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61화.
둘은 바깥으로 나와 걸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차피 카페보다 길거리에 사람이 더 적어 주목받을 일도 없었다.
“해외라고!?”
“응. 우리나라는 몬스터 진압이 굉장히 빨리 된 편이잖아. 너도 알지? 그 중국집 라이더.”
“중국집 라이더…….”
무엇을 말하는지는 바로 깨달았다. 정시우는 자신에게 그런 별명이 붙었다는 사실에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괴로워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신이 그 쪽팔린 별명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들키게 되기에 필사적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얼굴을 이서희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니야.”
아니긴, 이서희는 지금 정시우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에게 연락을 한 것은 그가 플레이어가 될 방법을 알려 주는 것 외에, 혹시 그가 지난번 활약했던 바로 그 플레이어가 아닌가 확인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 아닐까.
만약 아니면 그녀가 아는 방법으로 플레이어가 되게 해 주면 되고, 그가 이미 플레이어가 되어 있었던 것이라면 얘기는 더욱 간단해지니까.
“그냥 너무 잘생겨서.”
“빈말.”
“정말.”
과거 그의 연인이었던 이서희가 TV에 나오는 정시우의 체격이나 행동거지를 보며 그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워낙 스스로의 마나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와 재회한 순간부로 그 의심을 반쯤은 접어 둔 채였다.
“어쨌든 그 사람 덕에 지금 한국에는 몬스터 대규모 서식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 그런데 대부분의 외국은 아니었거든. 그래서 지구에 정착한 몬스터들을 토벌하기 위해 우리 길드도 다른 쪽으로 지원을 자주 나가는 편이었는데…….”
이서희가 이끄는 길드, 자이언트는 일본의 홋카이도, 오타루 시의 텐구산에 자리 잡은 고블린 무리의 소탕을 위해 불과 5일 전 그곳으로 향했다. 고블린 무리는 텐구 산 전역에 퍼져 있었기에 자이언트 길드를 비롯한 몇몇 개의 길드가 출동했는데…….
“그곳을 처음 발견한 게 나였어. 안 그랬으면 차마 일본 땅에 있는 유적지를 넘볼 순 없었을 거야.”
산의 한 중턱, 무수한 나무에 의해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아주 작은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 그리고 그녀와 함께 하던 몇몇 길드 멤버들만이 그것을 발견했다.
이질적이고도 강대한 힘이 어린 그 신전에는 신의 힘을 독점하기 위해 그곳을 지키고 선 가디언이 있었고, 놈을 해치우는 데 성공한 이서희는 그곳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나를 따르면 몬스터들을 전부 짓밟을 수 있는 힘을 주겠노라’고 말이다.
“그거 완전 아서스가 서리한 뽑을 때랑 똑같은 상황 아니야!?”
“너도 가보면 그 힘이 진짜라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때 우리 길드 멤버들은 정말 신상에 대고 108배라도 드릴 기세였다니까?”
“거봐, 더 수상하잖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 답답하네.”
정시우는 점점 이서희가 다단계 영업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어린 총기나 몸 안에 감도는 순수한 마나만 보아선 아직 그 신이라는 것에게 현혹되지는 않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래서 나는 신의 목소리에 대고 직접 확인했어. 아직 플레이어가 되지 못한 이를 플레이어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느냐고. 거기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고……. 바로 너한테 연락한 거야.”
그런데 전화를 웬 이상한 여자가 받는 바람에 기분을 잡치고 말았다, 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정시우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일단 발견은 먼저 했다 치고, 그다음은? 신의 힘이 깃든 신전이라니, 다른 플레이어들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 같은데.”
“결계.”
이서희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어렸다.
“내가 다른 이들에 비해 상당히 늦게 플레이어가 되었음에도…… 크흠, 빨리 성장해 길드 마스터까지 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내 특수능력 덕분이야. 자랑은 아니지만 이쪽 분야에선 내가 세계 원탑이거든.”
아무리 봐도 자랑이었다.
“그 신전 자체를 결계로 감춘 거야, 그러면?”
“응. 설령 플레이어 중 가장 마나에 민감하다는 마리나 비셋이 근처에 와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그녀는 다른 쪽에서 바빠서 오지도 못하겠지만.”
마나를 잘 다룬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과연, 마리나 비셋은 단순히 사수이자 용병으로서만 유명한 플레이어는 아닌 모양이었다. 물론 그녀에 대해 아는 척을 해서도 안 되므로 정시우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고요했다.
“그래도 일본이라니 번거롭구만.”
“그냥 날아가면 되잖아?”
플레이어들이 얼마나 세상을 만만히 보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말에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허가 없이 국경을 넘는 건 제아무리 네가 플레이어라 해도 범법일 텐데.”
“후후, 들키지만 않으면 범죄가 아니란다. 내 능력은 무언가를 감추고 보호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어서 우리 둘 정도 숨기는 건 아무것도 아니거든.”
“뭣…….”
정시우는 이서희의 말을 들으며 정신이 아주 조금 아득해졌다. 분명 예전엔 성실한 모범생이었던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사회인이 되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인가.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자, 내 손 잡아.”
“설마 여기서부터 오타루까지 날아가자고?”
“정답.”
“끄응…….”
이서희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워 보였다. 수아린이 또 정시우의 가슴팍을 퍽퍽 때렸지만 손잡고 날아가기 싫다고 지금부터 홋카이도행 비행기표를 예약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정시우는 끝내 어깨를 으쓱하며 이서희의 손을 붙잡았다.
이서희의 작고 고운 손에 비하면 그의 손은 세 배 정도 컸다. 이서희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손 엄청 크네.”
“남이사.”
“으그극.”
수아린이 이를 득득 가는 가운데 이서희는 뿌듯한 미소와 함께 등 뒤의 날개를 펼쳤다. 형체가 뚜렷하지 않은 빛의 날개는 무수한 유리 결정으로 이루어진 듯이 다각도로 태양빛을 반사하며 찬란하게 빛났다.
“……예뻐라.”
“굉장히 드문 타입이군요.”
날개에도 희귀도 랭킹이 있는 모양이었다. 정시우는 그의 품속에서 지들끼리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서포터들을 툭 쳐 조용히 시켰다.
“그러면 출발하자.”
“어. 어?”
그때 이서희가 그를 자연스럽게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포근하고 따스한 감촉에 정시우는 아주 조금 당황했다. 이서희는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을 텐데!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행동을 대담하다 여겼는지, 이서희가 변명하듯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이렇게 하는 쪽이 안전하니까.”
“아무 말 안 했는데.”
“추, 출발할게.”
이서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과연, 그녀의 레벨이 상당하다는 것은 비행 속도만 보아도 확연했다. 용세하의 비행 속도보다도 빠르지 않을까? 그녀가 직접 몸을 움직여 싸우는 전투원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굉장한 일이었다.
“저, 저도 마나를 다 회복하기만 하면 형님을 모시고 훨씬 빠르게!”
“조용히 해욧.”
비행 속도가 너무 빨라 그녀와 손만 붙잡고 나는 것은 여러모로 위험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럴 거라고 설명을 해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위험하니까 꽉 붙잡아, 시우야.”
“오케이.”
“저 여자…… 어떻게든 오빠를 꼬시려고 작정을 한 게 틀림없어……!”
“선배님, 이 가는 소리가 저쪽에 들릴 것 같습니다.”
물론 은신을 하고 있었기에 두 서포터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들릴 일은 없었다.
정시우는 그렇게 이서희의 품에 안겨 한국 서울에서부터 홋카이도까지 무려 1,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리를 날아가게 되었다.
비행기에 탄 적도 제법 되고 바로 얼마 전 용세하에게 붙들려 유사 비행 체험을 한 적도 있지만, 전 여친의 품에 안겨 초장거리 비행을 하는 경험은 지나치게 특수했다.
“놓치면 나 상어밥 된다.”
“걱정하지 마. 더구나 너는 바다에 떨어져도 상어를 밥으로 먹을 사람인데 엄살은?”
이서희의 목적이 정시우를 두근거리게 하는 것이었다면 그녀는 성공했다. 플레이어의 힘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시우는 이서희의 가녀린 팔뚝이 과연 얼마나 그를 지탱할 수 있을지 불안해 가슴이 두근거렸으니까.
“너 왜 이렇게 몸이 두꺼워진 거야?”
“근육이 불었어.”
“또?”
반면 이서희는 그의 듬직한 몸에 두근거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을 앗기 위한 작전에 자신이 흔들리다니 이 무슨 자충수란 말인가! 무거워서가 아니라 심장이 떨려서 손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질 것만 같았다.
“후…… 후우우…….”
그리고 둘 사이의 대화를 듣는 수아린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살의와 증오와 당황 가운데의 어느 지점에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용세하는 그곳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히 도착의 순간만을 기다렸다. 넷 중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비행기보다도 빠른 속도로 하늘을 달린 이서희는 끝내 2시간도 지나지 않아 오타루의 텐구산에 도착했다. 정시우는 안전한 지상에 발을 디디고 나서야 후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경험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아.”
“돌아가는 길은 너 스스로 날 수 있을 거야. 반드시.”
이서희는 굉장히 뿌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날개를 접었다.
“나만 믿어. 자, 따라와.”
“그런데 네 길드 멤버들은?”
“일단 산 밑에 숙소에서 대기하라고 했어. 결계 주위에서 어슬렁대고 있는 모습을 다른 플레이어들이 발견하기라도 하면 수상하게 여길 테니까 말이야.”
“대기라…….”
정시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아까 이서희가 무엇이라 했던가. 신전에서 느껴지는 힘에 그녀의 길드 멤버들이 108배라도 할 기세라고 했던가. 그런 그들이 과연 순순히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래, 시우야?”
“아니, 아무것도 아냐.”
정시우는 자신의 생각이 기우이길 바랐다. 하지만 보통 소설에서 주인공이 이런 생각을 하면 꼭 걱정한 그대로의 사건이 터지던데, 하는 생각이 들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어라?”
그런데 앞장서서 산길을 걷던 이서희가 감지 범위에 신전을 감싼 결계가 들어온 시점에서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결계 인근 몬스터는 다 처치했을 텐데.”
“그런데 그 근처에 몬스터가 있는 거야?”
“응. 결계가 완전하지 못했나? 그럴 리가…….”
자연스레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정시우의 얼굴에는 묘하게 상쾌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당연하지만 그 역시 결계를 느끼고 있었고, 결계 인근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럼, 문제가 안 생겼을 리 없지.”
“문제가 생겼다는데 어떻게 그렇게 멋진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건지 오빠의 뇌 구조가 궁금할 정도네요…….”
“문제가 없으면 언제 일이 터질지 몰라 짜증나는데, 이미 문제가 생긴 상황이면 그냥 그것만 쳐부수면 되잖아.”
“그 간단한 걸 제가 몰랐네요!”
끝내 결계가 가시권에 들어온 시점에서 그들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비밀을 감춘 결계를 앞에 두고 정시우의 품에 있는 시크릿 다우저가 미친 듯이 진동하는 것이, 과연 신전의 가치는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캬아아아아악!]
[크갹! 캬칵!]
“이런……!”
문제는 결계 주위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달라붙어 있는 몬스터들의 존재였다. 오크며 고블린이 대다수였지만, 개중에는 뱀의 머리를 지닌 이족보행형 몬스터도 있었다.
[적! 신전을 노리는 적!]
[적이다!]
그들에게 걸려 있던 보호 결계 따윈 무시하며 곧장 그들을 인식하고 노려보는 몬스터들. 이서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안으로 모여드는 마력의 양은 과연 범상치 않아 수아린이 감탄할 정도였다.
“계산착오가 있었나 봐, 시우야. 일단 이것들을 다 정리할 테니까 잠시만 숨어 있어.”
“숨어? 농담을.”
이서희는 어디까지나 정시우를 보호하고 싶어 한 말이었지만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오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크하아아아아아크카그가각!]
그의 도발적인 태도에 화가 난 오크 한 마리가 발작적으로 고함을 내지르며 튀어나와,
“하.”
[키극!]
정시우의 주먹에 얻어맞고 머리통이 터져 나갔다.
“어, 너…….”
“잊고 있었나 본데, 서희야.”
정시우는 어지간한 플레이어들도 보이지 못하는 압도적인 폭력 앞에 멍해진 이서희의 모습을 보며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내게 날개가 부족했던 적은 있어도, 힘이 부족했던 적은 없어.”
정시우의 주먹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이서희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들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고, 정시우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짙어졌다.
지상에서 가장 시시한 학살극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