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52화.
정시우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실로 거대한 숲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지구의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거대한 나무들과 기화요초, 그 위를 하늘하늘 날아다니는 듣도 보도 못한 나비들까지.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두운 동굴 안에 있었기에 그 갭이 더더욱 강렬했다.
“여기가 어디지……?”
“일단 지구 환경은 아닌 듯싶네요.”
“지구도 개미굴 던전도 아녜요. 그나마 가까운 게 있다면 하늘성 던전입니다. 높은 단계의 던전에 들어가면 정말 이세계로 온 것만 같거든요.”
옛날 한창 유행하던 이계진입 판타지가 꼭 이런 환경에서 시작했었다. 정시우는 이제 저 나무 틈에서 그에게 화살을 겨누는 엘프 한 명만 나타나면 완벽해질 텐데, 하고 멍하니 생각하다가는 이내 뭔가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아무것도 안 알려 주지?”
“어…… 그러게요?”
“인터페이스가 이럴 리 없는데.”
던전에 입장했다면 입장한 대로, 퀘스트가 주어졌다면 주어진 대로 그의 망막에 나타나는 문구가 있어야 정상이다. 정시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혹시 자신이 놓친 것이 있나 살폈지만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시험의 일부다! 같은 느낌인가…….”
“이곳에서 뭘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데요?”
“너무 막연하군요. 일단은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게…….”
“아니, 그건 안 될 일이지.”
셋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역시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곳에만 머무르고 있을 수도 없다. 정시우는 숲을 빠져나가기로 결심했다.
“숲을 나가면 분명 이세계인들이 ‘이방인인가?’ 하고 경계하다가도 마을에 타이밍 좋게 들이닥친 몬스터들을 내가 막아 내는 것을 계기로 내게 호감을 갖고, 끝내 내가 이 사회에 용병으로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줄 거야.”
“소설을 너무 많이 읽으셨네요, 오빠. 글쎄 던전에 사람은 없다니까요.”
“이게 던전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러지.”
“그럼 설마 우리가 그 제단을 통해 이세계에라도 왔을까요…… 헉!”
말해 놓고 보니 하늘성도 개미굴도 있는데 이세계라고 없을까? 하는 생각이 수아린의 뇌리를 강타했다. 어쩌면 여태까지 그들 일행이 사냥했던 몬스터는 모두 이세계에서 넘어온 것일지도 모른다! 지구를 침략해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기 위해서!
“소설을 너무 많이 읽었구나, 아린아.”
“하지만 제가 읽은 소설들은 대체로 그런 패턴이었다구요!”
정시우가 어릴 때 읽었던 소설들은 이세계로 가는 건 있어도 이세계에서 몬스터들이 넘어오는 경우는 별로 없었는데,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세대 차이가 나다니. 그는 굳이 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숲을 빠져나와, 아무리 보아도 인간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정교한 성벽과 조우했다.
“발견했다. 역시 이세계가 맞다니까.”
“아뇨, 몬스터일 거예요. 높은 단계의 던전에선 몬스터들이 세운 건축물도 비일비재하게 나온다구요.”
“확인해 보면 간단합니다. 제가 정찰을 하고 올까요, 형님?”
정시우와 수아린이 대립하는 가운데 용세하가 나비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같은 미니 사이즈이지만 아무래도 근접 직업군인 만큼 수아린보다는 단단한 몸을 지니고 있는 그에게라면 정찰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
“좋아. 부탁하자.”
용세하가 곧장 나비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정시우는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용세하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는 문득 수아린에게 물었다.
“날개의 종류에 따라서 힘이나 특성이 달라지기도 해?”
“날개의 종류와 크기에 따라 속도가 다르다는 분석은 있지만 레벨이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그 차이가 미미한 수준이라……. 하지만 아무래도 날개 생김새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동질감을 갖기 쉽죠. 저처럼 하얀 깃털 날개를 얻은 플레이어들끼리 모여 만든 길드도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이거지.”
“네, 부질없어요. 중요한 건 날개가 아니라 마나니까요.”
그렇다면 꼬리도 그럴까. 정시우는 자신의 꼬리를 휘휘 휘둘러보며 생각했다. 도마뱀의 그것을 닮은, 붉고 단단한 비늘에 휩싸인 길쭉하고 두터운 꼬리. 다른 지하 플레이어가 있다면 비교라도 해 볼 텐데 그럴 수도 없으니 답답했다.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되면, 그땐 같은 지하 플레이어나 찾아봐야겠어.’
그리 머지않았다. 마나라는 새로운 힘을 얻은 육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었으며, 그의 전투 기술과 장비도 나날이 풍성해지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정점 중의 하나라는 마리나 비셋 정도는 금세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혀, 형님.”
그때 마침 용세하가 일행에게 돌아왔다. 그런데 어째 녀석의 안색이 그리 좋지 않았다.
“몬스터 소굴이었어?”
“차라리 그랬으면 좋았겠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도시가 죽어 있습니다.”
“히익!?”
도시가 죽었다는 말에 수아린이 비명을 지르며 정시우의 팔을 붙잡았다. 세리엔 공동묘지를 떠올린 것이겠지. 하지만 용세하가 말한 ‘죽었다’는 표현은 그것과는 다른 의미다. 정시우만은 그것을 바로 눈치챘다.
“아예 아무것도 없다고? 텅텅 비었어?”
“네. 굉장한 난동이 일어난 흔적은 있는데 정작 사람도, 하다못해 시체나 피의 흔적조차 없으니…….”
“쩝.”
차라리 몬스터라도 있어 주었으면 기분은 덜 찝찝했을 텐데. 정시우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니 행동에 거리낌은 사라진 셈. 일행은 성벽을 빙 돌아가 굳게 닫힌 성문의 존재를 확인했다. 직후 정시우의 해머가 그것을 산산조각 냈다.
“와오.”
그러자 용세하의 말마따나 사람 한 명 없이 휑한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딘가 익숙한 중세 유럽풍의 거리. 일행은 도시 안으로 들어서며 눈썹을 찌푸렸다.
“엄청 조용하네요…….”
“건물 곳곳에 내려앉은 먼지가 보이세요? 이대로 대체 얼마나 세월이 흐른 건지 짐작도 가지 않아요.”
도시에 있는 건물의 대다수는 낡고 삭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정시우는 죽은 도시를 멍하니 둘러보며 이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일단 세리엔 공동묘지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을 취해 볼까. 다 뒤져 보면 뭔가 나오겠지. 씁, 이런 일은 내 적성은 아닌데…….”
“네, 그러는 게 좋겠…… 잠깐만요.”
수아린이 그를 멈추어 세웠다.
“그냥 중세 유럽풍의 도시는 다 똑같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곳, 세리엔과 지나치게 닮지 않았어요?”
“뭐?”
“아, 그러고 보니…….”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낮이기도 하고, 건물의 상태가 달라 알아보지 못했지만 과연 이 도시는 세리엔 공동묘지의 모습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정시우는 몸에 살짝 한기가 도는 것을 느꼈지만 어째 수아린은 더 안심한 모습이었다.
“세리엔 공동묘지와 똑같은 곳이라면 역시 이곳도 던전이겠네요. 뭐가 숨겨져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지간 후딱 해결하도록 해요.”
“굉장히 포지티브한 해석이구나.”
하지만 과연 정말로 이곳이 던전일까.
끝도 없이 펼쳐진 세계와 유독 짙은 마나의 기척에서 정시우는 던전과 같은 느낌을 요만큼도 받을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그가 거쳐 온 그 어떤 던전보다도 이 세상에서 느껴지는 해방감이 컸다.
그렇기에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게 원본이라면 어떨까.’
개미굴, 아니 그 이전에 하늘성에 나타난 세리엔 공동묘지 던전의 원본이 이 도시라면? 하늘성과 개미굴의 던전은 단지 이 도시의 복사물에 불과하다는 가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정시우는 금빛의 제단을 통해 직접 이 도시에 당도한 것이고…….
‘물론 지금 시점보다는 한참 이전의 도시겠지만 말이야.’
뭐가 되었든 지금 시점에서는 추론에 불과하다.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본격적인 탐색을 개시했다.
비록 정시우가 들어가는 건물마다 그의 체중과 체구를 버티지 못해 무너진다는 단점은 있었으나 이제와 무너지는 건물 파편에 얻어맞는 정도로 다칠 정시우가 아니었다.
“내용물은 제법 달라.”
“이것저것 많이 없어져 있네요.”
“무너진다! 여긴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가요!”
그렇게 몇 채인가의 건물을 무너트…… 뒤진 끝에 드디어 용세하가 첫 실적을 올렸다. 들어가자마자 무너지는 건물 지붕 아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낡은 노트를 발견하곤 잽싸게 날아 들어가 그것을 빼내 온 것이다.
“형님, 새로운 것도 있습니다. 일기장 같은데요?”
정시우는 낡은 노트를 조심스레 펼쳤다. 그러나 그 안에 적힌 글을 보는 순간, 용세하가 눈을 부릅떴다. 실로 경악스러워하며 그가 외쳤다.
“전혀 모르겠어요! 이 꼬부랑 글자는 대체 뭐죠!?”
“그런 문제가 있었다니……!”
수아린도 좌절했다. 반면 정시우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기다리는 것은 성전. 우리는 죽음 앞에 물러서지 않고 싸울 것이다. 이미 새로운 세상으로 넘어간 동지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다. 위대하고 밝은 분 루이오스의 이름으로.”
“오빠……?”
왜냐하면 그는 노트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님, 설마 읽으실 수 있는 겁니까?”
“응.”
정시우 본인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문자를 당연하다는 듯이 읽고 발음할 수 있었다. 이고깽 판타지를 보면 꼭 이세계로 넘어가는 사람들의 의사소통 문제 해결을 위해 기본적으로 통역 능력이 부여되곤 하던데 딱 그 짝이었다.
“역시 이세계가 맞았다니까. 오랜만에 느끼는 이 주인공스러운 감각…… 나쁘지 않군.”
“대책 없이 포지티브하기만 한 건 대체 어느 쪽이람…….”
“형님, 혹시 무슨 스킬이 생긴다거나 하는 느낌은 없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너무나 당연하게 읽을 수 있어서 위화감이 들 정도였다. 혹시나 제단의 게이트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무언가 특수한 힘이 영향을 끼쳤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마땅히 짐작이 가는 것도 없었다.
“일단 더 읽어 볼게.”
“네, 네에.”
정시우는 노트의 나머지 부분을 쭉쭉 읽었다. 대부분은 본인의 결의나 가족에 대한 얘기 등등 시시콜콜한 얘기였지만, 중반부를 넘어가면서부터 필체가 지저분해지더니 마지막 장에 이르러 굉장히 절망적인 어투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세트나크의 신도가 부활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 봉인은 곧 풀릴 것이고 모든 것이 그녀의 의지대로 되리라.”
“전형적인 게임의 배드 엔딩 문구네요.”
“문장의 마침표 부분의 잉크가 밑으로 쭈욱 그어진 부분이나 그 밑에 피가 눌어붙은 자국까지 아주 완벽한걸요. 마지막 순간 습격 받았다는 사실을 암시함과 동시에 우리까지 등 뒤를 경계하게 만드는 장치죠.”
종합해 보자면 루이오스라는 뭔지 모를 놈의 이름을 내걸고 투쟁하던 인간들이, 세트나크의 신도라는 여자 때문에 폭삭 망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것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던 수아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루이오스, 들어 본 적이 있어요. 31단계 던전에서 그것과 관련된 흔적을 찾은 적이 있거든요…… 분명 그는 몬스터 부족에게 빛의 신으로 추종을 받던 존재였죠.”
“인간들도 그 신을 믿었나 보네.”
“서서히 이 전직 퀘스트의 정체가 보이는 것 같아요. 이 도시에서, 어쩌면 이 세계에서 있었던 두 신의 충돌에 대한 탐구! 그게 분명해요.”
던전에 들어가는 플레이어라면 그 누구나가 품게 되는 의문. 몬스터의 근원, 그들이 믿는 신의 존재, 지구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의 존재여부! 그것이 대놓고 정시우의 전직 퀘스트로 주어진 것이다.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가 그걸 탐구하고 싶은 것 아니고?”
“물론 그런 마음도 있어요!”
수아린의 당당한 선언에 정시우는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움직임의 방향성이 잡힌 것만은 기쁜 일이다. 곧장 다른 건물들을 뒤져 추가적인 단서를 찾아내야…….
라고 생각하던 정시우가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올려다본 하늘에 어느덧 먹구름이 끼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느껴지는 불길한 마나. 아아, 과연 익숙한 마나의 기척이었다.
“우리 추측이 틀렸나 본데.”
“틀렸다니요?”
수아린이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정시우는 근처 건물들 위로 펄쩍펄쩍 뛰어올라 그것들을 깨부수는 것을 대가로 이내 쉬이 성벽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봐.”
정시우가 손을 뻗었다. 그들이 지나온 숲과는 반대편, 반대쪽 성문을 나와 쭉 이어지는 도로. 그 끝, 먹구름이 뻗어 오는 지평선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숫자의 언데드가 몰려오고 있었다.
“역시 그냥 저것들을 다 쳐부수는 퀘스트였나 봐. 그럼 그렇지. 여태까지 내가 한 짓이 뭘 깨부수는 일뿐이었는데 전직 퀘스트까지 와서 고차원적인 일을 시킬 리가 없잖아.”
“…….”
정시우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수아린이 침묵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언데드가 너무 많아 순간적으로 기절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