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27화.
[약하다, 약해! 마무리가 약해!]
“일부러 마무리하지 않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어? 조금 더 분발해보라고!”
망치와 도끼가 격돌하는가 싶으면 그 다음 순간엔 어느 한쪽의 어깨나 주먹이 다른 한쪽의 몸통을 두들겼다. 두들기는 쪽은 주로 정시우였고, 맞는 쪽은 오크였다.
하지만 놈의 일격 일격에 어린 힘은 마나를 다루는 정시우보다도 강했기 때문에 전투의 균형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전투를 즐기는 모습이 좋구나!]
“이렇게 정면으로 치고 박을 수 있는 상대가…… 없었거든!”
오크와 인간이 사나운 미소를 주고받았다. 비록 그들이 휘두르는 무기에는 일격에 상대를 절명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었지만 그들이 지금 이 순간 감정의 교류를 하고 있는 것도 진실이었다.
순수한 전투의 욕망, 파괴의 욕망! 본능적이며 저열하지만 그만큼 찬란하게 빛나는 열정이 충돌을 반복했다. 슬레지 해머와 워 엑스가 스파크를 튀기며 몇 번이고 붙었다 떨어질 때마다 근육이 환희의 비명을 내질렀다.
“하!”
[크핫!]
이전에는 절대적인 힘이 부족해 기술로도 그 틈을 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놈과 충돌하는 순간마다, 놈의 공격을 흘려내고 자신의 공격을 적중시키는 순간마다 정시우는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상쾌하다.’
정시우는 자신을 이렇게나 강한 적과 정면에서 붙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개미굴이, 그 안에서 얻은 레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강한 놈과 싸우는 것도 좋았고, 그런 놈들을 무술의 영역에서 압도하는 것도, 힘으로 깨부수는 것도 좋았다.
지금은 기갑 오크 한 마리를 상대하고 있지만 나중에는 어떨까? 그가 지금보다 더 강해지면 기갑 오크보다 더 강한 상대와 자웅을 겨룰 수 있다. 그 끝에 적을 넘어서고 맞이하는 쾌감은 정말 끝내줄 것이다.
강대한 힘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휘두르는 것, 실로 정시우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그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는, 죽여야 하는 몬스터를 상대로는 힘을 억누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월을 들여 몸에 익힌 기술을 마음껏 써먹을 수도, 보다 성장시킬 수도 있다.
“강타!”
[쿠하악!]
그리고 여태껏 없었던 힘을 얻어 다루는 것도 가능하다!
적의 움직임과 움직임, 그 사이의 필연적인 빈틈에 명중한 슬레지 해머가 놈의 기갑을 완전히 부수어버렸다. 누적된 충격에 오크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피를 한 사발 토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내가 이겼다.”
이번엔 인챈트된 불꽃의 힘도 빌리지 않고, 순수하게 마나와 육체 기술만을 이용해 적을 압도했다. 정시우는 짧은 시간의 극한노동에 지친 육신을 달래듯 거세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빈틈없이 슬레지 해머를 들어 놈의 머리통을 겨누었다.
[내가 졌다.]
기갑 오크 또한 패배에 승복했다. 몇 번이고 서로 뒤로 물러서며 모든 것을 보였다. 처음엔 아니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모든 가능성이 정시우의 승리로 귀결했다.
[전사여, 네가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더는 없다. 너의 기술은 이미 충분하리만치 완성되어 있구나. 다만 그것이 마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는 앞으로 네가 탐구해야 할 과제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단지 그 힌트를 기갑 오크에게서 얻고 싶었는데, 이놈들은 체계적인 무술을 다룬다기보다는 타고난 육체를 효과적으로 놀려 전투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전투술 그 자체에 특화되어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꼬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전투술은 이미 정시우 또한 타고난 것이어서 특히 더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오크와 싸우며 그의 생애 내내 익혀온 기술을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도록 가다듬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고, 발전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내 심장에서 나와 함께 살아 숨 쉬는 스킬을 익히고 싶겠지? 하지만 그것은 전장에서 한계까지 구른 우리 오크 전사들이나 각성할 수 있는 종족의 힘이다. 그러나 인간 전사여, 너는 너만의 가능성을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 편린이 보이는구나.]
“편린? ……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비록 뜻밖의 일이 계기가 되어 얻은 스킬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그 끝에는 기갑 오크 전사들이 다루는 것과 같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적으로 나타났음에도 그의 성장을 기뻐해주는 사이코 오크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조언 고마워. 즐거웠다.”
[나도 즐거웠다. 하지만 경계하라, 인간 전사. 이 뒤로는 수백의 동포가, 그보다 더욱 강력한 전사가, 그들을 총괄하는 부대장 또한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뛰어넘으려면 이 정도 힘으로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
정시우는 기갑 오크의 말에 씩 웃으며 망치를 내려쳤다. 생명력을 다한 오크의 머리통이 박살나고, 한 번 더 내려찍자 달러와 비드 루팅까지 완료되었다.
“결투와 던전 공략은 다른 법이거든.”
방금 기갑 오크와 벌인 전투에서는 어디까지나 정시우가 익혀온 기술들과 마나를 다루는 기본 전투 스킬들을 활용했을 뿐, 그가 낼 수 있는 전력을 다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살기도 억누르고 있었고 슬레지 해머가 지닌 힘도 이용하지 않았다. 순수하게 육신에 지닌 물리력과 마력, 전투 기술만으로 적을 꺾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놈과 일부러 시간을 들여 싸운 데에 그런 사나이다운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데이터는 충분히 얻었다. 기갑 오크의 힘도 완벽히 파악했다. 내가 놈들을 상대로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도.’
여태까지의 던전에선 굳이 몬스터를 속속들이 파악할 필요가 없었다. 돌진만으로 끝나는 던전이 있었고 그의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단순한 놈들로만 가득한 던전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한 수준의 힘을 지닌 적이 득시글거리는 던전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진즉 오크의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었음에도 몇 번이고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물러나며 적의 잠재력을 한계점까지 파악한 진짜 이유였다.
‘마나는 절반 정도 남았나. 지금부터는 마나를 아껴서 써야겠어.’
마나가 전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볼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정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정 안 될 것 같으면 귀환석으로 한 번 물러나 재정비를 하고 다시 들어오면 그만이었다. 지금도 적을 죽일 수 있을 때 죽였더라면 이보다 훨씬 마나를 남길 수 있었으리라.
“좋아, 그러면 다음 방에서는 그걸 시험해볼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번 던전은 방과 방 사이의 복도가 상당히 길어 첫 번째 방에서 이 난리를 피웠음에도 이곳까지 찾아오는 오크가 없었다.
어쩌면 일대일 결투라고 생각해 굳이 참견을 안 한 것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던전이란 ‘방’을 하나의 침범할 수 없는 구역이라 여겨, 플레이어가 먼저 방과 방을 넘나들며 도발하거나 던전을 통째로 무너트리려는 등의 소란을 피우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먼저 넘어오지는 않는 불문율과 같은 것이 있었다.
“아린아, 너는 방 하나 정도 간격을 두면서 따라와.”
“치유 마법이 닿는 거리까지는 다가갈게요.”
그와 오크의 전투를 지켜본 수아린은 더 이상 그에게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던전을 탐험할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물론 그가 솔로잉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영 불안하기는 했지만…….
‘이젠 나도 치유 몇 번 펼치는 정도로 쓰러지지는 않으니까.’
그동안 강해진 것은 정시우뿐만이 아니다. 그와 함께 여러 던전을 돌면서 수아린 역시 서서히 과거의 그녀가 지녔던 힘과 마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서포터란 지하 플레이어와 함께 성장하는 존재. 플레이어의 레벨이 오를 때 서포터의 레벨도 오르고, 그가 마나를 수련한다면 수아린은 마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쭉 달려요, 오빠.”
“그래.”
내심 수아린은 지금 상황을 반겼다. 여태까지 지나온 던전은 정시우가 워낙 압도적으로 쓸어버려, 수아린이 힘을 회복했어도 그를 도와줄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자신이 단순히 그의 옆에서 잔소리만 퍼붓는 짐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할 때가 온 것이다!
“기다리고 있어요, 용세하 씨.”
“굉장한 열정……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해야…… 오크는 강하니까요.”
여전히 듣는 사람까지 축 처지게 하는 말을 내뱉고 있는 용세하. 수아린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의 몸집이 조금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수아린은 그의 힘없는 응원에 고개를 끄덕여 답하곤 정시우의 뒤를 따랐다.
강화 오크의 군락은 하늘성의 26단계 던전 소천전장에 있는 오크 무리만을 따로 떼어내 만든 것과 같은 던전이었다. 다른 무수한 몬스터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없어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던전에서 전투를 벌일 때에 한해서 그 난이도가 아득히 상승해 있었다.
[인간인가!]
[인간 한 놈이 침입했다!]
구불구불한 복도를 한참 따라가면 나타나는 두 번째 방, 그곳은 이미 동굴에서 반쯤 벗어난 형상이었다.
일단 크기가 굉장히 넓었고, 곳곳에 우거진 수풀은 산악지대를 떠올리게 하는 면모가 있었다. 고개를 들어 단단한 천장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정말 동굴에 있나 스스로를 의심하게 될 정도였다.
“씁!”
[핫하, 죽어라!]
[내가 상대해주마!]
무엇보다도 넓은 만큼 두 명의 오크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놈들은 정시우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일시에 덤벼들었다. 정시우는 왼쪽으로 내달려 오크들의 동선이 겹치게 하며 슬레지 해머를 꽉 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놈들을 도발했다.
“너무 느리잖아, 이 굼벵이들아!”
[굼벵이!? 인간 놈…… 오크의 힘을 보여주마!]
역시 오크는 단순해서 좋다니까! 그는 오크 두 놈이 순차적으로 패시브 스킬을 폭발시키며 달려드는 것을 똑똑히 관찰하며 자신 또한 마찬가지로 전투질주 스킬을 발동했다.
“흡!”
상대가 두 마리로 늘었지만 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빈틈이 보이는 순서대로 두들겨주면 그만이다!
[칵!?]
정시우와 보다 가까운 쪽에 있던 오크가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전투질주를 발동해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간 정시우가 휘두른 망치가 기계 팔의 관절 부위를 내려쳤다.
기갑 오크 놈들은 제트 엔진처럼 관절 부위로 압축가스를 분사하며 공격에 추진력을 얻는데, 바로 그 절묘한 순간 망치에 얻어맞는 바람에 그만 가스가 내부에서 폭발하며 놈의 팔을 완전히 거덜내버리고 말았다.
[쿠아아아아아아악!]
[네놈, 감히이이이이이이이!]
한쪽 팔을 완전히 버리고 만 기갑 오크가 끔찍한 고통을 못 이겨 쓰러졌다. 놈의 동료가 놈을 대신해 분노하며 도끼를 높이 들었지만 정시우는 그저 피식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네놈들, 강한 힘을 얻으려고 기계를 이식한 건 좋은데…… 그 덕에 치명적인 틈이 많이 생겼단 말이지.”
[틈? 그 정도는 힘으로 뭉개버리면 그만이다!]
“바라던 바야.”
정시우의 눈이 번뜩였다. 망치를 잡고 자세를 조금 낮춘 다음 순간, 그의 망치에 초점을 맞추고 도끼를 들어 올리던 놈의 가슴팍에 그의 숄더 태클이 직격했다.
[칵!]
“누구 힘이 더 잘 먹히는지 어디 해보자고!”
지닌바 힘이 너무 강했던 탓에 비교적 드러나지 않았던 정시우의 전투의 재능이 기갑 오크들을 상대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누구나가 두려워해야 할 플레이어의 각성을, 아직 세상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