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45화.
“이건 공동묘지가 아니라 그냥 도시가 통째로 죽어버린 것 같은데?”
“던전 이름 한 번 악취미네요……. 도시를 공동묘지라고 칭하다니.”
세리엔 공동묘지는 그간 정시우가 겪어온 던전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강화 오크의 군락도 물론 그가 이제껏 흔히 던전이라고 생각하던 동굴에서 많이 벗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이곳은 통로를 지나 넓은 곳으로 나온 순간 그에게 지상으로 나온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저건 던전 천장이 아니라 밤하늘로 보이는걸요…… 아, 환영마법이군요.”
“공간확장마법도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성의 거대 던전을 지하에 무리하게 끼워 맞추다 보니 일어난 일로 보이는군요.”
정시우는 수아린과 용세하의 설명을 한 귀로 들으며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뒤를 돌아보면 흙과 돌로 이루어진 던전의 통로가 있지만, 정확히 통로가 끝나는 순간부터 양쪽으로 건물들이 생겨났다. 아무래도 일행은 빽빽한 건물이 들어찬 뒷골목을 통해 이 도시로 나왔다……는 설정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무래도 이 도시엔 전부 좀비밖에 없는 것 같긴 한데, 그놈들을 다 쳐 죽이면 되는 거야?”
“그래서야 평소 오빠 방식이랑 다를 게 없잖아욧!”
[아닙니다.]
근처 건물에서 비틀거리며 튀어나오는 좀비를 지그시 노려보며 정시우가 내뱉은 말에, 유령은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 던전에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숫자에 이르는 좀비와 스켈레톤, 심지어는 그런 자들을 잡아먹고 구울이 된 자까지 있습니다. 한을 품고 죽은 이들의 영혼은 언데드들이 내뿜는 사기에 영향을 받아 레이스로 전락하고 말았죠. 도저히 한 개 규모 파티가 상대할 만한 전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밴시는 표면적으로 이들을 내세우고, 공동묘지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밴시를 감추어주고 있는 마법진을 찾아내 부수어야 합니다. 그러면 밴시가 모습을 드러낼 테고, 그것을 해치운다면 밴시를 따르고 있던 언데드 몬스터들 역시 약화될 것입니다.]
“음.”
어지간한 중소규모의 도시보다 거대해 보이는 이 도시를 모두 뒤져가며 밴시의 봉인 마법진을 찾아내란 말인가? 그것도 12시간 안에? 정시우의 안색이 미묘해지자 유령이 다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안심하세요. 제가 생존해 있었을 때, 이미 파티 멤버들과 함께 도시 탐색을 어느 정도 진행해놓았습니다. 지금 이 던전도 구조가 똑같으니 후보를 추려 탐색한다면 머지않아 마법진을 찾아낼 수 있을 테죠.]
정시우는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던전은 도시 하나가 통째로 몬스터 소굴인 던전이다. 만약 던전에 숨겨진 비밀을 모르고 들어온 이들은 무수한 좀비와 구울, 레이스의 위협을 어떻게든 피해가며 도시를 돌파해 보스 룸에 도달하겠지.
그러나 이 도시를 지배하는 몬스터가 밴시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온 이들이라면 몬스터들의 위협을 피해가며 은밀하게 행동하여 도시를 탐색, 도시 안에 봉인된 밴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줄 마법진을 찾아내 부수고…….
“뭐야.”
의외로 제법 간단한 결론이 나왔다.
“결국 다 부수면 된단 얘기잖아?”
[……네?]
유령이 잘못 들었습니다? 같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정시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말해주었다.
“이것저것 다 부수면 마법진도 부서질 테고, 그러면 밴시도 나타날 거 아니야. 내 말이 틀렸어?”
[어, 물론 그렇지만 이것저것 다 부수고 다니다간 언데드 몬스터들이…….]
언데드 몬스터들이 날뛸 것이다. 정시우 또한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주 좋아. 그게 바로 내가 가장 바라는 일이야.”
[…….]
유령이 말을 잃었다. 수아린은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 모두 알 바가 아닌 정시우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표정으로 인벤토리에서 슬레지 해머를 뽑아냈다.
스왑의 첫 단계, 바로 무기를 인벤토리에서 꺼내는 그 순간 바로 무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의식을 가볍게 집중하기만 하면 슬레지 해머의 손잡이 부분을 붙잡고 꺼내는 것이 가능했다. 이 정돈 수련하지 않아도 할 수 있었다.
“아린아, 일단 그 신성력인지 뭔지 줘볼래?”
“네네, 드려야지요.”
수아린은 슬슬 마스터해가는 체념의 정서와 함께 짧게 스펠을 외웠다. 그녀의 흑요석 같은 두 눈 중심부에 한순간 황금의 십자가가 어렸다. 직후, 정시우의 심장부에 이질적인 마나가 깃들었다.
[버프 스펠 ? 홀리 스트라이크의 힘을 얻습니다.]
[언데드를 상대할 때 데미지가 30% 상승합니다. 언데드의 독과 저주에 잘 걸리지 않게 됩니다.]
“뭐야 이거 개사기잖아? 사제 있으면 그냥 언데드 던전만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죽었다 깨어나도 싫어욧!”
수아린이 펄쩍펄쩍 뛰며 반대했다. 용세하는 그만큼 언데드가 강할 뿐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제가 없이는 언데드 던전에 도전하지 않는 것이 상책, 이쪽이 정답이지요.”
[사제의 힘을 지니신 분이었군요. 제가 도움을 못 드리는 것에 안타까웠는데…… 다행입니다.]
유령의 목소리에서 어딘가 회한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그녀가 지키지 못한 그녀의 파티원들을 생각하며 가볍게 우울해진 모양. 이러다가 팍 기가 죽으면 어느 순간 원혼이 되는 것이다. 개미굴 몇 번 돌았다고 정시우는 이쪽에 제법 요령이 생겨 있었다.
“이런 말 해봤자 기쁘진 않겠지만, 내가 모두 깔끔하게 정리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
정시우는 그녀를 적당히 달래며 망치를 들어올려, 그대로 그가 빠져나온 골목을 이루는 건물을 두들겼다. 콰아아아아앙!
“이게 무슨 짓이에요, 퇴로가 무너지잖아욧!”
“굉장합니다, 형님! 건물 벽을 두들겼을 뿐인데 그것과 연결된 건물들이 도미노처럼!”
[이럴, 수가…….]
그가 가볍게 내지른 망치로 인한 충격은 건물 한 채 무너진다고 해소될 성질이 아니었다.
직격으로 두들겨 맞은 건물은 즉각 가루가 되고, 그것으로도 미처 해소되지 못한 충격이 그 건물과 다닥다닥 붙어 있던 옆 건물, 그 옆 건물, 다시 그 옆 건물까지 순식간에 부수고, 부서진 건물의 파편들이 다시 다른 건물로 쏟아지며 두어 채인가의 건물을 추가로 무너트렸다. 그것이 그가 가볍게 내지른 일격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일격으로 일곱 채의 건물을…….]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해. 이 도시에 건물이 삼만 개 정도 있다고 치면 앞으로도 망치를 4천 번 이상은 휘둘러야 한다는 얘기잖아? ……어라, 가능하겠는데?”
“오빠…….”
정시우는 곧장 반대쪽 건물을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이번엔 그 앞과 옆, 뒤로 도합 열 채의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산산조각이 난 건물들이 돌과 나무의 파편이 되어 쏟아져 내리며 정시우 일행이 지나온 던전의 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렸지만, 어차피 정시우는 후퇴를 모르는 남자였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도 지금은 그의 망막 위로 떠오르는 알림이 더욱 중요했다.
[도시 안에 감추어진 마법의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해당 마법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도시를 탐색하며 힌트를 찾아야 합니다.]
“오.”
과연, 이 던전은 원래 이렇게 진행하는 것이 정석인가. 도시 곳곳의 건물에서 마법의 편린이나 함정을 발견해, 그것을 바탕으로 수색 범위를 넓혀가는 정석적인 탐정물의 구조!
물론 이제 와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가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수아린이 비명을 질렀다.
“오빠, 오고 있어요! 당연히 그럴 줄은 알았지만 역시나 엄청 쏟아져 나오고 있다구요!”
“이건…… 맙소사, 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이 여기서 죽어나간 거지?”
[어마어마한 수……!]
“흠, 결국 좀비는 저 정돈가?”
정시우는 좀비 영화를 즐겨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좀비들과, 그들에 필사적으로 맞서며 활로를 찾는 인간들. 그것을 볼 때마다…… 솔직히 전혀 몰입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비한테 물리면 감염이 된다. 목숨을 잃고 움직이는 시체가 된다는 것은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그런데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좀비의 이는 결국 인간의 이이지 않은가? 아무리 강한 치악력이 있어도 연장이 무딘 이상은 두렵지가 않다. 백날 물려봤자 피부에 흔적도 나지 않을 것이다.
좀비의 공습으로 인한 두려움? 놈들은 결국 사람 시체이지 않은가! 개중에는 좀비가 되면서 힘도 강해지고, 오히려 생전보다 더 빨라져 펄쩍펄쩍 뛰어다니게 되는 영화도 있는 모양이지만 약해빠진 건 그놈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것들보다는 차라리 히어로 무비 쪽이 실감이 났다. 본인의 힘을 감추고 살아야 하는 히어로들의 고뇌, 감춰두었던 힘을 호쾌하게 드러낼 때의 카타르시스!
정시우와 너무나 흡사한 삶을 살면서도 결정적인 부분에 이르러 자신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히어로들은, 현실에 갇혀 움직이지 못하는 정시우가 대리만족을 하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컨텐츠였다.
그것에 비하면 좀비 영화는 그냥 ‘평범한 인간은 저렇게 간단히 죽어버리는구나’ 하는 감상 정도밖엔 느낄 수가 없었던 것. 본인의 환경, 상태에 따라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얼마든지 다른 감상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쩝, 그래도 진짜 몬스터면 뭐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무슨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제 곧 놈들의 영역권이라구욧! 쟤네 막 지들 팔도 뽑아서 던진다니까요!?”
“그거 뭐 얼마나 아프다고.”
그리고 그 감상은 정시우가 일으킨 소동에 영원한 밤의 도시 곳곳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좀비들과 마주하면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더러운 건 싫으니…… 좋아, 그러면 가볍게 한 방 먹여볼까.”
정시우는 근처에 떨어진 건물 파편 하나를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어딜 봐서 가볍게 한 방이냐고 묻고 싶을 만큼 터무니없는 기세로 날아간 건물 파편이 정시우에게 달려오던 좀비 무리의 선두와 부딪혀, 그 다음 순간에는 굉음을 내며 전방 10미터 범위 안에 있던 좀비들을 통째로 분쇄해버렸다.
[어…… 아……?]
유령이 멍하니 중얼거리며 두 눈을 깜박였다. 정시우가 직경 1미터에 달하는 바윗덩어리를 걷어찬 것까지는 눈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좀비 수십 마리의 소멸과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죽었다 깨어난 상태인데도!
[구아아아아아아]
[기긱, 기이익]
[아프다, 너무 아프다……!]
자아가 없는 시체, 죽은 몸에 남은 희미한 의식의 잔재만으로 움직이는 좀비들마저 정시우가 만들어낸 참상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좀비 무리 틈에 섞여 정시우의 틈을 찾고, 그대로 공격할 생각이었던 몇 마리인가의 구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저 새끼들 몰려올 때는 언제고 뒤로 빼는데.”
“뒤로 빼는 좀비라니 살다 살다 처음 보는데요…….”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정시우가 아니다. 어차피 적을 공격할 무기는 남아도는 것이다! 그는 그 옆의 건물 파편을 어렵지 않게 들어올려, 이번엔 가볍게 마나를 주입했다. 수아린이 그에게 베풀어준 신성력을 위주로 담았다.
“어라, 오빠 방금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네가 준 신성력을 담았잖아.”
“그걸 어떻게 했냐니까요!?”
“……이거 원래 안 되는 거였어?”
“아…… 아니, 아니에요. 네,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렇고말고요.”
수아린은 체념의 정서를 마스터했다! 그러건 말건 정시우는 신성력이 부여된 바위를 살짝 띄웠다가, 그대로 망치로 쳐 날려 주춤거리는 좀비 군단을 공격! 효과는 굉장했다!
[갸아아아아아!]
[정화된다!]
[아, 아아아아……!]
순수한 폭력과 신성력에 의해 이번엔 백 마리도 넘는 숫자의 좀비가 그대로 소멸했다. 도시 곳곳에서 몰려나오던 좀비들이 그 광경을 조우하곤 잠깐 스턴이 걸린 것처럼 멈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인간이 아니다. 저 인간이 맛있는 인간이었더라면 여태 살아 있었을 리가 없다. 분명 살도 퍽퍽하고 이도 잘 안 들어가는 맛없는 인간이리라.
정시우가 신 포도로 돌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당연하지만, 정시우에겐 놈들의 사정 따위 고려해줄 마음이 없었다.
좀비들의 아포칼립스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