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20화.
“난 망했어.”
정시우는 머리를 싸매 쥐며 중얼거렸다. 커다란 TV화면 가득 멋들어진 가죽 재킷을 입은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었다.
목 위를 완전히 감추는 헬멧 탓에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망치를 쥐고 날뛰는 모습이 심히 늠름했다. 패션에 비현실적인 활약상까지 꼭 특촬물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시우가 드디어 공중파에 나왔구나. 오히려 내 생각보다는 좀 늦었네.”
반면 어머니는 담담하게 말하며 사과를 깎았다.
물론 정시우는 엄레이더를 속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못했다. 얼굴 좀 가렸다고 그의 어머니가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우리 아들 원래부터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인벤토리니 뭐니 이상한 능력까지 쓰는구나. 혹시 플레이어가 되기라도 한 거니?”
“응…….”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결국 됐구나. 그런데 왜 말하지 않은 거니. 혹시 무슨 문제가 있기라도 한 거야?”
엄레이더는 언제나와 같이 쓸데없이 예리했다. 정시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플레이어들하고는 조금 달라. 당분간은 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혹시 엄마가 무리한 부탁을 한 거니? 괜히 친구를 구해 달라고 해서…….”
별것 아닌 듯 얘기하고 있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에는 근심이 어려 있었다. 정시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엄마가 아녔어도 어차피 산하동에 갔을 거니까 괜찮아.”
“그러면 혹시 산하동에서 몬스터가 다시 나오지 않는 것도 아들 능력 때문이야?”
정시우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사과를 포크로 푹 찍어 그에게 주며 말했다.
“다른 나라까지 챙기겠다고 괜히 외국 나가지는 마라. 그 나라 사람들은 그 나라가 알아서 지키겠지.”
“되게 냉정하네.”
“난 내 아들이 제일 중요하다. 세상에 초능력자가 우리 아들밖에 없으면 몰라도 그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남은 사과를 상당히 작게 깎아 내 이쑤시개로 콕 찍었다. 그리곤 다시 정시우에게 내밀었다.
“그 꼬마 아가씨도 먹으라 해라.”
“알고 있었어!?”
“힉!?”
은신까지 걸고 숨어 있었는데! 정시우와 그의 품 안에 숨어 있던 수아린까지 기겁했지만 어머니는 코웃음을 쳤다.
“생전 안 사던 인형의 집이니 뭐니 사 놓고, 밤중에 도란도란 얘기까지 하는데 눈치를 못 채는 게 이상하지.”
“역시 엄레이더…….”
“시끄러. 자, 어서 나와서 들어요.”
수아린이 머뭇머뭇 소매 밖으로 기어 나왔다.
어머니는 그녀의 정체를 단박에 눈치챘지만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수아린은 정시우가 어머니를 엄레이더라 부르는 이유를 절절히 깨달으며 머뭇머뭇 사과를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예의도 바르네. 그래서? 이 아가씨를 돕고 있는 거야?”
“상부상조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여자랑 엮이는 재주 하나는 좋아요.”
“여자랑 엮이는……?”
얌전히 사과를 갉아먹던 수아린이 눈매를 일그러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녀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했다. 어머니만이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러면 돈 내놔 봐.”
“양아치다!”
“어차피 달러화로 쌓아 놓고 있을 것 아냐? 맘대로 돈도 쓰지 못하는 상황일 테고?”
정시우가 무언으로 긍정했다.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엄마가 탈 없이 처리해 줄게. 계좌에 카드 만들어 줄 테니 돈은 그걸로 쓰고 다녀. 앞으로 돈 생기면 그 계좌에 넣으면 되고.”
“……어머님이 뭔가 하시던 분이세요?”
“아버지 사업 파트너이긴 하지…….”
정시우는 순순히 달러화를 쏟아 냈다. 100달러 지폐가 우르르 쏟아지는 것을 보며 비로소 어머니의 안색도 바뀌었다.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이만 한 돈이 생겼어? 플레이어들은 다 이런 거야?”
“시우 오빠가 조금…… 특별해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어머니는 일반인이 10년을 일해도 벌지 못할 돈이 그 자리에 쌓이는 것을 보며 그저 기막혀 할 따름이었다. 정시우는 그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너무 많아서 얼버무리기 힘들어?”
“아니, 그 걱정은 하지 마라. 엄마 생각보다 많아서 놀랐을 뿐이지.”
“엄마도 좀 가져도 되는데.”
“아직 아들한테 손 벌릴 만큼 궁하진 않다, 욘석아.”
어쨌든 돈을 맘대로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뜻하지 않은 곳에서 고민이 해결된 셈이었다. 그러나 정시우가 안심하던 그때 어머니가 기습적으로 말해 왔다.
“그러면 이제 독립해라.”
“응?”
“어차피 집에서 할 일도 없지? 이제부터 바쁘게 움직일 텐데 괜히 귀찮게 집으로 돌아올 거 없다.”
“그래도…….”
“엄마 걱정이라면 됐으니까. 지금은 네 일에 몰두하기에도 바쁘잖니.”
정시우가 쓰게 웃었다. 속내를 다 읽어 내 버리고 선수를 치니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알았어. 독립할게.”
“적당한 집 알아봐 주랴?”
“아니, 내가 알아서 할게.”
휴식처 정도면 머무르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정시우는 인형의 집을 비롯해 집에서 챙겨 갈 것들을 전부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사이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한 상 차리겠다며 쇼핑을 하러 나가셨다.
수아린은 거대한 태풍이 지나간 후의 탈력감을 느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머님이…… 되게 쿨하신 분이네요.”
“나 같은 아들을 키우다 보면 이것저것 체념하거나 달관하게 되는 법이지.”
“그것 참 자랑이네요.”
정시우는 수아린의 빈정거림을 무시하며 일어섰다. 그녀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이제부터 바쁠 텐데 지금은 좀 쉬어 두시지.”
“안 돼, 바이크 도색 다시 해 놔야지.”
“…….”
그날 저녁, 어머니는 정말 작정한 듯한 상 가득 요리를 차렸다.
정시우는 아무 생각 없이 요리를 비우면 되었지만, 수아린은 기껏 자신에게 맞게 잘게 자른 요리를 대하면서도 마음껏 그것을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원래대로 돌아올 가능성은 있고?”
“오빠가 이대로만 성장해 준다면, 아마 저도 곧 원래 힘과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것 참 좋은 소식이구나. 그렇게 지내면 많이 답답할 거야. ……아들이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아?”
“그, 그럴 리가요. 오빠는 무척 잘 대해 줘요.”
아무리 작고 귀여운 미니 사이즈라 해도 일단 아들과 관계되는 여자는 모두 며느리 후보로 생각하는 한국 어머니의 근성에 시달리는 수아린!
수아린은 마냥 싫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구원해 주길 바라며 정시우를 힐끗했으나, 그는 떡갈비와 불고기 중 어느 것을 먼저 먹어 치우느냐에 대한 심각한 고뇌를 하고 있었기에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오빠 바보!’
“후흐흐.”
수아린이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 매는 가운데, 오직 정시우의 어머니만이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였다!
다음 날, 정시우는 자신이 번 돈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계좌의 통장과 카드를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았다. 통장에는 정시우가 여러 던전을 클리어하며 번 달러가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앞으로 그 계좌에 입금을 하든 출금을 하든 아무도 태클 안 걸 테니 걱정 마라.”
“불법적인 일이야?”
“합법으로 해결될 것 같았니?”
정시우는 조용히 엄레이더에게 통장과 카드를 받았다. 경의를 담은 경례를 했다가 결국 등짝을 또 한 대 얻어맞고 말았다.
“아들, 아들을 찾는 사람들이 엄청 많더라. 만약 또 활약할 일이 생기면 꼭 헬멧 쓰고 해라.”
“영 내키지는 않지만…… 알겠어.”
“그래. 좀 다쳐도 되니까 죽거나 사지 잘라먹는 일만 없게 하렴.”
“알았어.”
아들과 어머니의 작별인사 내용에 수아린은 아득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어머니의 시선은 이어서 그녀에게 와 닿았다.
“아린아, 우리 아들이 참 칠칠맞아요. 너처럼 야무진 아이가 꼭 곁에 있어 줘야 한단다.”
“네, 네에.”
“그래, 너만 믿는다.”
본인이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부분의 신뢰를 얻은 기분이 드는 수아린이었으나 부끄러워 되묻지 못했다. 정시우의 소매 속으로 숨어 버리는 수아린을 보며 어머니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바이크가 발진했다.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세상이 온통 뒤바뀌었고, 동시에 정시우의 가정환경도 뒤바뀌고 말았다.
정시우는 이제야 비로소 세상 속으로 나서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에게 수아린이 물었다.
“이제 또 던전이 나타날 때까지 무작정 밟아야 할까요?”
“반경 10km까지 탐색이 가능한 탐색기가 있으니 그 정도로 뻘짓을 할 필요는 없어. 비축된 비드의 양이 아주 살짝 불안하기는 하다만…….”
탐색기도 그렇고, 휴식처의 중요성을 절절히 깨닫게 된 지금에 와선 무턱대고 비드를 제단에 바칠 수는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정시우는 비드를 다루는 두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바로 그의 수준에 비해 쉬운 던전에 입장했을 때.
즉 몬스터 비드를 아무리 많이 모아도 제단에 바쳐 나올 소모품이나 아티팩트의 수준이 빤히 짐작될 때이다. 이때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보상을 스킵하고 모조리 휴식처에 부을 생각이었다.
두 번째는 물론 그의 수준에 맞는 던전에 입장했을 때.
어차피 그는 지금 무기와 방어구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갖추고 있으니, 좋은 아티팩트가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해도 무턱대고 그것을 모조리 제단에 바치지 않는다. 일정 비율로 저금을 하되, 강화의 제단이나 유니크 비드와 같은 특수한 상황이 오면 상황에 맞게 비드를 소모할 생각이었다.
“수준에 비해 어려운 던전은요?”
“안 들어가. 저번에도 말했잖아? 나는 확실히 도전을 좋아하지만, 넘을 수 없는 게 빤히 보이는 벽에 헤딩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물론 언젠가 반드시 넘고야 말겠지만 그건 좀 더 강해진 후가 되겠지.”
“그렇게 말해 줘서 다행이에요…….”
수아린은 에휴, 한숨과 함께 대꾸하며 고개를 들었다.
저 너머 하늘에서 나비의 날개를 단 남자가 떨어지는 광경이 보였다.
“어…….”
“아…….”
설마 생애 한 번 조우하기도 힘든 광경을 두 번째로 마주하게 될 줄이야!
수아린은 그저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정시우의 행동은 빨랐다. 그는 당장에 바이크를 멈추어 세우며 대지를 박차고…….
“안 돼요, 오빠!”
그때 수아린이 고함을 빽 지르며 그를 말렸다. 정시우는 당황하며 대꾸했다.
“뭐, 뭐야. 지금 안 받으면 저놈 죽어!”
“받으면 오빠가 죽어요!”
수아린의 다급한 말에 정시우는 본능적으로 멈추고 말았다. 수아린이 랩이라도 하듯 빠르게 뒷말을 토해 냈다.
“저랑 같은 길드 용오름에 속해 있던 남자예요. 저보단 레벨이 낮지만 분명 25단계 던전에 도전하고 있었다구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리타이어했다는 건, 만약 저 남자를 받아 내 던전에 들어간다면…….”
그녀의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개미굴 던전은 플레이어가 죽을 당시의 환경을 재현하는 법. 필시 정시우의 목숨을 장담하기 힘든 던전이 열리게 되리라!
“하지만 32단계 던전에서 리타이어한 너를 받아 냈을 때도 괜찮았잖아.”
“그건 테스트 던전이었으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어쨌든 안 돼요, 오빠!”
“그래도…… 아.”
정시우의 안색이 밝아졌다.
“귀환석이 있으니까 괜찮아. 무리다 싶으면 중간에 빠져나올 수 있어.”
“귀, 귀환석? 그거라면 확실히…… 앗!”
뜻밖의 아이템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수아린이 머뭇거리는 사이, 기어이 정시우는 하늘 높이 점프하여 떨어지던 남자를 받아 내고 말았다!
“뭐, 뭐야?”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는 정신을 잃고 떨어지던 중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받아 드는 남자 덕에 정신을 차렸다. 꼼짝없이 죽을 뻔하던 찰나에 나타난 구세주의 모습은 심히 늠름했으나…….
“좋아, 이걸로 박진감 넘치는 던전 확정이다!”
“역시 어려운 던전에 들어가 보고 싶었을 뿐이었던 거죠! 내가 못살아 정말!”
“이, 이 목소리는? 으아아아아아아!”
머지않아 대지에 착지한 셋은 곧 나란히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