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62화.
[인…… 간! 인간!]
“그래, 나 인간 맞아.”
그간 정시우가 경험해 본 결과 몬스터는 크기도 체내에 품은 마나도 지성도 패턴도 모두가 각각이었다.
그런데 신전 주위로 몰려든 몬스터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지성이 없는 축에 속했다. 얼마나 심했으면 오직 인간에 대한 집착을 동력원 삼아 움직이는 좀비보다도 멍청해 보였으니 할 말 다 한 셈이다.
[구아아악!]
[인…… 가아아안!]
“인간 맞다고!”
많이 움직일 필요도 없다는 것이 참 편했다. 몬스터들은 인간에게 대체 얼마나 큰 집착을 품은 것인지, 앞뒤 가리지도 않고 정시우와 이서희에게 돌격해왔고, 정시우는 흉측하게 이빨을 드러내며 침을 뚝뚝 떨어트리는 몬스터들을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순서대로 죽이기만 하면 되었다.
“흡…… 하! 핫!”
[칵!]
[키헤에에엑!]
정확히 한 방에 한 마리. 가볍고 절제된 동작으로 뻗어 내는 양 주먹이 허공을 매끄럽게 가르며 목표물을 수확했다.
당장이라도 정시우의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달려들던 몬스터들이 곧장 목이 뽑히거나 머리가 터져 쓰러지는 모습은 너무 시원시원해 우습게까지 느껴졌다.
플레이어가 아닌 정시우가 혹여 놈들에게 당할까 한 팔을 들고 마법을 쏘아 낼 태세를 갖추고 있던 이서희는, 결국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백을 넘는 숫자의 몬스터들이 전멸할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할 필요가 없었다.
[키히이이이이이이! 이, 인간!]
[인가아아안!]
“그래그래, 많이 기다렸죠?”
[꾸겍!]
몬스터들 중 걸어 다니는 도마뱀들은 제법 강했다. 그것은 ‘정시우의 주먹에 얻어맞고 사체가 얼마나 원형을 보존할 수 있는가’로 판단한 결과였다.
기이한 점이 있다면 유독 그놈들을 해치우고 나면, 사체에서 금색의 빛이 튀어나와 정시우의 왼쪽 손등에 있는 문양으로 빨려 들어왔다는 것이다.
[소울 컬렉트 스킬이 Lv4가 되었습니다. 보유 영혼 18개]
“흐음…….”
정시우가 손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이서희가 마력을 회수하며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동그랗게 뜬 두 눈만 보아도 얼마나 그녀가 놀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시우 너, 대체…… 하아.”
이서희는 그에게 따지고 싶은 말이 무수히 많았지만, 끝내 어깨를 늘어트리며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안 다쳤어?”
“멀쩡해.”
“하긴 그래 보이네.”
그래, 생각해 보면 그녀는 정시우의 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그가 전력을 내는 것을 볼 기회는 없었다. 그가 운동을 좋아하며 무술에 통달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끔찍하게 생긴 괴물들을 상대로도 거침없이 주먹을 찔러 넣는 담력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다.
이전에도 그가 이런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면, 자신이 당연히 플레이어가 되리라 여기는 것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보다 플레이어에 어울리는 인간은 단언컨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이 남자를 플레이어로 만들어도 괜찮은 것일까. 지금도 괴물인데 대체 플레이어가 되면 얼마나 더 끔찍하게 강해지는 것일까.
순간적으로 플레이어가 된 이후로 던전에 매진했던 자신의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진 이서희였으나, 그와 동시에 정시우가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을지 기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시우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절망하는 모습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더구나…… 으으음.’
이서희는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 냈다. 어쨌든 모든 일은 정시우를 플레이어로 만들고 난 뒤에 생각해도 되는 일이었다. 그녀는 어디서 꺼냈는지 물티슈로 자신의 주먹을 슥슥 닦으며 하품을 하는 정시우를 보며 쓴웃음을 짓곤 말했다.
“바깥세상에서 사냥한 몬스터의 사체는 신소재로 취급되어 비싸게 거래되니 자신이 사냥한 건 확실히 챙겨야 해. 특별히 강한 놈들은 사체 내부에 마석이라고 불리는 결정을 갖고 있기도 한데, 이건 더 비싸고. 이쪽은 조금 고급 정보. ……이건 비밀이지만 우리도 이번에 신전을 지키고 있던 가디언을 처치하고 하나 얻었어.”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일로 바쁘니 일단 사체는 한꺼번에 인벤토리에 회수했다가 나중에 처분하자, 고 말하며 이서희가 사체들을 회수했다.
정시우는 이미 몬스터들이 마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별로 레벨이 높지도 않은 몬스터의 사체에는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길드를 운영하는 이서희에게는 자원 하나하나가 의미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해 굳이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들어가 보자.”
“길드장님!”
정시우의 한 팔을 잡아끌고 결계 안으로 들어가려던 이서희의 움직임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눈썹을 치뜨며 뒤를 돌아본 그녀는 그녀보다 더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다섯 명의 사람, 그녀의 길드 멤버 중 일부와 마주하게 되었다. 정시우를 상대하며 짓고 있던 봄바람 같은 미소가 순식간에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너희가 여기 왜?”
“우리 신전에 수상한 사람이 들어갈까 걱정이 되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아니나 다를까, 지금 이렇게.”
“뭐?”
사람들의 적의가 오롯이 정시우에게 향했다. 정시우가 걱정하던 그대로 일이 전개되는 순간!
좋아,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복선 마스터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나중엔 미래예지가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싸늘한 현 상황과는 정반대로 정시우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꿈이 부풀어 올랐다.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내가…….”
“길드장님, 그래서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그 인간은 또 뭡니까?”
길드원 한 명이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 손에는 날카로운 도검이 쥐여 있었다. 동료를 향해 겨누어선 안 될 날붙이가 지금 그녀의 심장을 똑바로 노리고 있었다. 이서희도 끝내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꾸했다.
“내가 내 행동을 일일이 너희에게 설명해 줘야 해?”
“평소에 어디서 뭘 하시든 저희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이 신전은 아니지요. 설마 다른 길드에 알리신 겁니까? 신전을 감추자고 말한 건 길드장님이시면서?”
“이 신전을 다른 길드에 팔려고 한 겁니까? 어쩐지 우리는 얌전히 대기하고 있으랄 때부터 이상했는데…….”
음음, 실로 지당한 의문이고 추궁이다. 자길 닮아 똑 부러지는 길드원들을 두고 있구나. 정시우는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나 이서희는 이 상황 자체를 어이없어 하고 있었다.
“우리 길드의 그 누구보다도 이 신전에 대한 권리를 많이 가지고 있는 내게 너희가 그렇게 따질 처지는 아닐 텐데?”
“신전은 우리 길드 전원의 것이 아닙니까!”
분위기가 점차로 고조되는 가운데, 정시우는 이서희에 비해서는 제법 많이 쳐지는 길드 멤버들의 수준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천천히 전신 근육의 긴장을 풀어 주고 심호흡을 했다. 몬스터가 아니다, 그러니 죽이면 안 된다고 되뇌며.
“신전을 팔아넘기겠다는 것도 너희가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신전에 대해 갖고 있는 내 정당한 권리를 다른 데에 쓰려던 것뿐이야. 그런데 너흰 대체 지금 어째서 날 추궁하는 거지……?”
“거짓말! 거짓말이다!”
“우리한테는 왜 내려가라고 했던 건지 불어! 신전의 힘을 독차지하려고 했던 거지!”
그의 코를 시큼하게 톡 쏘는 적의를 느끼며 정시우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신중하게 조금 더 두고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에게 신의 힘은 필요가 없는 만큼 한발 물러서며 친절하게 해명을 할 생각까지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글렀다.
“너희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듣고 생각을 해 보란 말이야!”
“왜긴, 머리가 돌아 버렸으니까 그렇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당황하는 이서희를 보다 못한 정시우가 심드렁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그녀는 단지 길드 멤버들이 오해를 하고 있을 뿐이며 대화로 풀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듯이 보였지만, 전투와 관련된 모든 것에 민감한 정시우만은 그들의 기세만 보아도 확연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이놈들에게 논리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108배를 올릴 기세라던 이서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놈들은 이미 신의 힘에 제대로 미쳐 버리고 말았다.
“그건 우리 거야.”
“애초에 전선에 나서지도 않는 주제에 길드장이라면서 가장 많은 지분을 요구할 때부터 거슬렸어.”
“그게 무슨, 내 결계가 아니었으면 너희는 이 근처에도 못…….”
“시끄러!”
정시우는 지금 집단 광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충분한 교육을 받고 자라난 21세기 현대인이라고 해도 실체화된 신의 힘에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정시우도 아주 조금은 무서워졌다. 전직 퀘스트를 겪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자신도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호, 혹시 신전에 내가 모르는 저주가 걸려 있었던 걸까? 그래서 지금 길드원들이…….”
“한가로이 분석하고 있을 시간 없어, 이서희. 이미 너를 공격할 준비까지 마치고 있는 거 안 보여?”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신전이 대단한 힘을 품고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같은 길드…….”
그 순간 정시우가 손을 이서희 앞으로 뻗었다. 그녀가 깜짝 놀라 움츠러든 직후, 그녀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든 단검이 정시우의 손에 단단히 붙잡혔다. 마나가 듬뿍 깃든 스킬이었으나 정시우의 피부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큭!?”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여기까지 끌고 온 길드 마스터를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죽이려 하네. 아니면 그거냐? 막아 낼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에 전력으로 찔렀다, 뭐 그런 거야?”
“이 새끼가…… 컥!?”
그는 한 손으로는 단검의 날을 태연스레 쥔 채, 그것을 붙잡고 끙끙거리는 남자를 발로 걷어찼다. 남자는 단검을 놓치고 몇 미터인가를 그대로 날아가 뒤에서 마법을 영창하던 다른 동료를 깔아뭉갰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카학!”
“나도 너희 잘 모르니까 쌤쌤이 치자.”
그는 자신이 걷어찬 남자에게서 빼앗은 단검을 가볍게 던져 반대쪽에서 피막 날개를 펼치고 빠르게 날아들던 남자를 제압했다. 왼쪽 다리를 관통당한 놈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을 구르며 신음을 내뱉었다.
남은 길드원들은 그에게 공격을 받기 전 날개를 펼치고 제각기 날아오르며 전세를 역전시키려 했으나, 그때쯤엔 이서희도 정신을 차리고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너희도 같은 뜻이야? 정말 신전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나를 공격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크, 큭……!”
원격으로 조종이 가능한 결계가 허공에 둥둥 떠 정시우와 이서희를 보호했고,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손에 머무르는 빛이 정확히 다섯 갈래로 나뉘어 길드원을 모두 조준하고 있었다. 수아린은 그것을 보며 다시 감탄했다.
‘마나로 동시에 방어와 공격을……. 정말 4년 전에 플레이어가 된 게 맞다면 몇 년 지나지 않아 던전 공략의 최전선에 서겠는걸.’
“다들 진정해! 내가 말을 하지 않고 이 사람을 데려온 건 확실히 경솔했어. 하지만 내가 혼자 신전의 힘을 취하려는 것도 아니고, 의심이 간다면 너희가 먼저 신전을 찾아도 좋아. 다만 그건 너희가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은 다음에 하는 게…….”
[크아아아아아아아!]
“크아아아?”
결코 정상인의 판단에서 나올 수 없는 행동이라 생각한 이서희가 어떻게든 길드원들을 진정시키려 하던 그때, 정시우가 가장 먼저 밀쳐 내 쓰러트렸던 남자가 괴성을 내질렀다.
드디어 이성의 끈을 놓아 버렸는가, 하고 정시우가 혀를 차며 눈을 돌리던 그때.
“잠깐만, 결계가……!”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서희가 신전에 쳐 둔 결계가 무너졌다. 그녀의 마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신력에 의해 내부에서부터 갈가리 찢겨,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조그마한 신전, 그 신전을 감싸고 있는 신비로운 푸른빛의 마나에 정시우는 어딘가 친숙함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변화는 그 직후 그들을 찾아왔다.
“도, 동일 씨!? 동일 씨! 천동일!”
[쿠고오오오가가가가각!]
길드원 중 한 명의 몸에서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