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21화.
[개미굴 에이리어 #84 강화 오크의 군락]
정시우는 눈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를 읽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클리어 제한 시간이 없는데?”
“사람이 죽기 전에 받아 내는 데 성공해서 그런 것 아닐까요?”
추측에 불과한 말이었지만 제법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정시우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아직까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젊은 남자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와 눈을 희번덕거리며 중얼거렸다.
“이, 이건 대체…….”
“간단히 설명해 주지. 네가 리타이어해서 죽을 뻔했는데 내가 널 받아 냈고, 너와 우리에겐 새로이 기회가 주어졌어.”
그러나 남자는 정시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망막에 비추어지는 메시지를 읽느라 바빴던 것이다.
“이런…… 이럴 수가.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끄응, 젠장……!”
“비 맞은 중처럼 뭘 꿍얼대고 있는 거야?”
“아마 지금 저 사람에게만 따로 인터페이스의 알림이 있는 것 아닐까요?”
수아린의 추측이 정확했다.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알림을 빠르게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 끝에.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가 정시우에게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시우는 간단하게 대꾸했다.
“감사할 거 없어. 무리다 싶으면 튈 거거든.”
“그래도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살아 계셨다니 다행입니다, 수아린 선배님.”
“어, 네에.”
수아린은 뻘쭘하니 대답하며 정시우의 곁으로 붙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며 쓰게 웃고는 말했다.
“상황은 얼추 파악했습니다. 이 던전 자체가 퀘스트 던전이라는 것도 파악했고요.”
“그런 거야?”
“물론이죠.”
수아린의 설명이 이어졌다.
“히든 퀘스트라고,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퀘스트가 있어요. 던전 하나가 통째로 퀘스트에 포함될 수도 있죠. 생각해 보세요, 오빠. 죽어야 할 터인 제가 죽지 않고 서포터로 변화하거나, 일반인이었던 오빠가 지하 플레이어가 되는 것도 전부 퀘스트의 보상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정시우는 그녀의 설명에 과연, 하고 납득했다. 그리고 이번에 저 남자 또한 수아린의 경우와 비슷한 퀘스트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물론 정시우는 이미 지하 플레이어이기에 따로 뚜렷한 퀘스트를 받진 않았지만, 남자와 함께 던전을 돌게 되었으니 던전을 완료하는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퀘스트의 보상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미리 말해 두지만 용세하 씨.”
“네, 선배님.”
남자의 이름이 용세하인 모양이었다.
“저희는 결코 이 던전을 클리어한다고 장담하지 못해요. 우선 나타나는 몬스터를 파악하고, 던전에서 도망칠지 전진해 볼지를 결정할 겁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던전에서 도망친다 해도 우리를 너무 원망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설령 정시우 일행이 도망친다 해도 용세하가 당장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굶어 죽을 때까지 던전의 입구를 배회하는 신세가 되겠지.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용세하의 반응은 제법 담담했다.
리타이어했다고 본인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이는 적지 않은데, 수아린이나 용세하나 높은 단계의 던전을 탐색하던 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정신수양이 남다른 면이 있었다.
물론 이들만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만.
“너무 어두운 얘기부터 먼저 꺼내지 마. 아직 제대로 들어가 보지도 않았잖…….”
까지 말하다 말고 정시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칠흑 같은 어둠의 너머, 몬스터가 도사리고 있는 영역을 꿰뚫었다.
“이건…….”
들어가 보기도 전에 적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하는 오한이 정시우의 등허리를 훑었다. 반사적으로 인벤토리에서 해머를 꺼내어 쥐며 몸을 긴장시키는 정시우. 그가 이만큼 긴장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 수아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용세하에게 물었다.
“어디서 누구를 상대로 리타이어 했죠?”
“저는 26단계 소천전장 던전에서 리타이어 했습니다. 엘리트 몬스터인 기갑 오크 천부장을 상대하다가…….”
“하필이면 골라도 그런…….”
수아린은 그에게서 돌아온 대답에 이를 악물고 말았다.
소천전장은 그녀 또한 겪은 적이 있는 던전.
10년의 세월, 플레이어로 활동하며 유독 힘들었던 던전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녀 자신이 리타이어한 32단계, 그 이전의 30단계 던전을 제외한다면 26단계 던전이 가장 빡센 곳이었다.
“왜 거길 들어갔죠? 한국에 26단계 던전은 소천전장 말고도 한 군데 더 있잖아요.”
“하지만 소천전장의 클리어 보상이 너무 압도적이라서…… 길드는 서두르고 있었어요. 수아린 선배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후배 기수들을 단련시키고 있었거든요.”
“끙…….”
26단계 던전, 소천전장.
그곳은 말 그대로 하나의 작은 세계의 패권을 다투는 전장에 플레이어들이 들어가 던전의 중심부로 돌파, 보스 몬스터를 잡아내야 클리어되는 곳이다.
다종다양한 몬스터가 분포하며, 무수한 엘리트 몬스터가 나타나 플레이어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던전이기도 했다.
그곳에 등장하는 많은 몬스터 중에서도, 심지어는 보스 몬스터인 메탈 스네이크보다도 악명이 자자한 엘리트 몬스터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기갑 오크 천부장이었다.
가뜩이나 강한 힘을 지닌 오크가 기계마도공학의 힘을 빌어 더욱 강화된 것이 기갑 오크인데, 천부장은 수십 년 세월을 전장에서 활약하며 각종 전투 기술을 연마해 그 강한 힘을 최대의 효율로 다루는 강자였다.
보스 몬스터인 메탈 스네이크는 그저 몇 가지의 패턴과 무지막지한 힘만 조심하면 되지만, 기갑 오크 천부장의 노련한 전투 기술은 단순히 공략 정보만으로는 상대할 수가 없는 놈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놈을 상대하던 플레이어의 틈을 꿰뚫고 그들의 목에 창을 찔러 죽이는 천부장의 악명은 가히 전 세계적이었다. 더욱이 놈이 끌고 다니는 기갑 오크들 또한 강한 힘과 절묘한 전투기술로 많은 플레이어를 곤경에 빠트렸다.
“제가 속했던 본대도 기갑 오크만은 피해 다녔는데…….”
“저희도 그랬는데…… 운이 없어서 걸리고 말았습니다. 선배님께 한심한 모습을 보여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정시우는 혹시 용오름 길드의 군기가 빡센 것일까, 생각했다.
미니 사이즈의 수아린이 인상을 조금 찌푸릴 때마다 용세하가 움찔하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이는 것이 못내 우스웠다. 수아린은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는 정시우의 눈치를 보며 물러났다.
“오빠, 용세하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이건 저희가 뽑을 수 있는 최악의 패예요. 기갑 오크는 일반병조차 레벨 150을 넘기는 강자예요. 기갑 오크 천부장에 이르면 레벨 180은 되고요.”
정시우도 여태까지 강한 몬스터를 제법 상대했었다. 테스트 던전에서 맞서 싸운 자이언트 블랙 울프가 100레벨, 지네병정소굴에서 싸웠던 보스 지네 또한 그와 비슷했다. 가장 최근에 맞서 싸운 악귀는…… 120레벨 정도 되지 않을까.
“이 오크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그런 몬스터들을 쉬이 잡고 다니는 괴물들이에요.”
“나도 그런 몬스터들을 쉬이 잡고 다니는데?”
“오빠는…….”
수아린은 순간적으로 말을 잃고 말았다. 반면 정시우는 이미 완벽한 전투태세에 돌입해 있었다.
“괜찮아. 결국 기갑 오크 일반병은 그래 봐야 레벨 150이라는 거지? 악귀보다 30레벨 정도밖에 안 높네. 더구나 기갑이라며, 그럼 기계니까 불에 좀 타지 않을까?”
“그야 속성만으로 따지면 그리 틀리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수아린은 그 외에 전투에 관련되는 무수한 요소에 대해 늘어놓으려다가는 이내 체념했다. 이미 그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용세하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정시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실례지만 레벨이…….”
“26.”
“…….”
“물론 일반적인 26레벨은 아니지만요. 아니, 어쨌든 힘든 적이라구요! 아으으, 안 되겠다. 귀환석 내놔요!”
당연하지만 수아린이 혼자 날아가려는 것은 아니었다.
클리어 B랭크의 보상으로 나온 소모품이기는 하지만, 귀환석은 사용하는 그 순간 즉시 하나의 파티를 안전하게 귀환시키는 굉장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아이템.
사실 플레이어들의 안전이 최우선시 되는 하늘성 던전 공략에서 클리어 랭크 D 이상을 받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오히려 여태까지 당연하게 클리어 랭크 EX를 유지해 온 정시우가 기이한 것.
“요는 클리어 랭크 B만 되어도 굉장한 것이고, 귀환석은 그만큼 무척 희귀한 물품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위험한 순간 네가 귀환석을 써서 나를 데리고 튀겠다 그거지.”
“그거예요. 지금 상태를 보니까 오빠는 냉정하게 귀환 시기를 판단하지 못할 게 뻔해요.”
정시우는 수아린의 말에 입술을 삐죽였다.
그는 그저 고블린 백부장보다도, 3차 각성을 마친 악귀보다도, 덩치만 클 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던 자이언트 블랙 울프나 보스 지네보다 강한 적이 나타났다는 사실이 기쁠 뿐이었다.
그러나 목숨이 아까운 것은 정시우도 마찬가지. 위험하다 생각되면 어련히 알아서 귀환석을 사용할 텐데 물가에 나온 아이 바라보듯 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오빠의 위험 판단 기준이 이상한 거예요.”
“흥. 내가 위험하지도 않을 때 귀환석을 썼다간 그땐 너도 잔소리들을 각오를 해 둬.”
정시우는 수아린과, 던전에 들어와 모든 힘을 잃은 용세하를 놔두고 천천히 전진했다.
첫 번째 방에 있는 기갑 오크는 이미 그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래 다가가 기습을 먹이는 전략은 유효하지 않았다.
[크, 인간…….]
정시우가 방을 향해 한 걸음을 더 내딛은 그때 놈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감각이 예리하고, 무예로 단련된 인간. 실로 오랜만에 전사의 자격을 갖춘 인간을 만나 기쁜 반면 어리둥절하다. 네놈이라면 나와 네놈의 힘의 차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어째서 다가오고 있는 것이지?]
“글쎄다.”
정시우의 눈이 새하얗게 빛났다.
그의 망치에 마나가 부여되어 감돌았다. 순간적인 마나의 폭발, 강타를 먼저 익히는 플레이어들과 달리 부여를 먼저 습득한 그는, 마나의 손실을 내지도 않고, 마나의 통제를 잃지도 않고 오롯이 사물에 마나를 주입한 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태 살면서 나보다 강한 놈을 별로 만나 보질 못해서, 그런 놈하고 만나게 되면 어떨지 무척 궁금했었거든. 그런데 그냥 도망쳐선 끝까지 알 수가 없잖아.”
[캬, 캬캬캬캭!]
오크가 유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전투 도끼를 들었다.
놈은 마나를 다루지 않았다. 아니, 못한다고 봐야 한다. 기갑 오크는 마력을 스스로 다루는 것을 포기하고 그 모두를 기계에 부여하여, 기계가 주는 물리력을 폭발시켜 적을 상대하는 종족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마음에 드는 인간이다! 모름지기 전사란 그래야지!]
방에 들어서기까지 한 걸음이 남았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음에도 둘 다 그것을 전투 개시 신호로 삼고 있었다. 마치 결투 장면과 같은 그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며 수아린은 그저 한숨만을 푹푹 내쉬었다.
“정시우 씨는…… 그리 마나가 많지 않은 것 같은데요……?”
반면 용세하는 정시우의 육신에서 활성화되는 마나를 생생하게 느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벨 26이라는 걸 감안해도 적어요. 선배님, 이건 대체……?”
“맞아요. 시우 오빠는 마나의 성장이 유독 낮은 편이에요.”
수아린이 긍정했다. 정시우 본인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마나는 레벨에 비해서도 적은 편이었다.
“아마 워낙에 초인력을 타고난 바람에, 그 반대급부로 마나의 재능은 떨어지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마나를 잘 못 다루냐고 한다면 또 그건 아녜요. 저렇게 적은 마나로 오빠가 얼마나 놀라운 일을 하는지는 보지 않으면 모를 거예요.”
어디까지나 수아린의 추측이었다. 용세하는 초인력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 한판 붙어 보자고!”
[와라, 인간!]
정시우가 끝내 방 안으로 돌격했다! 그에 맞서 도끼를 치켜드는 기갑 오크. 놈의 기계팔이 압축가스를 분사하는 다음 순간, 기요틴처럼 떨어져 내린 도끼와 정시우의 망치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힘에서 밀린 정시우가 균형을 잃지 않고 두 걸음 물러나 바로 서며 눈을 반짝였다. 그의 얼굴이 투지로 가득했다.
“크하아아아아아아아아!”
[크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정시우가 고함을 내지르고, 기갑 오크가 신나게 웃었다.
전초전이 끝나고, 진짜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