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42화.
정시우는 휴식처의 침대에 늘어졌다. 그는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지치지도 않고 몇 시간 잘만 싸우지만, 그 나름의 후유증은 나중에 돌아왔다. 지금이 그랬다. 어쩌면 전신의 근육의 긴장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고 있다가, 한순간에 그것을 풀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빠의 신체 구조는 대체 어떻게 되어 있는 거예요?”
“나한테 물어봐도 몰라. 그냥 일반인하곤 좀 많이 다르더라고. 이제 보니까 플레이어들이랑도 다른 것 같긴 한데.”
정시우는 최대한 편하게 누워 긴장을 풀며 답했다. 그의 손에는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손에 넣은 마석 중 가장 큰 녀석이 쥐여 있었다. 끝까지 사자탈 몬스터를 보좌하던 엘리트 중 한 마리의 것이었다.
“몬스터 비드랑은 확실히 다르네요. 음…… 보다 활발해요.”
“역시 예리하구나.”
시종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는, 뚜렷하게 박동하는 마나가 느껴지는 결정. 몬스터 비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특수한 목적을 위해 정제된 느낌을 받게 되는, 굳이 말하자면 ‘죽은’ 마나 느낌이 나는 몬스터 비드와는 달리 마석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걸 사람들이 왜 원할까. 아마 현대 기술로 가공해보려는 거겠지?”
“사체까지 가져갔다니 확실하죠. 던전의 제단에서 획득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몬스터의 사체와 마석을 통해 재현해보려는 게 분명해요.”
“확실히 그럴듯하긴 한데 말이지…….”
물론 그들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다만 정시우로서는 그것을 알 방도가 없고, 안다고 해도 뭔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마나의 결정만은 회수해왔지만…….
“이 안의 마나를 내가 다룰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먹으면 되려나?”
“시우 오빠에게 내재된 마나와 다른 존재의 마나는 결코 섞일 수 없어요. 그것을 무리하게 합치려 했다간 마나가 폭주해 끔찍한 결과를 낳을 뿐이에요.”
수아린의 격렬한 반대에 정시우는 뚱한 표정을 지을 따름이었다. 물론 그도 마나라는 에너지가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외부에서 가공해 아티팩트화한다는 건가…….”
비드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몬스터들이 남긴 에너지를 한데 모아 물질로 만드는 것이 아니던가. 물론 그 덕에 본신의 능력에 더해지는 여러 장비를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정시우는 그 구조에 태클을 걸 여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했다.
“역시 던전은 여러모로 미스터리하단 말이지. 생각해보면 던전을 클리어하고 레벨이 오르는 것도, 내가 던전에서 겪고 행한 일들이 마나로 정산되어 내게 주입된 결과잖아…… 어라?”
정시우는 문득 당연한 사실 한 가지에 생각이 미쳤다.
레벨이 오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던전이 클리어된 후 그 안에서 죽어나간 몬스터들의 마나를 바탕으로 정시우가 던전 안에서 벌인 일과 업적에 맞게 가공되어 그에게 수여되는 결과 발생하는 일이다.
어쩌면 던전이라는 공간 자체가 몬스터의 마나를 효율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넘겨주기 위한 가공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건…… 굉장히 흥미로운 이론이네요. 저는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가공, 그렇죠. 저희가 만들어낸 합당한 기록과 업적에 합당한 마나를. 그것이 하늘성의 제1법칙이니까요. 레벨이 오르는 것이 던전 덕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형님 말씀을 듣고 보니 누군가의 의도가 다분히 느껴집니다. 그게 대체 누구일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면 있잖아.”
정시우는 상황이 여유롭지 않았던 아까, 그냥 무의식적으로 넘기고 말았던 화제를 꺼내어 들었다.
“몬스터들을 잡아 죽였을 때 우리 레벨이 오른 건 어째설까?”
“어……?”
정시우의 가설이 합당하다고 가정할 때, 플레이어에게 몬스터의 마나를 가공해 넘겨줄 수 있는 던전의 존재가 없는 외부에서는 결코 레벨 업이 이루어질 수 없다. 실제로 다른 플레이어들은, 물론 마리나마저도 레벨이 오르는 기색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정시우의 레벨은 오를 수 있었던 것일까?
“어쩌면 내게는 그 과정이 필요 없거나.”
“던전 밖에서도 던전에서와 비슷한 가공 과정이 적용되거나…….”
“좋아, 그렇다면.”
“아아아아앗, 그렇게 나올 줄은 알았지만 안 된다니까욧!”
정시우는 던전 내부뿐만이 아니라 던전 외부에서도 몬스터의 마나를 바탕으로 레벨을 올릴 수 있다. 그렇게 결론이 났다면 이제 더는 망설일 것도 없다! 그는 손에 굴리고 있던 마석을 덥석 삼켜버렸다!
“냠. 흠? 흠흠.”
“오빠!”
“혀, 형님!?”
정시우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마석이 활활 타오르며 그의 육신으로 존재감을 넓히는 것을 느꼈다.
고통은 없었다. 마석은 곧 완전히 녹아내렸고, 마나는 처음부터 그랬어야 한다는 듯 자연스럽게 정시우가 원래 지니고 있던 마나와 섞였다. 이내, 그 모두가 같게 되었다.
“으으으음. 응……?”
“그러고 있지만 말고 말로 설명을 좀…… 어라?”
이내 수아린과 용세하 역시 깨달았다. 그가 완전히 마나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얼떨떨한 것은 정시우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어느 정도는 충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자연스럽지 않은가. 너무 당연하게 마나를 흡수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바람에 다른 이들도 당연히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력이 1 올랐습니다.]
“이게 진짜 되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
“응. 역시 내 생각이 맞았던 것 같다.”
마석의 안전성을 확인한 그는 남은 마석도 전부 먹어치웠다. 그 결과 마력 스탯이 도합 7 상승하여, 이전에 헤비 웨폰 배틀을 만들어내느라 소모했던 마력을 복구하고도 그의 레벨보다 2 높은 마력 스탯을 갖게 되었다. 그 정도면 아예 전황을 바꾸어버릴 수도 있는 차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거지? 끄응, 하긴 하늘에서 떨어지던 절 받아낸 시점에서 이미 이런저런 의문은 접어놓기로 마음먹었지만요…….”
“우리가 던전에서 받는 혜택이 두 가지지요. 정제된 마나의 결정 비드, 던전에서 세운 업적에 맞게 가공된 마나. 그리고 형님은 외부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종류 방식으로 마나를 얻는 셈입니다. 의외로 간단한 결론인 것 같은데요?”
그렇다. 이것은 플레이어이되 플레이어의 속박을 벗어난 플레이어, 정시우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열심히 마석을 연구하고 있는 세계 각국의 지도부가 보면 거품을 물 일이었지만 정시우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쳇, 그럼 결국 지상에 나타나는 몬스터를 잡는 것도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얘기잖아.”
어떻게 보면 더욱 중요할 수도 있다. 정시우는 가뜩이나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마력이 떨어지는 편이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의 신체 능력과 마력이 비등해진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시너지가 일어나, 그야말로 경천동지의 힘을 발할 수 있게 되리라! 상상만 해도 환상적이었다.
“딱 레벨 100 정도만 찍으면 마리나 비셋한테도 여유롭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 레벨 100을 달성하고 나면 그때부턴 마석을 한 번 모아봐야겠다.”
“세계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사람 중 하나인 마리나 비셋을 레벨 100에 꺾겠다니…… 아니, 아마 오빠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요.”
50레벨을 갓 넘긴 상태에서도 그만한 전투력을 보여준 정시우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냥 그런 것이다. 수아린은 체념했고, 용세하는 감탄했다. 정시우는 침대에서 흐느적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보기엔 우스워도 엄연히 신체적응의 일환이었다.
“일단 하룻밤 자고…… 레벨과 마나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때부터 움직이자.”
“또 바로 던전을 찾으러 가겠다는 말은 안 해서 다행이에요. 여태 워낙 바쁘게 움직여서 몰랐는데, 오빠도 한 번 늘어지면 진짜 제대로 늘어지네요.”
정시우는 동물원 너럭바위 위에 늘어진 사자를 보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수아린을 향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재정비야, 재정비. 말했잖아? 난 시간을 절대 허투루 쓰지 않는다니까.”
“존경합니다, 형님!”
변명이 아니었다. 다시 한 번 정비를 해야 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몸도 한 번 풀어줘야 하고, 성장한 스킬들도 점검해야 한다. 무엇보다 정체를 감추느라 설악산에서는 써먹지 못한 꼬리도 숙달해두는 쪽이 좋을 것이고…….
“아무래도 앞으론 설악산 사태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날 것 같으니, 어지간하면 그 전에 처리를 해둬야겠어.”
“오빠가 전 세계를 감당할 수는 없어요. 다른 플레이어들도 있으니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다른 플레이어들 말이지…….”
정시우는 마리나 비셋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강했으며, 동시에 선했다. 아마도 정부로 추측되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움직이고 있기는 했지만,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도 몬스터들을 상대하러 나선다는 것은 그리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면전에서 대놓고 칭찬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과연 이상적인 인간상이었다. 기분 좋은 만남이었다.
“확실히 좋은 여자였어.”
“하, 하지만 외국인이에요!”
마리나에 대한 한 줄기 호감을 품고 고개를 끄덕이는 정시우를 보며 불현듯 불안해진 수아린이 그녀 평생 자각하지 못했던 보수적인 면모를 깨워내 외쳤다. 흥선대원군이 봤더라면 팡파레를 울렸을 것이다.
“그래, 외국인이지. 그게 제일 아쉬워.”
“그, 그 사실이 아쉬울 만큼 마음에 들었어요……? 아니, 오빠도 의외로 보수적인 면이…….”
“이거 참 웃을 수도 없고…….”
둘의 말이 서로 핀트가 엇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용세하만이 깨닫고 있었다. 굳이 더 이상한 쪽을 고르라면 수아린이었다.
정녕 이 여자가 오는 남자 족족 걷어차기로 유명했던 아이언 포트리스가 맞단 말인가. 플레이어 시절의 그녀를 아는 이가 지금의 그녀와 마주한다면, 굳이 그녀의 사이즈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러모로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한국에는 그런 플레이어가 없거나, 적어도 오늘 나는 보지 못한 것 같으니까 말이지.”
“네? 아, 아아! 그, 그렇죠! 네, 그렇죠!”
이어지는 정시우의 말에 수아린이 뒤늦게 동의했다. 그녀는 그제야 정시우가 마리나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호감을 느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되면 괜히 이상하게 의식한 자신이 바보 같지 않은가!
“……? 왜 그러냐?”
“아무것도 아녜요…….”
“솔직히 그만한 전투를 벌였는데 냅둔 건 너무 노골적이었지. 그 인간, 길드 마스터로서는 어떤지 몰라도 인간으로서는 실격이야.”
용오름 길드의 마스터, 김하룡이 일부러 대청봉에 가까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마리나도 정시우도 알고 있었다. 놈은 길드의 전력이 저하될 것이 두려워 일부러 몬스터들을 방치한 것이다.
그렇다고 본인이 직접 나선 것도 아니다. 레벨도 높고 실력도 있다는데 대체 뭐가 그리 어렵고 무서웠던 것일까.
“끄응, 그건…… 예, 그렇죠.”
용세하 역시 떨떠름한 투로 동의했다. 그는 길드 마스터를 따랐지만, 그것도 자신이 길드에 속해 있을 때였다. 김하룡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길드를 위해 종종 도의적이지 못한 일을 한다는 것은 용세하 역시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한국 정부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국에 나타난 엘리트 몬스터조차 미국이 쏙 빼가게 놔둘 셈인가.”
“적어도 용오름 길드를 효과적으로 설득하지 못했다는 건 분명해 보이네요.”
셋은 나란히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나서 국가에 발목이 잡혀줄 생각은 없었다. 세상이 급속도로 바뀌고 있는데, 그것도 깨닫지 못하고 이전에 해오던 것처럼 거짓과 기만으로 자기 배나 불리려는 작자들은 다 같이 망해버리는 쪽이 좋았다.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안녕히 주무세요, 오빠.”
“주무십쇼!”
용세하 저 녀석은 군대를 다녀온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기합이 들어가 있는 걸까. 던전에서 죽다 살아난 부작용이라도 되는 걸까. 정시우는 가만히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곧 죽음보다 달콤한 잠이 그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