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55화.
유령마가 허공을 밟고 내달렸다. 정시우는 성벽 위를 내달려 놈에게 마주 돌진하며 손의 망치를 강하게 쥐었다. 크루얼 차지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속도는 듀라한 쪽이 더 빨랐다. 말할 필요도 없이 유령마 덕분이다.
“나도 유령마 갖고 싶다!”
[인간에겐 주어질 수 없는 것, 포기해라.]
듀라한의 도끼에서 음산한 검은 마나가 피어올랐다. 도끼에 부여된 마나가 무기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정시우가 지닌 마나양으로는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기예였지만 그는 현혹되지 않았다. 결국은 무기가 강화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에.
“흐아아아압!”
그렇게 정시우가 내지른 망치와 놈의 도끼가 맞부딪히는 바로 그 순간, 돌연 정시우가 나머지 한 손에 인벤토리에서 꺼내 든 다른 망치를 쥐고 놈의 몸통을 거세게 후려쳤다.
[뭣!?]
설마 한 손에 하나씩 슬레지 해머를 쥐고 날뛰는 인간이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듀라한은 기습에 정통으로 얻어맞아, 그대로 유령마 위에서 내동댕이쳐지고 말았다. 절호의 일격이라 불러도 좋았다.
[큭, 인간……!?]
“좋아, 일단 조건을 공평하게 맞춰 보실까!”
이어지는 정시우의 움직임은 실로 번개와도 같았다. 주인을 잃은 유령마가 본능적으로 정시우를 밀치고 듀라한을 향해 달려가려는 그때 놈의 움직임을 읽어 내고, 거랑의 앞발로 놈의 머리통을 내려친 것이다!
[키히이이이이이이이!]
강타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유령마는 그대로 소멸했고, 그 자리에는 검은 금속에 뒤덮인 마석 하나만이 남았다. 역시 듀라한의 애마답게 놈이 남긴 마석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나의 애마를!]
“정정당당하게 싸워야지, 안 그래?”
[노오오오오오옴!]
정시우는 마석을 곧장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며 히죽 웃었다. 듀라한이 분노에 찬 고함을 내지르며 도끼를 휘두르자 그 끝에서 뻗어 난 검은 마나의 참격이 곧장 정시우에게 쇄도했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경악하고 말았다.
“저런 게임 같은 기술이 실존했다고!?”
마나의 형태로 따로 떨어져 나왔음에도 무기의 속성과 예기를 그대로 품고 있는 충격파! 단순한 마탄의 변형이 아니다. 그보다 아득히 상위에 위치한 기술이었다.
“저도 처음 보는 스킬입니다! 마스터가 연구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굉장해!”
“감상하고 있지 말고 피해욧!”
그러나 정시우가 기겁하며 몸을 내던져 그것을 피한 직후, 이번엔 그의 눈앞에 시커멓고 둥그런 무엇인가가 들이닥쳤다. 정시우는 그것에 가슴팍을 얻어맞고 나서야 그것이 놈의 머리통이었음을 깨달았다.
“커헉!”
[듀라한의 분노를 받아라!]
설마 제 머리통까지 내던져 공격할 줄이야! 아찔한 충격의 와중에도 그것을 붙잡아 으스러트리려 한 정시우였으나, 놈의 머리통은 정시우를 효과적으로 공격한 직후 다시 놈의 손아귀로 돌아갔다. 자동귀환 능력이라도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죽어라!]
“큐어!”
그대로 정시우를 끝내 버릴 기세로 돌진하는 듀라한! 본능적으로 갈비가 부러졌음을 느끼고 긴장한 정시우였으나, 그대로 행동불능이 되어 듀라한의 도끼에 목이 날아가는 일은 없었다.
듀라한이 만만치 않은 적임을 깨닫고 치유 마법을 준비하고 있던 수아린이 곧장 그의 상처를 완치시켰기 때문이었다.
“흡!”
[큿!]
늦지 않게 정상으로 돌아온 정시우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듀라한을 피해 몸을 날리는 데 성공했고, 듀라한의 도끼는 애꿎은 성벽만 부술 뿐이었다. 그렇다. 바로 조금 전 놈의 참격이 강타했던 바로 그 성벽을.
“형님! 저 놈이 기어이 성벽을……!”
“이런 망할.”
검은 반월의 참격에 이어지는 도끼 강타에 끝내 내구도의 한계를 맞이한 성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성벽에 달라붙어 올라오던 언데드들까지 추락했지만 듀라한은 더 이상 부하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애마를 잃은 놈의 분노는 실로 거대했다.
[하하, 춤을 제법 멋지게 추는구나!]
“씁!”
성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며 발판이 불안정한 가운데, 정시우는 재차 그에게 들이닥치는 도끼를 간발의 차로 피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놈의 도끼와 정시우의 신형이 교차되는 순간, 그는 마나를 부여한 거인의 비명을 투척 강타의 형태로 내던졌다. 망치가 노리는 것은 머리통을 쥐고 있는 듀라한의 팔!
[뭣…… 크헉!?]
마나와 조화된 육신에서 비롯되는 정시우의 힘은 듀라한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레벨이 낮다고 해서, 지닌바 마력의 양이 적다고 해서 경시할 수 없는 것이다.
거인의 비명이 놈의 팔을 강타하는 순간, 와그작 소리를 내며 놈의 팔이 갑주와 함께 기묘하게 비틀렸다. 동시에 놈의 손에 들려 있던 머리통이 떨어졌다!
[힘 하나는 강하구나!]
“네 머리통도 제법 단단해!”
그대로 머리통까지 부숴 버릴 작정이었으나 놈의 머리통은 성벽 위를 구를 뿐이었다. 정시우가 급한 대로 마탄을 쏘아 내려던 바로 그때 기어이 성벽이 통째로 무너지며 둘의 몸이 사이좋게 허공에 붕 떴다.
날개도 없는 자들이 감히 하늘을 탐했으니, 남는 것은 추락뿐!
[재롱은 즐겁게 보았다만 여기까지다.]
듀라한은 지금이야말로 정시우를 끝장낼 찬스라고 생각했다. 허공에서 자유로이 마나를 활용한 참격을 날릴 수 있는 듀라한과 그대로 떨어져 내릴 수밖에 없는 정시우, 둘 중 누가 유리한지는 안 봐도 블루레이!
[내 의표를 찌른 기지와 그 무식하리만치 강한 힘만은 인정해 주마. 하지만 이 세상은 마나가 지배하는 세상, 마나에서 밀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놈은 자신보다 위에서 떨어지는 정시우를 향해 있는 힘껏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가 지나가는 궤적을 따라 생겨난 검은 반월이 허공으로 솟구쳐 정시우를 노렸다!
하지만 듀라한이 승리를 확신한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허공에 날개 달린 남자가 나타나 정시우를 잡아끌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참격은 그들을 허무하게 지나쳐 허공으로 사라질 뿐이었다.
[뭣!?]
“형님, 지금입니다!”
인간 사이즈로 돌아온 용세하에게 붙들린 채 정시우는 자신의 망치를 거세게 쥐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각성을 이루어 낸 그의 애병. 이제 비로소 망치가 담고 있는 옵션을 써먹을 때가 왔다.
“커져라!”
“꼭 그렇게 외쳐야만 할까요!?”
거대한 태양이 떠올랐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실로 거대하고 밝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듀라한은 그것이 정시우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망치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단지 그것이 지나치게 거대해지고, 그 끝에서 환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는 점만이 달랐다.
“끄으으아아아아, 무거워요, 형님!”
“놔! 아예 날 저놈한테 던져!”
“끄으으으읍…… 하아!”
용세하는 온 힘을 다해 정시우를 듀라한 쪽으로 내던졌다. 그는 마치 로켓처럼 듀라한을 향해 쇄도하며 양손으로 있는 힘껏 망치를 부여잡았다. 거대화한 거랑의 앞발의 무게는 정시우의 상상을 초월했지만, 어쨌든 쥐고 휘두를 수는 있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뒈져라!”
[고작 그 정도로 내가 죽을 줄 아는가!]
정시우는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허공에 짙은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 듀라한의 전신을 강타했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반동으로 인해 정시우의 몸이 허공에 다시 떠오를 지경이었다.
[쿠학!]
듀라한은 그대로 지상에 처박혔다. 하지만 스스로 말한 대로 놈은 죽지 않았다. 전신의 갑주가 으스러지고 놈의 영육을 이루는 마기가 새어 나오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놈에겐 움직일 힘이 남아 있었다.
[죽여 주마.]
세트나크의 힘을 빌어 육신을 회복시키며 듀라한이 울분에 차 외쳤다. 비록 머리통도 잃어버리고 갑주도 으스러졌지만, 아직 놈에겐 짙은 마기를 품은 도끼가 남아 있었다. 일어서서 휘두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놈을 쳐 죽일 수 있으리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세트나크의 축복을 네 몸에 새겨 주마!]
“후우.”
한편 망치의 반동으로 인해 허공에 떠오른 정시우는 역할을 다한 망치를 빠르게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다른 무기를 꺼내었다. 그것은 바로 뇌신의 라이플이었다.
“하지만 이것까지 하면 확실히 죽을 거야, 그렇지?”
[그건…… 설마 라이아……!]
놈은 뇌신의 라이플에 모여드는 마나를 확인하고는 두 눈을 부릅뜨며 버둥거렸지만 놈은 아직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도끼를 휘둘러 참격을 쏘아 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주 조금만, 5초만 더 있었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시우는 더 이상 놈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스타 라 비스타!”
[카그아아아악!]
정시우의 남은 마나 모두를 빨아들인 크리티컬 불릿이 뇌신의 라이플의 총열을 타고 강화된 끝에 빠르게 쏘아 내져 듀라한의 몸통을 강타했다.
놈은 체내의 마기를 집중시켜 그 기운에 대항하고자 했지만 무리였다. 놈이 이해할 수 없는, 아직은 힘의 주인인 정시우조차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권능이 놈의 마기를 전부 새하얗게 태워버리고 만 것이다.
[이럴 수가, 지구의 인간 따위가 어째서 저, 런……!]
마탄이 놈의 모든 것을 깔끔하게 날려 먹은 다음 순간. 놈은 조금 있어 보이게 등장하지만 퇴장만은 허무한 악역 모두가 그러하듯 놈은 뒤가 궁금해지게 만드는 대사 몇 줄을 마지막으로 소멸하고 말았다.
[레벨이 4 올랐습니다!]
[크리티컬 불릿 스킬이 Lv7이 되었습니다!]
[강타 스킬이 Lv27이 되었습니다!]
“후우.”
한순간의 전투였지만 정시우 생애 최고로 긴장되는 전투였다. 만약 검은 반월의 참격에 조금이라도 당했더라면 죽어 나가는 쪽은 듀라한이 아니라 정시우 본인이었으리라! 그는 듀라한의 몸통이 깔끔하게 소실되는 것을 확인하며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대로 추락했다.
“아차, 나 날개 없었지이이이이이이!”
“지금 갑니다, 형님!”
아직까지 인간 사이즈를 유지하고 있던 용세하가 필사적으로 날아들어 정시우를 붙잡고는 바닥에 착지했다. 간발의 차였다.
“후우, 살았다.”
“형님, 놈이 남긴 마석이 있네요.”
정확히 듀라한이 있던 자리에 착지한 그들은 최우선적으로 듀라한이 남긴 마석을 확보했다. 갑주며 놈의 몸통은 완벽하게 파괴되어 있어 수거할래도 수거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마력 5 정도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세계란 정말 좋은 곳이구나.”
“전리품을 수거하는 건 당연한 권리지만…… 오빠, 지금은 그 마석에 좋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
[크구가가가가각!]
정시우가 고개를 들었다. 한때나마 도시를 보호하고 있던 성벽이 완벽하게 무너져 내리며 그 잔해를 짓밟고 도시로 쳐들어오는 언데드 군단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정말 그럴싸한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이지 않은가!
[세에트나아크으으으으으!]
[인간, 인간에게…… 세에트나크의 은총으으으을……!]
“저놈들은 보스를 잃어도 움직이는 폼이 어째 똑같냐.”
“일단 저것들을 마무리하고 생각하죠.”
하지만 놈들의 지휘자가 없어진 이상 정시우보다 약한 언데드가 몇 만 마리가 있건 그것을 처리하는 일은 어려울 일이 없다. 하물며 학살과 상잔으로 숫자가 터무니없이 줄어든 지금의 놈들을 상대로 한다면!
그는 이전의 크기로 돌아온 거랑의 앞발을 쥐고는 언데드들을 맞아 달려 나갔다.
“생각해 보니 거인의 비명도 되찾아야 해! 아, 아까 잡은 둠 나이트의 마석도!”
“앗, 저기 엘리트 구울!”
“흐아!”
정시우는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망치를 휘둘러 언데드들을 부수었다. 놈들 중에는 아직까지 합체 진화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놈들도 있었지만 지휘관을 잃는 바람에 이성까지 덩달아 잃고 날뛰는 놈들이 대다수였고, 그런 놈들은 정시우의 망치 휘두르기 한 번에 쓸려 나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구울들이 저쪽에서 또다시 합체하고 있어요!”
“저 많은 것들 다 죽이기도 귀찮다. 그냥 합체하게 놔둬!”
“아, 저기 둠 나이트의 마석! 좀비가 먹으려고……!”
“뭐!?”
둠 나이트의 마석만은 필사적으로 확보한다! 아직 미완성이어서 허접했을 뿐 힘의 크기로만 따지면 듀라한에 아주 살짝 못 미치는 정도였던 놈의 마석을 다른 누군가가 집어먹어 또다시 각성이라도 한다면 괜히 쓸데없는 일을 늘리는 셈이 되리라!
“어, 저기 또 뭔가 있는데.”
그런데 둠 나이트의 마석을 확보한 정시우는 마침 그 근처에 보이는 전리품을 회수하려다 말고 응? 고개를 갸웃하고 말았다. 적당히 크기가 있고, 마나가 많이 뭉쳐 있어 아티팩트이겠거니, 했는데…….
“뭐야 이거.”
어째 많이 익숙한 흑색의 투구. 그 안에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빌어먹도록 단단하면서도, 많은 마나가 결집되어 있는 것만 같은 이 든든함……!
“듀라한의 머리통이잖아!”
“마나와 기록이 들어와서 레벨 업까지 했는데 설마 이게 남아 있었다니, 설마 몸통이랑 머리랑 별개의 몬스터인 건 아니겠죠!?”
“아니, 잠깐만. 내 망막에 지금…….”
[케이나의 악의]
수아린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듀라한의 머리통은 살아 있는, 혹은 죽어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티팩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