초나 소모해야 했다! 1바퀴, 2바퀴, 3바퀴…….
“좋아, 이제 던전 가자.”
“이걸로 휴식 끝이에욧!?”
정시우가 미련 하나 남지 않은 얼굴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셔츠를 벗어 던지고 방어구를 착용하는 그의 모습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는 수아린이 고개만 다른 쪽으로 돌리며 외쳤다.
“이제 고작 하루도 안 지났는걸요!”
“딱 이 정도가 적당해. 전직이다 이세계다 뇌신이다 바짝 조여진 긴장이 적당히 풀어질 정도. 그 이상 가면 너무 늘어져서 실수하게 될 수도 있어.”
“플레이어들과는 정반대의 사고방식이네요…….”
플레이어들은 한 번의 던전 입장으로 지나치게 많은 피로도를 소모하는 만큼, 그것을 재충전하기 위해 오랜 휴식 시간을 갖는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씩 던전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평균적인 인식이었다.
그나마 한국에서는 용오름 길드가 길드 멤버들을 빡세게 굴려 정예로 육성한다고는 하지만, 그런 그들도 보름에 한 번 정도로 던전 입장을 제한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식으로 근육이 던전을 잊을 정도로 푹 늘어져 있다가 던전에 들어가니 실수가 잦지.”
“이상하다, 분명 용오름 길드는 굉장히 합리적인 계산을 기준으로 플레이어들에게 휴식을 부여했었는데 오빠 말을 듣고 있으면 우리가 엄청난 잘못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져요…….”
정시우의 논리는 근성론에 불과했으나 지금 생기 넘치게 움직이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면 저절로 납득하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레벨 하나만 오르면 신체가 완벽한 상태로 돌아가는데 피로도는 무슨 피로도. 그놈들은 진짜 지치도록 안 맞아 봐서 모르는 거야.”
“철인…….”
누구보다 힘들었을 정시우가 멀쩡하다고 하는데, 수아린이나 용세하가 그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아쉬운 눈으로 휴식처를 훑다가는 이내 미니 사이즈로 돌아왔다. 이젠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한 기분이었다.
“레벨 200쯤 되면 바깥에서도 인간 사이즈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아, 그럼 너희들을 위해 레벨 200이 될 때까지 쉬지 않고 노가다라도 뛰어 볼까.”
“봐주세요, 오빠. 제가 잘못했어요.”
“형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시겠어요?”
“아니, 굳이 귀찮게 나갈 것도 없잖아. ……그리고 사실 지금은 밖에 나가기 싫어.”
얼굴이 안 들켰다고는 해도 바이크를 타고 돌아다니면 백 퍼센트 이목이 집중되겠지! 당연하지만 정시우는 휴식처의 문을 이용해 던전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일일이 탐색기를 쓰며 돌아다니기 귀찮은 것도 이유였지만, 전직을 마치고 뇌신의 강림체를 쓰러트리며 레벨 97까지 성장한 지금은 그 어떤 플레이어를 상대로도 꿀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서 있기도 했다.
개미굴 던전은 기본적으로 하늘성에서 해당하는 던전을 플레이하던 플레이어들이 리타이어하며 생겨난 던전.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이 정시우보다 수준이 낮다고 가장하면 그들이 돌던 던전도 정시우에게 별것 아닌 셈이 된다.
“음, 다시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비약이에요. 그 점이 짜릿해요.”
“좋아, 짜릿해진 김에 빠르게 가자.”
이제 슬슬 휴식처에 저장된 비드가 간당간당했다. 어차피 무기도 충분하니 당분간 방문하는 던전에서 얻는 비드는 모두 저장해 두기로 마음먹었다.
“저장은 무슨! 방어구가 필요해요. 오빠 수준은 급격히 상승하는 데 방어구는 엉망진창이잖아요. 무기 운은 이상하리만치 좋아서 당분간은 손댈 필요도 없겠지만…….”
“무기, 방어구…… 어라.”
방금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 있었는데. 정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수아린도 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형님 방어구가 파손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지금 거의 넝마 수준인데요.”
어떻게든 옷의 형상을 띠고는 있었지만 절반쯤 찢어진 가죽 자켓을 들여다보며 용세하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빈티지 패션이라고 우겨 볼까 생각하던 정시우의 뇌리에 돌연 번개가 쳤다.
“맞아, 우리 케이나!”
“저보다도 친숙한 호칭을…….”
정시우는 다급히 인벤토리를 열고 듀라한의 머리통, 케이나의 악의를 꺼내어 들었다. 휴식처에 돌아오자마자 서랍에 넣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장어 덮밥 때문에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그는 머리통에 정중히 사과라도 할 기세로 그것을 들어…….
“…….”
“…….”
“…….”
셋이 나란히 침묵했다. 듀라한의 머리통은 원래 말을 할 수 없었다. 녀석의 외견이 일행을 벙 찌도록 만들었다.
“아니…….”
“여자였을 줄이야.”
“사실 케이나라고 해서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요.”
그렇다. 투구가 깨지고 생전의 모습을 드러낸 듀라한은 사실 여자였던 것이다. 그것도 기다란 은발에 짙은 보랏빛의 멍하니 큰 눈, 창백한 피부가 인상적인 미녀!
그야 언데드니까 피부가 창백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상상과는 지나치게 방향성이 다른 외모에 일행이 침묵하는 것도 그야 어쩔 수 없었다.
“좋아, 일단 투구를 되살려 볼까.”
침묵 끝에 정시우가 내뱉은 말에 수아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오빠, 방금 죄책감 느꼈죠. 그러면 안 된다구요. 외모나 성별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면. 성별이 어떻건 외모가 어떻건 마구마구 던지는 쪽이 오빠에게 어울려요.”
“난 아무 상관없는데 만약 내가 미녀의 머리통을 던지고 다니는 것까지 카메라에 잡히면 정말 괴물 취급당할까 봐. 차라리 투구가 낫잖아.”
“아, 그렇네요.”
수아린이 상쾌하게 인정했다. 그런데 서랍에 미녀의 머리통을 넣기 전 그것의 정보를 확인한 정시우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아아!”
“뭐, 뭐야! 뭐예요!?”
“혹시 투구가 파괴되는 바람에 언데드가 갑자기 되살아나기라도 하는 겁니까!”
정시우가 말없이 그것을 내밀었다. 수아린은 조금 소름이 끼친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체의 머릿결을 살짝 붙잡았다. 그녀의 눈앞으로 정시우의 망막에 떠올랐던 것과 똑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듀라한 케이나의 정수]
[랭크 ? B+++]
[듀라한으로 전락한 기사 케이나의 원혼과 마나가 집중되어, 언데드로서 소멸한 후에도 남은 머리통. 그녀를 갑옷에 속박했던 투구가 신의 힘에 집중적으로 노출되며 소멸하여, 생전의 기록과 순수한 마나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보다 더한 신의 힘, 새로운 육신, 그것에 안착할 혼이 있다면……. 특수 가공 재료.]
“…….”
그것은 우연일까? 정시우의 왼쪽 손등에 새겨진 소울 컬렉트의 낙인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힘을 활용할 방법을 깨달았느냐고 묻는 듯이. 하지만 정시우가 슬퍼하는 이유는 그런 까닭이 아니겠지. 수아린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제 투척 못하잖아 이거!”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정시우가 쉽게 뇌신의 소신전을 쓸어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기 무기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의 중심 재료로 변해 버린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