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38화.
마리나 비셋은 만으로 스물둘, 한국나이로 따지면 스물셋의 여성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하늘성이 생겨나는 바로 그 순간 플레이어가 된 ‘퍼스트 플레이어’ 중 한 명이기도 했다.
그녀는 탁월한 마나 재능과,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과, 전투에 대한 감각을 모두 갖춘 천재였다. 당연히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날개를, 자신이 각성한 마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처음부터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테스트 던전을 최우수로 수료한 그녀는 순수한 마나로 적을 공격하는 가장 심플하고도 강력한 액티브 스킬, 즉 마탄을 세계 최초로 얻었다.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마나를 기반으로 그녀는 오직 마탄 하나만 활용해 던전을 돌파했다. 오직 혼자서.
그녀가 굳이 타인과 관계되지 않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강해질 수 있다면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도,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그리 꺼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교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오만하거나 배려심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다른 이들이 그녀의 성장속도를 쫓아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나치게 빨랐고 지나치게 강했다. 너무나 빠르게 하늘성과 던전에 적응했으며 안전한 탐색보다는 스릴 넘치는 모험을 즐겼다.
다른 이들이 이제 겨우 테스트 던전을 마치고 1단계, 2단계 던전에 도전할 때, 그녀는 캘리포니아 주를 넘어 다른 주의 상공을 돌아다니면서까지 자신에게 맞는 던전을 찾아 도전했다. 그녀에게는 다른 이들이 자신의 수준을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10단계 던전까지 솔로잉으로 돌파하는 데 성공했을 때, 그녀는 자신을 위한 클래스 마탄의 사수를 얻어 보다 강해졌으며 스스로의 성장 방향을 정할 수 있었다.
그 후로는 가뜩이나 빨랐던 성장 속도가 더더욱 빨라졌고, 그녀는 미친 듯이 스킬과 레벨, 아티팩트를 확보하며 던전을 돌파했다. 급속도로 계좌에 쌓이는 돈은 어디까지나 덤이었다.
그녀의 고속성장이 한계에 부딪힌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다. 제아무리 개인이 뛰어나다고 해도 30단계 던전을 혼자 힘으로 클리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
결국 그녀는 그제야 강제로 휴식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다른 플레이어들은 간신히 25단계에 도전하고 있었고, 그들이 30단계로 올라올 때까지 팝콘만 먹고 있을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용병을 자처하며 각국의 플레이어 길드의 던전 공략에 끼어들기에 이르렀다.
세계 최강 용병의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용오름 길드의 32단계 던전 공략에도 그녀가 함께했어요. 다들 한국이 세계최초니 뭐니 떠들어댔지만 실상 그녀가 없었다면 공략은 불가능했겠죠.”
“그런 비밀이.”
마리나 비셋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근소근 정시우에게 설명해주는 수아린. 정시우는 그제야 어째서 수아린이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인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용세하는 그야 물론 용오름 소속의 엘리트이긴 했으나 마리나 비셋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고, 그저 그녀의 실력과 외모에 감탄할 뿐이었다. 겉으로 드러나게 튀어나올 수는 없었지만!
“정상급 플레이어인 데다 예쁘기까지 하다니 정말 반칙이에요. 마음에 안 들어요. 정말 짜증 나는 여자라고요.”
반면 수아린은 계속 구시렁거렸다. 정상급 플레이어에 예쁜 건 수아린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이다. 정시우는 그녀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마리나 비셋의 모습을 살폈다.
이목구비도 시원시원하고, 피부도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플레이어라서 그런 것인지, 잘 먹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그런 것인지 키도 클뿐더러 전투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될 만큼 풍만한 가슴, 늘씬하게 쭉 뻗은 허리와 다리…… 몸매까지 완벽했다.
이쯤 되면 확실히 그녀가 인세에 보기 드문 미녀라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아마 플레이어가 아니었다면 진즉 모델이나 할리우드 영화배우 둘 중 하나는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시우가 보기에, 눈이 부신 금발을 트윈테일로 묶어 늘어뜨리고, 녹색 빛의 동그란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는 그녀는 여자라기보단 아이처럼 느껴졌다.
“가르쳐주라!”
“안 가르쳐줘.”
“가르쳐줘어!”
“안 가르쳐줘.”
이렇게 흥미 있는 것을 발견하면 아이처럼 달라붙는 면모가 특히나.
“안 가르쳐준다면 안 가르쳐줘.”
“으갸아아아아!”
마리나 비셋이 어린아이처럼 발로 바닥을 굴렀다.
“이이익…… 나 말고 그런 특이한 마탄을 다루는 사람은 처음 봤단 말이야! 난 최초이자 최후의 마탄의 사수로서 반드시 그 스킬의 비밀을 알아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어!”
“세상이 넓다는 걸 깨달았구나. 덤으로 세상일은 떼를 쓰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겠지. 축하해.”
정시우는 마리나 비셋에게 담담히 대꾸하며 현장을 정리했다. 이 전장은 설악산에 들어오고 가장 격렬했던 전투였고, 그만큼 엘리트 몬스터도 많았다.
엘리트 몬스터라면 이전 고블린 백부장에게서 얻었던 마나의 결정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정시우의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그가 죽인 엘리트 몬스터의 골통을 부술 때마다, 혹은 심장을 터트릴 때마다 하나씩 마나의 결정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앗, 너도 역시 마석에 대해 알고 있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단순히 떼를 써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거울을 보며 연습한 혼신의 윙크를 날리며 정시우에게 부탁했다.
“그 마탄 대체 뭐야, 응? 말해줘! 말해주라, 응?”
그녀는 자신의 외모가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안다. 어지간한 남자는 어설픈 애교로도 얼마든지 낚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시우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길고양이도 그것보단 귀엽게 애교를 부리겠다.”
“크아아아아아!”
통하지 않는다! 상대는 고자이거나 게이이거나 둘 중 하나임에 분명했다!
‘나쁜 녀석은 아니네.’
정시우는 거의 울기 직전인 마리나 비셋을 보며 피식 웃어버렸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나 보려고 일부러 매정하게 대한 면이 없지 않았는데, 무력을 동원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기특했다. 마력의 양으로 보든 활약으로 보든 그녀가 정시우보다 훨씬 강한 것이 분명했음에도 말이다.
자신이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상대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고 있을 때. 그런 상황에서도 힘을 내세워 일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 것은 제법 칭찬해줄 만한 일이었다. 무엇이 도의적으로 옳은지 알고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행하기는 힘든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많이 어렸다. 무턱대고 달라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으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말해주면 뭐 줄래?”
“응?”
무력에 의지한 협박이 아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교섭을 말이다.
“합당한 대가라면 생각해보겠다는 뜻이다. 그렇게 가치가 있는 정보라면 너도 응당 가치가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하지 않겠어?”
“음…… 으그그그극.”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그녀는 정시우가 담담하게 몸을 놀리며 하는 말에 이 가는 소리를 내다가는, 이내 어깨를 추욱 늘어트리며 인벤토리를 뒤졌다. 아무래도 보상이라는 말에 딱 떠오른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거 진짜 남한테 못 주는 건데……. 으으, 그래도 그만한 스킬 정보니까 어쩔 수 없지…….”
“음?”
인벤토리에서 그 물건이 튀어나왔다. 아니, 쭈우우우욱 빠져나와 끝내 1미터를 넘겼다.
“으극, 무거워. 무거워무거워무거워. 너 빨리 받아!”
“그, 그래……?”
정시우는 다짜고짜 그에게 물건을 넘기는 마리나 비셋을 보며 당황했지만 일단 그것을 넘겨받았다. 확실히 그것은 무게감이 있었다. 족히 수백 킬로그램은 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은 정시우에게 있어 깃털보다 조금 무거운 정도였다. 수십 킬로그램의 해머를 전력으로 휘두르다가도 멈출 수 있는 그이지 않은가! 마리나 비셋은 그가 물건을 가볍게 받아드는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해머를 무식하게 휘두를 때부터 알아는 봤지만 역시 힘이 엄청 세구나. 난 도저히 못 들겠던데. 사실 그래서 못 쓴 거라구! 제약이야 조금 있지만 내 쌍권총보다 좋은 물건인데!”
“결국 어차피 네가 못 쓰는 물건이라 이거지? 그런데 아까워하기는.”
“그만큼 좋은 물건이니까 그렇지! 이거 험하게 다루면 진짜 총으로 쏴버릴 거야.”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는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벤토리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물건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굉장히 검었고 윤택이 났으며, 두꺼웠으며 길었다. 한쪽 끝에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는데, 정시우는 그것을 보고서야 간신히 감을 잡을 수 있었다.
“이건 네오 암스트롱 사이클론 제트 암스트롱 캐논……!? 완성도 높은데 어이!”
“아니거든!”
어깨를 한 대 맞고 말았다. 마리나 비셋은 바닥을 구르며 반박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라이플(rifle, 소총)이야. 물론 나도 그걸 라이플이라고 우기는 뇌신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아티팩트의 정보를 확인해보니 과연 그러했다.
[뇌신의 라이플(봉인)]
[랭크 ? B+++]
[공격력 ? 1,750 ? 2,550]
[숙련도 ? 0/1,000]
[옵션 - ???]
[뇌신이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무구. 무구의 습득 당시 주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라이플로 개조되었으며, 형태가 고착되어 다시는 변하지 않는다. 마탄 계열 스킬을 보유하고 있을 경우 이 라이플을 통해 마탄을 발현, 보다 강력한 마탄을 발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구의 진정한 능력은 봉인되어 있으며, 숙련도를 모두 채우고, 특수한 조건을 달성하면 1차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
“얼씨구.”
정말 말도 안 되는 물건을 받아버리고 말았다. 아티팩트 이름에 신이 언급되는 건 처음이었다! 지금 가진 공격력도 정말 말도 안 되게 높은데 심지어 이것도 봉인된 상태라고 한다.
정시우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으음, 한숨을 쉬며 결국 그것을 다시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못 받아. 내가 가진 정보보다 가치가 훨씬 높아.”
“아니, 마탄의 강화는 적어도 나한테는 그 보물만큼, 아니 그 이상 가치가 있는 정보야. 그러니까 어서 말해줘. 부탁이야.”
대체 마탄에 가진 집념이 얼마나 대단하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 집념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런 위치에 올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시우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특정한 스킬을 보유하고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 정보인데도?”
“그러면 그 스킬을 얻으면 그만이지.”
역시 제 실력 하나 믿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용병다운 패기였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정시우가 굳이 거래를 거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는 어깨를 으쓱하곤 자신의 인벤토리에 네오 암스트롱…… 뇌신의 라이플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솔직히 자신이 크리티컬 불릿을 만든 과정에 대해 그녀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경악했다.
“이럴 수가, 전투질주……? 그런 마초 스킬이 마탄의 근본적 위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아니, 애초에 근접전투용 스킬과 마탄을 합성하다니…….”
마리나 비셋은 오히려 그 정보를 듣고 난 후로 기분이 더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기우제를 치르는 인디언처럼 정시우 주위를 뱅글뱅글 돌며 화를 냈다.
“그걸 어떻게 하란 말이야, 알고 있어도 실현까지가 너무 힘들 게 뻔히 보이는데!”
“그럼 라이플 다시 가져갈래?”
“안 가져가! 크리티컬 불릿, 반드시 만들고 말 거야!”
과연, 자존심이 강한 만큼 한 번 스스로 납득한 일을 번복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다. 역시 강자는 강한 이유가 있는 법이군, 하고 정시우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런데 기우제를 마친 것인지 드디어 제자리에 우뚝 선 마리나 비셋이 갑자기 말했다.
“그런데 당신 정도로 강한 사람을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대체 어디 있다 이제야 솟아났어?”
“나도 널 모르니까 무승부로 치자.”
“아.”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정시우와 인사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나 비셋이야. 한국의 용오름 길드랑 같이 던전에 들어갔다가 무리다 싶어서 나오니까 갑자기 이쪽도 도와달래서 왔어.”
“그래. 내 정체는 비밀이야.”
“으갸아아아아아!”
그러나 그녀는 이번엔 의외로 금세 진정했다. 그녀는 여태까지 정시우가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성장해왔다고 생각했으므로, 쉽게 자신의 정체를 밝힐 수는 없을 것이라 알아서 납득하고 만 것이다.
“젠장,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한테 당하기만 하는 캐릭터가 아닌데…….”
“내가 오늘 너한테 들은 말 중 가장 믿음이 안 가는 말이다.”
어쨌든 거래는 끝났다. 정시우는 미련 없이 돌아섰으나 마리나 비셋이 그를 붙잡았다.
“어차피 목적지는 같잖아. 같이 움직이자.”
“뭐?”
생각해보니 그랬다. 둘 다 도망친 몬스터를 추적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정시우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어야 하는 입장이고, 혹시나 날개라도 보여 달라고 하면 입장이 궁해지고, 무엇보다도 바깥으로 나오지 못해 수아린과 용세하도 슬슬 답답해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빼고 싶은 건 알겠는데…… 너 여기서 물러나면 내가 먼저 가서 다 잡아버린다? 어차피 너도 보스 노리고 있잖아?”
마리나 비셋이 히죽 웃었다. 악동을 닮은 웃음이었다. 그때 수아린이 그의 품 안에서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킬 일은 없을 거예요. 차라리 그녀와 함께 설악산의 몬스터들을 후딱 정리해버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요.”
“동감입니다, 형님. 저도 좀 더 마리나 비셋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 아얏, 선배님. 죄송합니다. 아야.”
정시우는 그들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돌아섰다.
“좋아, 서두르자고.”
“그렇게 나오셔야지.”
마리나 비셋이 뿌듯하게 웃었다. 그녀는 좀 더 가까이서 정시우의 힘을, 그의 마탄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 그저 기쁠 따름이었다.
그렇게 해서 정시우와 마리나 비셋의 임시 파티가 결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