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39화.
“그런데 너.”
마리나 비셋이 물었다.
“날개는 왜 안 꺼내? 그걸 안 꺼내고도 내 속도를 따라잡는 걸 보면 정말 기가 막히다고밖엔 할 말이 없지만…….”
플레이어들의 날개는 기본적으로 그들에게 비행 능력을 제공하며, 성장하게 되면 단지 날개를 꺼내기만 해도 신체 강도, 속력이 상승하는 버프 효과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마리나 비셋은 날개를 펼친 채 산속을 질주하고 있었다. 물론 상공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이 설악산을 메우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정체를 온전히 드러내게 될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냥.”
그리고 그런 그녀의 질주를 정시우는 전투질주만으로 따라잡고 있었다. 단기간에 숙달한 스킬, 근본적으로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격이 다른 육체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너, 플레이어 아닌 거 아니야?”
“그럼 뭘로 보이냐?”
“몬스터. 마탄과 전투질주를 합성할 정도니 몬스터라고 해도 믿겠다. 음, 그렇고말고.”
“그럼 그렇게 생각하시든가.”
“칫.”
그녀는 심히 납득이 가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더 추궁을 하진 않았다. 한편 정시우는 설악산만 정리하고 나면 당분간은 다시 얌전히 개미굴 던전이나 돌자고 마음먹었다.
그가 그녀보다 더 강했더라면 굳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느라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게 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힘! 이것저것 귀찮은 것 신경 쓸 필요가 없게 해주는 힘! 그는 더욱 빨리 강해지고 싶었다.
‘내가 지하 플레이어라는 걸 밝혀도 다른 놈들이 날 귀찮게 만들지 못하게 할 만한 힘. 오히려 다른 이들을 내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는 힘.’
그나마 지금 만난 마리나 비셋이 순진한 편이라 괜찮은 것이지, 다른 정상급 플레이어였더라면 결코 이렇게 부드러운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정시우 역시 설악산의 이변을 확인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하고 휴식처로 튀었겠지.
‘특히 그 김하룡인지 뭔지 하는 인간. 백 퍼센트 귀찮게 굴 거야.’
혹여 이상한 일에 얽힐 것 같거든 지체하지 말고 튀자. 정시우는 고개를 끄덕여 다짐했다.
“저놈들 뒤통수 보인다.”
그들이 떠들고 거래를 나누느라 지체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당연하게도 곧 현장에서 도망친 두 마리 몬스터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놈들은 친절하게도 이렇게 떠들고 있었다.
[놈들은 그분들이 나서지 않으면 잡을 수 없다.]
[빨리 가자. 특급 제물이 왔다고 기뻐할 것이다.]
[우리 세계의 빛을 위하여 힘낸다.]
“녀석들 솜씨 제법인데. 적절히 복선을 깔고 적의 정체를 대충이나마 암시하고 있잖아?”
“그 부분에서 감탄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놈들을 따라 둔덕을, 바위 너머를, 나무 위를 질주하다 보니 대충이나마 놈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견적이 잡혔다. 몬스터를 취재하려던 헬기가 격추당한 곳, 설악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대청봉이었다. 그것을 보며 용세하가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한테 많이도 끌려갔었죠…….”
“쉿.”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숲을 어찌 헤쳐 가며 탁 트인 곳으로 눈을 돌리자, 그제야 일행의 눈에 무리의 윤곽이 잡혔다. 대청봉은 물론이고 그 아래 언덕과 바위 위를 모두 몬스터 무리가 뒤덮고 있었다.
아직 수백 미터 이상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놈들의 가다듬어진 살기와 마나의 발산을 보고 있으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카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네놈들, 더 죽여라! 더! 더!]
그곳에는 고블린과 오크 등등 산을 올라오며 많이 조우했던 몬스터도 있었지만 검은 털이 가시처럼 곤두선 늑대 무리, 두 팔이 기다란 거대 원숭이들도 있었다. 종류를 가리지 않고 숫자만 세어 족히 수만 마리는 되는 몬스터가 모여 있었다.
“이게 뭐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대규모 몬스터의 군단을 보며 마리나 비셋은 그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홀로 수천의 몬스터를 상대해본 적은 있다. 물론 놈들을 전멸시킨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놈들을 피해 던전에서의 목적을 달성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현실 세상에 저토록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그나마 저것도 전부가 아니다. 설악산 산맥 일대에, 아니 어쩌면 그 너머까지도 몬스터들이 퍼져 있을 테니 상황은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한국 정부에 알려줘야 해. 이것들은 한국 플레이어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한국은 전 세계 플레이어들을 집합시키든, 산을 하나 통째로 폭파시키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이들이 산을 타고 전국 일대로 퍼져나간다고 생각하면 그저 끔찍할 따름이었다. 마리나는 당장 폰을 꺼내들었다. 그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세계 최강의 용병이라 할지라도 저런 숫자의 적을 앞에 두면 공포를 느끼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 장관을 앞에 두고도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 전에 한 가지 시도해볼 만한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그는 몬스터들을 훑어 놈들의 대장을 찾았다. 몬스터의 숫자는 많았으나 결국 대부분 레벨 100을 넘기지 못하는 떨거지들이었으니, 그들 중심부의 강자들만 살피면 되었다.
이내 정시우는 다른 후보를 모두 제거하고 단 한 명만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피와 마나가, 영혼이 부족하다! 동포들이여, 네놈들의 한이 고작 그 정도란 말인가!]
대청봉 꼭대기에 올라선, 사자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인간형의 몬스터. 다른 강력한 몬스터들이 모두 그를 보호하듯이 둘러싸고 있었으니 그가 우두머리임에 분명했다.
뭣보다도 놈이 자연스럽게 흘리는 기세가 광포하기 그지없었다. 정시우는 자신이 만났던 가장 강한 적, 기갑 오크 천부장을 떠올렸다. 음, 확실히 그놈보다 강할 것 같았다.
“저놈을 죽이는 거지.”
“놈을 죽인다고 뾰족한 수가 생길까? 지금은 우두머리가 있으니까 그나마 통제되고 있지만 만약 놈을 죽여 버리면 엄청 날뛸지도 몰라.”
두 사람은 과연 놈을 죽일 수 있는가, 에 대해선 굳이 떠들지 않았다. 혼자였더라면 몰라도 둘이 협력하는 이상은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적어도 산하동의 몬스터들은 우두머리를 죽이니 사라졌었어.”
“아! 그렇구나, 어쩐지 덩치가 크더라니. 너 최초의 헌터였구나?”
“낯간지러우니까 그렇게 부르지 마라.”
“흐흣.”
마리나 비셋은 만족한 듯 웃었다. 세상사람 누구도 모르는 최초의 헌터를 지금 그녀만이 알고 있지 않은가! 실질적으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괜히 뿌듯했다.
하지만 그 뿌듯한 감정과는 별개로 정시우에게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런데 나도 다른 곳에서 우두머리 몬스터를 잡아봤거든? 하지만 그땐 아무런 변화도 없었어. 단순히 네가 운이 좋았던 것 아닐까? 어쩌면 초동조치가 중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고.”
정시우는 그 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역시 그런가. 던전이 한 번 지상에 풀려나면, 아무리 놈들을 말살해도 마치 던전에서 몬스터가 다시 태어나듯이 그 장소에서 몬스터가 태어난다더니 그것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몬스터 무리를 해치우고 개미굴 던전에까지 들어가 그것을 깔끔히 소멸시키고 나온 정시우와는 케이스가 다른 것이다.
더욱이 그 또한 이미 설악산 일대를 탐색하며 여럿의 던전이 해방되었음을 파악하지 않았던가.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던전의 흔적일 뿐, 이제 더는 개미굴 던전에 진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마리나 비셋의 말마따나 우두머리를 처단한다고 해도 일이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무척 높았다.
‘그렇지만.’
무리의 우두머리를 죽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놔주질 않았다. 어디에서 기인한 감정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무시하기엔 너무나 강렬한 충동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놈을 죽이고 싶으니까 죽이자, 라고 비셋을 설득할 수도 없었다.
“잠깐.”
그때 마리나 비셋이 한 손을 들었다. 정시우 역시 그 직후 일이 요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로 그의 입이 헤벌어졌다.
“저 녀석들 왜 자해하는 거야?”
“으으…….”
무리의 바깥에 있던 몬스터부터 차례로 날붙이를 들어 제 목을 찌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죽었고, 직후 또다시 수백이 죽었다. 정시우는 그것을 보며 ‘제물’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지금이다! 더는 망설일 수 없다! 네놈들의 신은 누구냐!]
[우, 우리의 신은…….]
[네놈들은 패배했다. 네놈들의 기원은 앗겼다! 그러니 대답해라, 네놈들의 신은 누구냐!]
[우리의 신은!]
몬스터들은 당최 못 알아들을 말을 지껄이며 연달아 자해했다. 돌과 풀로 뒤덮인 언덕에 피의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놈들이 지니고 있던 마나가, 기록이 고스란히 방출되며 일대를 가득 채웠다.
실로 섬뜩한 그 광경을 앞에 두고 마리나 비셋이 쳇, 혀를 찼다.
“저 빌어먹을 광신도 자식들……!”
“광신도?”
“몬스터 놈들은 하나같이 신을 믿어. 그것도 아주 짜증 나고 괴팍한 신들을. 저건 분명 제물을 바치는 의식일 거야. 이전에도 몇 번 봤지만, 아무래도 저건 너무 대규모잖아!”
“신……?”
“너 정도 되면 알잖아.”
아무래도 마리나 비셋은 정시우를 되게 높게 사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당연히 그도 알고 있으리라 여기는 것. 어쩌면 자신처럼 마탄을 다루는 정시우에게 일종의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것이 영 마음에 안 드는 수아린은 가만히 혀를 찼지만 마리나 비셋은 수아린의 불편한 마음은 물론 존재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놈들의 신이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 하늘성에서만 그런가 했더니 이젠 지상으로까지 내려와서 이러네.”
“너는 그들이 믿는 신을 믿어?”
“왜 이래, 신은 있잖아. 당장 내가 너한테 준 라이플만 해도 뇌신이 나한테 직접 준 건데?”
그 순간 정시우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그렇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그가 받은 아티팩트는 뇌신의 라이플, 신의 힘이 담겼다는 무구인 것이다. 봉인된 편린만으로 그 정도 힘이라면 과연 신이 직접 내려준 것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물론 신의 존재를 믿는 것과 그 신을 따르는 건 별개의 일이지만 말이야. 난 신이란 작자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무척, 무우척 마음에 들지 않아.”
“라이플은 받았으면서.”
“그래서 결국 너한테 넘긴 거야. 아무튼 그래. 네가 나한테 속아 넘어간 거야.”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정시우가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녀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몬스터들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놈들은 신의 이름으로 여러 이상한 짓거리를 벌이는데, 내가 보기엔 저게 그중 가장 심각한 짓이야. 더구나 아무래도 저놈들, 이미 한 번 소규모 종교분쟁을 치른 것 같아. 저런 건 처음 봐. 하늘성에서는 끝까지 대립했었는데.”
“인류 역사 속에서는 흔히 있었던 일이지. 종교가 종교를 집어삼키는 일 말이야.”
“……좋아. 우두머리를 잡자.”
마리나 비셋이 말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지 못하는지 눈망울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쌍권총을 꺼내어 쥐는 몸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한국 정부가 나서길 기다렸다간 아무래도 좋은 꼴 못 볼 것 같아. 일단 저 사자탈을 죽여 놓고 생각하고 싶은데 네 의견은 어때?”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굉장히 날뛰고 싶은 기분이야.”
정시우가 내놓은 답에, 마리나 비셋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좋아, 그럼 시작하자.”
최강의 듀오가 세상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임시 파티였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