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44화.
정시우가 휴식처에서 그냥 나올 경우, 그는 설악산으로 튀어나오게 된다. 지금쯤이면 군인이고 플레이어고 온갖 사람들이 몰려 있을 텐데 태평하게 그쪽으로 나가는 것은 바보나 할 짓.
마침 던전으로 가려던 참이기도 했기에 정시우는 비드를 소모하여 곧장 던전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택했다.
[개미굴 에이리어 #127 세리엔 공동묘지]
[클리어 제한 시간 ? 12:00:00]
“언데드 던전인가?”
“언데드 던전이군요.”
“언데드 던전이라니!”
용세하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반면 수아린은 사색이 되어 정시우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전 언데드는 질색이에요. 너무너무 싫다구요.”
“예전에 네 입으로 들어서 알고 있어.”
“기, 기억해주고 계셨어요……?”
“선배님, 그 부분은 감동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젠 정시우도 에이리어 뒤에 붙은 넘버링의 정체를 대충 안다. 이것은 난이도 설정이었다. 단 숫자가 작을수록 몬스터가 강했고, 클수록 몬스터가 약했다.
여태까지 그가 들어갔던 던전 중 가장 숫자가 컸던 던전이 슬라임 하수처리장이고, 작았던 던전이 강화 오크의 군락이었으니 확실했다.
“기갑 오크보다도 약한 녀석들이 나온다 이거지.”
정시우는 쯧, 혀를 찼다. 기갑 오크를 상대로는 박진감 넘치는 전투를 펼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정시우는 그때보다도 아득히 강해진 상태다.
지금이라면 기갑 오크 엘리트는 물론이고 기갑 오크 천부장이 나타나도 가볍게 잡아낼 자신이 있었다. 그의 성장속도는 다른 플레이어들이 한탄을 할 만큼 빨랐으나 다행히도 그것을 아는 이는 수아린과 용세하뿐이었다.
“오빠, 안심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구요. 언데드가 출몰하는 던전은 언제나 동급의 다른 던전보다 난이도가 한 단계 높은 던전으로 친단 말이에요!”
“강화 오크의 군락도 다른 동급의 던전보다 난이도가 높은 축이잖아.”
“그건 그렇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구욧!”
수아린은 괜히 그녀의 기분을 더 울적하게 만드는 회색의 던전 벽을 째려보며 속사포처럼 설명을 쏟아냈다.
“좀비 영화를 하나라도 보셨으면 알겠지만 놈들은 질겨요. 잘 안 죽어요. 게다가 모든 개체가 적든 강하든 독을 품고 있어요. 심지어 어디서 죽은 건지는 몰라도 꼭 나타날 때마다 한 무더기씩 나타난다구요! 그리고 냄새가 너무 심해서 싸우다 보면 꼭 양파 껍질 벗겨낼 때처럼…… 퀭하니 썩어 들어간 눈동자로 바라보면 정말…… 심지어 이 던전 이름은 공동묘지잖아요? 그렇다는 건 최소한 언데드 규모가!”
그동안 언데드와 관련해 안 좋은 기억이 많이 쌓였는지, 흡사 랩이라도 하듯 구구절절이 언데드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수아린. 정시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용세하에게 말했다.
“세하야, 네가 대신 설명해줘.”
“넵, 형님!”
“뭣!?”
수아린의 지위가 기어이 한 단계 강등되는 순간이었다. 그녀와 반대로 1계급 특진한 용세하가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형님의 독 내성 정도면 좀비의 독에 감염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던전의 난이도를 감안해보면 좀비뿐만이 아니라 상위 단계의 언데드가 나타날 가능성이 너무나 높죠. 좀비보다 단단하고 빠른 스켈레톤은 차치하더라도, 구울, 육신을 버리고 지독한 원혼으로 남은 레이스……. 이놈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독뿐만 아니라 기술도요.”
“흠흠.”
“형님은 기본적으로 모든 생물을 효과적으로 도살하는 법을 알고 계시지만, 언데드는 생물이 아닙니다. 수아린 선배님의 말씀이 틀리지 않아요. 죽였다고 확신한 순간 몸이 기이하게 비틀리며 훅 공격이 들어옵니다. 아예 실체가 없는 유령은 두말할 나위도 없죠.”
“좋아, 주의하지.”
죽였다고 확신한 순간 공격이 들어온다면, 확신할 필요도 없이 그냥 누가 봐도 ‘아, 저기에 한때 살아 있었던 무언가가 있구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강한 공격을 먹여주면 되겠군. 정시우는 무식한 각오를 했다.
다행한 점이 있다면 판타지 소설에서 흔히 그러하듯 유령 몬스터는 평범한 공격으로는 데미지를 입힐 수 없다든가 하는 일은 없다는 것.
플레이어라면 모두가 마나를 각성한 이이고, 마나를 각성한 육신은 얼마든지 영체와 맞닿을 수 있다. 추가로 그들이 다루는 아티팩트는 모두가 마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당연히 영체를 가격할 수 있다.
“여기에 신성력이 가미된다면 더 강한 공격을 가할 수 있습니다. 수아린 선배님께서는 한때 사제의 최고봉이셨죠. 물론 이전만은 못해도 많은 힘을 회복하셨으니, 형님께서 언데드를 상대로 밀리실 일은 없을 겁니다.”
“확실히 아린이가 신성력을 다루지……. 그런데 신성력을 다룬다면, 아린이 너도 신을 믿는 거야?”
“그러게요?”
아니, 그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하면 어쩌자는 말인가. 정시우가 따지려는데 수아린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처음엔 정말로 별생각이 없었어요. 왜 게임에서 봐도 사제가 어떤 신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신성력이 얼마나 강하느냐가 중요하지.”
“그건 그렇다만.”
“그래서 어릴 땐 아예 생각도 안 했어요. 제가 다루는 힘이, 사악한 것을 배척하고 인간에게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힘이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 맥을 제가 간신히 짚을 수 있게 된 건 사실 불과 얼마 전의 일이죠.”
정시우가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신에 대해 관심이 많은 용세하도 나란히 눈을 빛냈다.
“그래서 그 맥이 어디로 이어지는데? 역시 그 몬스터들이 믿는 신이야? 아니면 혹시 지구인들이 믿는 종교인가?”
“모르겠어요.”
정시우가 곧장 알밤을 먹이지 않은 것은 단지 그의 주먹을 감당하기엔 수아린이 너무나 작기 때문이었다.
“제게 신성력을 주는 이가 하나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쩌면 그것은 존재조차 아닐 수도 있겠지요. 세상에 널리 퍼진 신의 이미지…… 이렇게 말하면 너무 막연하지만, 신이라면 응당 그러해야 한다는 인간의 생각과 바람에 의해 가공된 마나가 제게 들어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성력이 인간에 의해 가공된 마나라는 거야?”
“아닐 수도 있지만요. 제 인지 너머의 초월적인 존재들이 보내오는 힘일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제가 모르겠다고 말씀드린 거예요.”
역시나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수아린 역시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긴 했던 것 같았다. 정시우는 뚱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 이게 얼마나 오랜만인지. 살아 있는 사람이 찾아와주다니 너무나 기뻐요.]
첫 번째 방에 유령이 있었다. 너무 오랜만의 일이라 정시우도 순간 공격할 뻔했다.
“언데드, 언데드일 거야. 언데드일 거예요.”
수아린이 중얼거렸다. 언데드 던전에 나타난 유령이니 그녀가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유령에게 다가갔다. 수아린이 걱정하는 것은 알겠지만 유령의 눈동자는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퀘스트 내놔.”
[당신은 저의 영혼을 구원해주러 오셨군요. 설령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 해도, 당신의 마음에 저는 구원될 것입니다.]
실로 공교롭게도 유령은 사제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으며, 던전에 갇힌 지 얼마나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지극히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보였다.
덤으로 어째 겉모습만 사제이고 내용물은 평범한 20대 처녀인 수아린과 달리 정말 중세 유럽의 신관노릇을 하다 온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고풍스러운 말투를 구사하고 있었다.
[퀘스트, 실로 제 가슴 속 깊숙이 새겨진 단어…… 네, 퀘스트를 드려야지요. 하지만 아마 당신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의아해한다고?”
정시우의 반문에 유령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이내 그의 눈앞으로 알림이 떠올랐다.
[던전 퀘스트 발생]
[사제의 희망]
[동료들과 함께 던전에서 퀘스트를 진행하던 중 실패하고 동료를 모두 잃은 사제. 그녀는 생전에 그녀가 완수하지 못했던 퀘스트를 마무리 짓고 싶어 한다. 그녀를 도와 공동묘지에 봉인된 밴시의 정체를 밝히자.]
[퀘스트 조건 ? 밴시 해방 0/1]
[퀘스트를 수락하겠습니까? 퀘스트를 거절할 경우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이거 그냥 보스 처리랑 뭐가 달라?”
정시우가 용세하에게 물었다. 용세하는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던전은 단순하게 일직선으로 나아가 클리어하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던전 중에는 많은 숨겨진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도 있고, 특정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몬스터를 죽인다거나, 탄생을 막는다거나, 반대로 특정한 몬스터를 탄생시키는 일까지도 가능하죠.”
“즉 이 유령이 말하는 밴시는 보스 몬스터가 아닌, 특정 조건을 만족시켰을 때 만날 수 있는 몬스터라는 얘기야?”
“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시우가 한 생각은 ‘아깝다’였다. 여태까지 거쳐 온 던전 중에도 그런 것이 있었다면, 단순히 빠르게 던전을 돌파하는 데에만 집착하지 않고 이것저것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더 나은 보상을 얻을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겠지만 그런 조건이 어느 던전이든 갖추어져 있는 건 아녜요, 오빠. 던전 진행 중에 퀘스트를 얻기도 힘들고요. 특히 오빠처럼 쾌속으로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던전에서 이것저것 해보는 게 아니라 그냥 일직선으로 내달려 클리어하는 쪽이 훨씬 이득이죠.”
“그것도 맞는 말입니다. 사실 형님 정도 되면 던전의 숨겨진 요소를 굳이 찾아 나설 필요도 없지요.”
정시우의 존재만으로 사기인데 여기에 뭘 또 더한단 말인가. 그는 서포터답지 않은 말을 지껄이는 두 서포터를 가볍게 무시하며 유령을 향해 말했다.
“하늘성에 있던 던전과 지금 개미굴에 재구성된 던전, 이 두 개가 동일하다는 보장은 있어?”
[동일합니다. 던전을 구성하는 마나도 던전의 구조 그 자체도 완전히 같아요. 무엇보다…… 영혼만 남은 제게 퀘스트가 남아 있습니다. 이보다 확실한 보장은 없겠지요?]
정시우는 두 서포터들과 눈을 맞추었다. 그들은 굳이 숨겨진 요소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눈앞에 제시되었는데도 거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해주지.”
[감사합니다!]
[퀘스트를 수락했습니다. 퀘스트에 실패할 경우 페널티를 받게 됩니다.]
유령이 구름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태양처럼 해맑게 웃어보였다. 쓸데없이 마음이 훈훈해지는 미소였다.
“좋아, 그러면 던전 내부로 들어가 보자. 혹시나 해서 묻지만 아린이 너는…….”
“저는 이런 던전 몰라요. 아마 한국에 있는 던전은 아닐 거예요.”
“저도 모릅니다. 한국의 어지간한 던전은 다 알고 있는데, 세리엔 공동묘지라…… 아마 유령 분은 어지간히도 먼 곳에서 추락하셨나 봅니다.”
그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근거도 빈약하지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반투명하긴 하지만, 그녀의 이목구비가 명백한 서양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내뱉는 말도 영어였다.
“그런데 오빠, 영어 진짜 잘 하네요. 조금 얄미울 정도로 만능인데…….”
“예습복습 철저히 하고 EBS 중심으로 공부했어.”
수아린은 그에게 곧장 반박하려 했지만, 복도가 끝나고 드러난 첫 번째 방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용세하도, 정시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게, 대체…….”
[어서 오세요.]
유령이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을 뻗었다. 첫 번째 방…… 방이라고 부르기엔 지나치게 넓은 중세 유럽의 도시가 그곳에 펼쳐져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세리엔의 공동묘지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