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17화.
[무척 강한 인간이군, 설마 돌팔매로 병사들을 죽일 줄이야……. 하지만 나도 그렇게 죽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마라.]
바닥에 착지한 거한의 고블린이 정시우를 노려보며 말했다. 정시우와 비견되는 마나량, 그를 압도하는 덩치. 확실히 돌팔매로는 죽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돌팔매로는.
“엘리트 몬스터라…….”
놈은 한 손에는 몽둥이를, 한 손에 인간의 사체를 쥐고 있었다. 경찰복을 입고 있는 남자였다. 아까 울렸던 총성은 이 남자의 것일까. 어차피 죽은 지금에 와선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플레이어인가?]
“…….”
고블린 백부장이 인간의 말을 하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아까 다른 고블린들도 정시우를 보고 무어라 외치지 않았던가. 그는 몬스터가 플레이어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굳이 놈과 어울려 주지는 않았다.
“흡!”
대신 인벤토리에서 슬레지 해머를 꺼내어 쥐고 놈을 향해 전투질주를 펼쳤다.
마나를 소모해 바이크보다도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정시우의 양팔에 힘이 불끈 들어가고, 그의 손에 들린 망치는 햇빛을 반사해 빛났다.
물론 아직 전투질주와 다른 스킬을 병용할 만큼의 숙련도는 되지 않는다. 그저 놈이 사정거리에 들어온 순간 망치를 힘껏 들어 올려, 내려칠 뿐!
[난폭하군! 하지만 그것 또한 전사의 덕…… 쿠악!]
고블린 백부장은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시우가 휘두른 해머를 방어할 목적으로 치켜든 몽둥이와 함께 놈의 머리통이 산산조각 나 버렸으니 그도 당연한 일이었다.
“허접 주제에 폼만 더럽게 잡네.”
정시우는 마력도 없이 지네 던전의 엘리트 몬스터도 세 마리 한꺼번에 오버킬을 내는데, 그보다 못한 몬스터를 죽이지 못하면 그게 이상하다. 그는 해머를 회수하며 흥, 코웃음을 쳤다.
어쩌면 놈에게서 정시우가 모르는 지식을 얻어 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짜고짜 놈을 죽여 버린 정시우의 행동은 무척 현명한 것이었다.
“오빠, 봐요!”
[쿠아아아아아아아악!]
[크샤아아아!]
[다시 끌려 들어간다! 저 인간 때문에!]
[크아아아!]
그가 고블린 백부장을 죽인 순간, 지상에 있던 고블린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아무리 외딴 곳에 숨어 있는 놈이라도 예외는 없었다. 놈들이 남김없이 전부 마나의 빛 무리가 되어 지상으로 스며드는 것을 보며 정시우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정시우의 망막 위로 문자열이 나타났다.
[몬스터들이 다시 던전에 봉인됩니다. 하지만 던전을 시간 내에 찾아내 클리어하지 못하면 다시 풀려납니다.]
[던전이 이미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던전 공략 실패까지 남은 시간 4:00:00]
정시우는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착착 호흡이 맞아떨어지는 것도 정도가 있지, 정말로 자신도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숨까지 걸린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승리를 만끽할 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주 거하게 놀아나는 기분이야. 재밌게 됐어, 그치?”
“정말로 몬스터가 지상에 나타나다니…… 하늘성에서 그런 정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반면 수아린은 그저 멍하니 중얼거릴 뿐이었다. 10년차 플레이어인 그녀가 받은 충격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이었던 정시우보다 어떤 면으로는 더 했다.
하늘성과 던전이 나타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에야 사람들도 지상에 몬스터가 나타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을 했고 그런 만큼 플레이어들의 던전 공략을 독려하기도 했지만, 그런 생각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며 많이 무디어져 있던 상태였다.
이제 하늘성과 던전, 몬스터는 그저 소수의 선택 받은 인간, 플레이어들에게 부와 초인적인 힘을 안겨 주는 골치 아픈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어째서? 정말 정시우가 지하 플레이어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무슨 목적으로?
“그러다 머리 빠개지겠다.”
“꺅!”
그때 정시우가 수아린의 머리에 가볍게 손가락을 얹으며 말했다.
“생각해 봤자 결론도 나오지 않는 걸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너무 걱정하지도 말고. 이제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빠질 테고 많은 사람들이 죽겠지만, 그건 몬스터가 없던 시절에도 이미 많이 일어나던 일이야.”
“……오빠 말만 들으면 이 세상에 걱정할 게 없겠어요.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으시면서 잘도 그렇게 진정할 수 있네요.”
“하지만 사실이잖아.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그리고 그건…….”
개미굴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이다.
시간 안에 던전을 클리어하면 이제 이곳에 더는 고블린이 출몰하지 않게 될 것이다. 지금은 그것만 생각한다. 나머지는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물론 그전에 비드를 수거해야…….”
“오빠, 이제 와 드리기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왜?”
수아린이 자그마한 손가락을 뻗어 머리통을 잃고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고블린 백부장의 사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네, 비드 같은 거 없어 보이는데요.”
“…….”
말을 듣고 보니 실로 그러했다. 몬스터의 사체는 루팅을 하기 전까지 일종의 기운을 품고 있는데, 놈에게선 그런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엄밀히 말해 다른 종류의 마나가 느껴지기는 하는데…….
정시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놈의 사체에 다가가 주먹질을 했다. 달러나 비드가 루팅되는 것이 아니라, 사체가 고스란히 그의 폭력에 노출되어 상체가 터져 나갔다.
일단 이 시점에서 루팅이 글러 먹었다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이거…… 뭐냐?”
“저도 처음 봐요.”
문제는 놈의 심장이 뜯겨져 나가고 모습을 드러낸 푸른빛의 결정.
그것을 집어 들자 그 안에서 감도는 마나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양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마나가 결정화되어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놀라웠다.
“사라졌어!”
“괴물들이 사라졌다!”
“플레이어? 플레이어겠지?”
“감사합니다!”
그러나 정시우가 결정을 보다 자세히 살피려고 하던 그때 바깥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사람, 괴물과 맞서 싸우던 사람, 놈들에게 공격을 당해 괴로워하던 사람 모두.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엄청 커! 사, 사람 맞지?”
“여기, 여기 좀 도와주세요! 다리를 다쳐서 움직이지 못해요!”
괴물의 폭력과 고함으로 가득했던 장소가 금세 사람들의 안도와 활기로 가득 찼다. 정시우는 혀를 차며 일단 망치와 결정을 인벤토리 안에 내던졌다.
지금은 탐구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오빠?”
“글쎄.”
그는 주위에 널브러져 있던 고블린들을 살폈다. 표본은 많았지만 놈들에게선 고블린 백부장과 같은 마나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마나 결정은 엘리트 몬스터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고블린 시체에는 볼일이 없다.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겠지.”
“그렇죠.”
조만간 경찰이든 군대든 대대적으로 진입할 것이다. 현장이 진압된 것을 확인하고 나면 구급차도 들어오겠지.
그것을 굳이 정시우가 돕겠다고 나섰다가 쓸데없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정부든 다른 플레이어든, 아직 그들과는 엮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정시우에게는 아직 가장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시간 내에 던전을 클리어 해야 해.”
던전의 위치는 이미 아까 파악해 두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무시하며 인벤토리에서 바이크를 꺼내어 탔다. 해머를 인벤토리에 던져 넣었던 것도 그렇고, 자신이 플레이어라고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동이었다.
“자, 잠깐만요!”
“제일일보 기자입니다, 인터뷰 한 번만……!”
“하.”
바이크에 시동을 걸고, 사람들이 다가오건 말건 발진했다. 설마 그대로 출발할 줄은 몰랐던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서다가도 하나같이 기겁하여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차량이 멈추어 선 거리, 오직 정시우가 운전하는 바이크가 내는 배기음만 요란했다.
“주, 중국집 오토바이?”
“아니, 자세히 보니까 그냥 엄청 큰 바이크를 빨간색과 하얀색으로 칠했을 뿐이야!”
“어째서!?”
뒤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정시우는 바이크 도색을 다시 하기로 조용히 다짐했다. 주목을 받지 않겠다는 그의 계획은 완벽했으나 전부 이 빌어먹을 고블린 놈들이 문제였다.
“저기에 던전이 보여요, 오빠!”
[고블린 군대 집결지 던전 : 난이도 낮음]
[클리어 제한 시간 ? 3:54:31]
이 난리통에도 던전이 위치한 곳만은 고요했다. 세상에서 오직 두 명, 지하 플레이어와 그 서포터인 정시우와 수아린만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이 산하동 공사장 터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인간들이 확인할 수 있는 보다 처참한 흔적 또한 남겨져 있었다. 바로 사람의 시체였다.
“여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다 죽었군요…….”
“아마 몬스터들이 이곳으로 전부 튀어나온 거겠지. 그만한 물량이야. 죽지 않는 게 이상해.”
게임이나 소설, 히어로 무비처럼 사람들이 당하기 전 주인공이 짠, 하고 나타나 모든 괴물들을 물리치고, 인간 모두를 구원하는 일은 현실에는 없다.
제아무리 정시우가 서둘렀어도, 빠르게 엘리트 몬스터를 죽였어도 그가 모든 이를 구할 수는 없었다. 이 공사장에서만 아무런 죄도 없는 인간들이 수십이고 죽어 나간 것이다. 수아린은 그 많은 사람들의 죽음 앞에 넋을 잃고 말았다.
“몬스터가 일반인을…… 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걸까요.”
“처음 하늘성이 나타났을 때도 사람들은 그 비슷하게 생각했어. 서두르자.”
경찰이든 군대든 흔적을 찾다보면 결국 이곳에까지 이르겠지. 그전에 서둘러야 했다.
정시우는 인적이 없는 틈을 타 잽싸게 꼬리를 꺼내어 땅을 팠다. 사흘 동안 익숙해진 꼬리 테크닉으로 눈 깜짝할 사이 던전으로 입장하는 구멍을 만들 수 있었다.
정시우는 망설일 틈도 없이 구멍에 뛰어들었다.
[개미굴 에이리어 #201 고블린 군대 집결지]
[클리어 제한 시간 ? 3:54:14]
던전에 입장하자 익숙한 문구가 정시우를 반겼다. 입구의 상태 또한 테스트 던전이나 지네병정소굴과 그리 다를 바 없어 그를 안심하게 했다.
혹여나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보스 몬스터를 비롯한 고블린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조금쯤 했었던 것이다.
“오, 오빠.”
그러던 그때 수아린이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유령, 있는 것 같은데요.”
“마침 잘 됐다. 혹시 얘는 뭐를 좀 알고 있나 물어보…….”
정시우는 성큼성큼 나아가다가는 멈칫했다. 어째서 수아린이 벌벌 떨고 있는지 그 이유를 금세 파악하고 말았다.
[너희…… 플레이어냐……?]
“흠.”
첫 번째 방, 중앙에서 음산한 목소리를 흘리는 유령. 유난히 붉은빛을 띤 놈의 두 눈. 서서히 놈의 등 뒤로 모여드는 고블린 무리.
그대로 그를 덮쳐 공격하려는 것일까? 아니. 고블린들의 눈 또한 놈과 비슷한 빛을 띤 것이, 아무리 봐도 한편을 먹고 있는 것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플레이어가…… 맞구나! 나를 버린, 플레이어들!]
“이건 또 새로운 패턴인걸.”
그들에게 명백히 적의를 품은 것 같은 유령과 마주하며 정시우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의 걱정은 기우로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