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57화.
“다른 플레이어들이 10단계 던전을 클리어하고 전직을 하게 되니, 얼추 레벨 균형은 맞네요.”
수아린이 아득한 표정과 함께 말했다. 대체로 플레이어들이 10단계 던전을 무난하게 클리어하고 전직을 하는 레벨이 85레벨 정도 되는데, 지금 정시우는 83레벨이었던 것이다.
“물론 형님의 힘은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만 말입니다! 이제 전직까지 하신다면 정말 세계최강이 될지도 몰라요!”
“왜 용세하 씨가 자랑스러워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잘됐어요. 전직 축하드려요, 오빠.”
순조로이 전직을 할 수 있게 되자 용세하도 수아린도 적잖이 안심한 기색이었다. 당최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알 수 없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선 공간에서 힌트 하나 없는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이 그들에게 피로감을 불러온 탓이다.
특히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적이 듀라한이 이끄는 언데드 군단이었으니, 이 이상 이곳에 있다간 또 얼마나 끔찍한 놈들과 마주하게 될지 차마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이젠 그냥 후딱 전직을 해치우고 휴식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직이야. ……수호자와 탐구자, 파괴자라.”
한편 정시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 가지 가능성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메시지는 분명 정시우의 행동으로 인해 가능성이 증명되었다고 했다.
수호자란 성벽을 지키듯이 언데드들과 대치한 데에서, 탐구자란 진실을 찾아 도시를 뒤지고 돌아다닌 데에서, 마지막으로 파괴자란 듀라한을 비롯한 언데드 군단을 철저히 깨부순 데에서 나온 것이겠지.
정시우가 고민 끝에 말했다.
“역시 파괴자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의표를 찔러서 탐구자도 좋지 않을까요?”
“약해 보이잖아.”
“진실에 접근할 가능성은 더 높아 보이잖아요.”
“형님, 저는 수호자라는 단어가 마음에 듭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성벽! 그 어떤 몬스터나 신이 지구를 노린다 해도 형님이 계시는 한 그들은 결코 제 뜻대로 하지 못할 겁니다!”
공교롭게도 셋의 의견이 다 달랐다. 하지만 탐구자, 수호자라…… 정시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한때 진실도 성벽도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공평하게 무너져 폐허가 되었다. 그가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파괴자를 선택하겠어.”
“뭐, 그럴 줄은 알았지만요…….”
“그쪽이 형님께 어울리기는 하지요.”
그의 성향은 분명하다. 탐구자와 수호자란 수아린과 용세하 개개인의 바람에 불과했다.
그는 걸리적거리는 것이든 걸리적거리지 않는 것이든 모든 부수어 버릴 것이다. 탐구할 필요도, 수호할 필요도 없게 만들 것이다.
그 파괴의 방향이 내부를 향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코 멸하지 않으리라.
[파괴자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힘을 각성합니다.]
그 순간.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끄으으으으으악!?”
정시우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바닥을 굴렀다. 지금의 그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마나가 그의 전신에 응축되었다.
마나는 이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것! 까딱하다간 공간의 일부가 비틀릴 정도로 막대한 양의 마나가 분별없이 마구 그에게 퍼부어졌다. 정시우는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이 활짝 열려 그 모든 구멍을 통해 불줄기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으그그극…… 원래 전직이, 이렇게 아프냐……!”
“그럴 리가요! 세, 세상이 녹아내리고 있어요. 아, 아니구나. 이 공간만 녹아내리고 있구나.”
“선배님, 어마어마한 기척이 느껴집니다. 이, 이건 설마…….”
전직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는 몰라도 이 세상에, 그리고 정시우에게 무척 불친절한 방식이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정시우는 무수한 마나가 그의 몸에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도저히 제정신을 찾을 수가 없었고, 그에게 마나를 내어주고 있는 세상은 아무래도 그게 그리 달갑지는 않은지 세리엔이 있던 일대에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저 멀리서부터 지금의 그들로서는 상대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다가오고 있기까지 했다.
[드디어…… 지구의……!]
정시우는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 애를 쓰느라 저 멀리서부터 말을 걸어오는 놈에게 잘 안 들린다고 투덜댈 여유도 없었다. 이미 그의 오감은 확실하게 맛이 가 있었다.
그동안에도 마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계속되었다. 세상의 동의를 얻지 않고 무턱대고 마나와 기록을 끌어오고 있었으니 그 후유증도 지대할 터이나 사실 정시우가 알 바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육신의 고통이 순간적으로 희미해지며, 정시우의 굳게 감아 어두워진 망막 위로 이런 글귀가 나타났다.
[레벨이 2 올랐습니다.]
그것 참 좋은 일이군. 85레벨로 딱 떨어지니 보기도 깔끔하고 말이야.
정시우는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쓰게 웃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존재마저 잊게 만드는 이 고통이 어서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것이 전직의 일부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사전준비, 재료(마나)를 용기(정시우)에 붓는 과정일 뿐이었다. 이것이 끝난 다음엔 마나를 기반으로 그의 영육을 개변하는 과정이 기다리겠지. 차라리 의식을 놓아 버리는 쪽이 더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또 지는 것 같아서 싫었다.
[무지는 용감 스킬이 Lv8이 되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고통에 저항력이 생깁니다.]
실로 적절한 타이밍에 그를 약 올리듯 무지는 용감 스킬이 성장했다. 저 스킬의 성장 포인트는 무지일까, 용감일까. 어쨌든 고통이 한결 버틸 만해졌으니 다행이었다.
문득 입이 열렸다.
“후, 하아, 하아…… 빌어먹을……!”
무지는 용감 스킬의 레벨 업과 동시에 완전히 잊혔던 그의 오감이 아주 조금, 돌아왔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정시우는 지금 이 순간의 느낌조차 나중에 오감을 패시브 스킬로 만들 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의미로 본다면, 그의 인내와 열정은 광기에 가까웠다.
“……오…… 오빠……!”
“형님, 저…… 괴…….”
수아린과 용세하가 그에게 무어라 외치고 있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순간, 생전 기억에 없는 여자의 목소리가 똑똑히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네놈을 지금 끝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정시우에게 마나를 빨린 일대 공간이 완벽하게 무너졌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퇴출되어 지구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정시우의 휴식처 안이었다.
하지만 정말 지옥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으그가가가가각!”
처음 지하 플레이어로 거듭나던 순간이 이에 비할 수 있을까? 정시우의 전신에 응축된 마나가 한순간 그의 전신으로 퍼져, 그것을 다시 한 점으로 끌어당겼다. 그것이 반복되며 그의 몸이 구겨지고 비틀렸다.
“꺄악, 오빠가!”
“진정하세요, 선배님! 형님은 단지 전직 과정에 계실 뿐이니 죽지는 않으실…… 그보다 우리 육신에도 변화가!”
정시우의 육신이 엉망진창으로 뒤틀렸다. 당장 죽어 버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만큼 끔찍한 고통이 다시 한 차례 그를 괴롭혔으나 정시우는 그것을 아득바득 버텨 냈다. 기껏 듀라한과 싸워 이겼는데 전직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쇼크사라니 웃기는 것도 정도가 있었다.
‘큭…… 카하!’
그때 심장에서 시작된 고밀도의 마나의 격류가 그의 감각을 일깨웠다. 죽은 마나와 세포를 모두 집어삼켜 태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성질로 거듭나 육신을 재창조했다.
정시우의 육신은 스스로에게 불필요한 부분을 모두 벗어던지고 마나를 빨아들여 스스로의 모습을 바꾸었다. 뼈가, 피가, 근육이, 살점이, 피부가, 그의 육신을 이루는 모든 것이 힘을 발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었다.
“후…… 흐아아……!”
육신을 재구축한 마나는 그 기세를 몰아 그의 전신에 퍼진 패시브 스킬과 액티브 스킬을 휩쓸었다.
그 모두를 새로이 거듭난 육신에 맞게 강화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마나가 이젠 그의 전신을 내달리며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렸다. 그 누구도 재현할 수 없는 마나의 회로, 바로 액티브 스킬이었다.
그것으로 드디어 플레이어 그 누구보다도 격렬했던 정시우의 전직이 마침표를 찍었다.
[펼쳐진 길도, 지나온 길도 당신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부순다는 행위 그 자체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신이 가장 험난한 길, 위대한 길을 걷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스테이터스와 스킬이 큰 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플레이어 스킬 괴력(액티브)을 익혔습니다.]
정시우는 눈을 떴다. 눈앞에 수아린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얼굴이 보였다. 새삼스레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수아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에게 말하고 있었다.
“저 보여요, 오빠?”
“……왜 인간 사이즈냐?”
“보이는구나. 다행이다…….”
수아린은 그제야 정시우에게서 떨어졌다. 정시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몸을 일으키려다가는 자신이 나체 상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아린이 새삼스레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옷부터 좀 입으세요. 설명은 그다음에 드릴게요.”
“으으, 알겠어. 몸이 좀 커진 것 같은데…… 세하는?”
“저 여기 있습니다, 형님.”
급한 대로 청바지와 셔츠를 걸치며 용세하를 찾고 보니, 그는 수아린과 마찬가지로 정시우의 바로 근처에 있었다. 녀석 또한 인간 사이즈였다. 나비 날개가 무척이나 화려하게 빛났다.
“그래서 너희 다 왜…… 음?”
정시우는 그제야 휴식처가 제법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마치 비드를 소모해 레벨을 올린 것처럼 내부공간이 확장되어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전직에 맞추어 휴식처 또한 다시 한 번 레벨이 오른 것이 맞았다.
그는 휴식처의 상태를 확인하곤 수아린과 용세하가 왜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휴식처 Lv4 ? 이 안에서 스킬과 스펠을 구사해도 마력과 체력이 소모되지 않는다.]
“아하, 그래서…….”
“네. 이 안에서라면 얼마든지 원래 모습으로 지낼 수 있게 된 거죠. 오빠의 전직과 맞추어 변화하다니 역시 휴식처는 단순한 공간이 아닌 게 분명해요. 저희한텐 고마운 일이지만.”
수아린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한 바퀴 빙글 돌아보였다. 사제복이 아니라 흰색의 원피스였는데 그것이 동그란 눈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다. 등 뒤에 새하얀 깃털날개까지 달고 있으니 정말 천사처럼 보였다.
“쩌네……. 그보다도 너희도 좀 바뀌지 않았냐?”
“서포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비록 형님처럼 격렬한 변화는 없었지만, 그래도 저희도 제법 강해졌어요. 과거 10단계 던전을 클리어하고 전직하던 당시보다도 더욱요.”
용세하는 무척 뿌듯해 보였다. 리타이어해 소멸하던 때의 우울한 표정과 비하면 천양지차였다.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희망, 그것이 지금의 용세하에게서 느껴졌다. 조금 부끄러워진 정시우는 녀석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곤 몸을 완전히 일으켰다.
몸이 지나치게 가벼웠다.
“이러다 날아갈 수도 있겠다…….”
“익히 예상은 했지만 정말 너무 강해지셨어요. 이젠 정말 어디 가도 맞고 다니진 않으시겠네요.”
“글쎄다.”
물론 지구에서는 그렇겠지. 하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어떨까. 예컨대 정시우의 뇌리로 직접 말을 걸어왔던 그 여자를 상대로 한다면…… 정시우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스스로도 실없어 웃고 말았다.
“탐구자는 때려 쳤지, 참.”
무엇이 나타나건 전부 부숴 버리겠다며 파괴자의 길을 고르지 않았던가. 그런데 벌써부터 넘을 수 없는 목표를 상정해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 부순다. 부수지 못하는 것은 힘을 키워 부순다. 정시우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좋아, 점검해 보자.”
그리고 스테이터스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