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16화.
“후우. 갈아입을 옷 준비해 줘서 고마워요, 오빠……?”
상쾌하게 샤워를 마치고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수아린은, 인벤토리에서 오토바이 헬멧을 꺼내어 쓰고 있는 정시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헬멧은 또 언제 사셨어요?”
“매스컴 타게 될 날을 대비해서 바이크 살 때 구비해 뒀지. 바로 나가자.”
“정말 서두르신다니까…… 가만, 매스컴? 혹시 무슨 일 생겼어요?”
그러지 말고 샤워라도 하라고 말할 셈이었던 수아린은 정시우의 전신에 감도는 미약한 긴장감을 읽어 내곤 다급히 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정시우는 헬멧을 완전히 뒤집어쓰고, 탐색기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후 인벤토리에 던져 넣으며 대꾸했다.
“몬스터가 세상에 나왔대.”
“네!?”
그 이상은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곧장 바깥으로 나와 바이크에 올랐다.
목적지는 산하동.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세게 밟는다면……!
“꺄아아악! 신호, 신호 아직 안 바뀌었는데!”
“꽉 붙잡아!”
순식간에 스퍼트를 올려 내달렸다. 거구의 청년이 거대한 바이크에 올라타 마구 밟아 대니 주위에서 달리던 차들도 기겁하며 비켰다. 충돌했다간 바이크가 아니라 차가 박살 날 기세였다.
“딱지 날아올 텐데! 면허정지 감인데!”
“번호판 뗐으니까 괜찮아!”
“이 범법자 같으니, 착한 어른은 따라하면 안 되는 짓이라구요!”
지금의 정시우에게는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는 터무니없는 반사신경과 동체시력을 동원해 도로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하고는, 신기에 가까운 주행으로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번개처럼 바이크를 몰았다. 환상에 가까운 드리프트 뒤에는 진한 바퀴 흔적만이 남았다.
“오빠, 저 멀미…… 으게…….”
“쏟지 마.”
그것은 모터사이클 대회 관계자가 보았더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영업하고 싶어 했을 만큼 환상적인 주행이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점점 더 속도를 올렸다. 다행한 점이 있다면, 산하동이 가까워올수록 차량이고 행인이고 급속도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인근 지역은 이미 대피완료된 건가.”
“정말로 몬스터예요!? 하늘성의 몬스터는 결코 던전 바깥으로 나올 수 없다구요!”
“개미굴의 몬스터인지도 모르지.”
정시우의 냉정한 말에 수아린의 마음까지 서늘해졌다.
하늘성이 생겨나고 10년, 전 세계적으로 몬스터가 지상에 나타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이 왜 이제 와서 생겼을까? 어째서?
“설마…… 개미굴이 생겨나서?”
“지나친 억측이라고 비웃고 싶지만 나도 비슷한 심정이야.”
단순히 몬스터의 출몰이었다면 정시우도 그것과 자신을 연관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산하동에 던전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산하동에 몬스터가 나타나? 우연도 이렇게 기분 나쁜 우연이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 나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개미굴 던전과 몬스터가 연관되어 있다는 건 분명해.”
“끄응.”
이 이상은 아직 정시우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서두르는 것이다. 현장을 보고 확인해야 했기에.
다행한 점은 산하동에 있다는 던전이 정시우의 수준에서 쉽게 처리 가능한 던전이라는 것. 그렇다면 그곳에 나타난 몬스터들의 수준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프, 플레이어들은? 오빠가 이렇게 서두를 것 없이 플레이어들이…… 아.”
수아린이 말을 잇다 말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경매일. 오늘은 하늘성에서 주최하는 경매가 열리는 날이에요. 거의 모든 플레이어가 하늘성에 몰려 있을 거예요. 더구나 하늘성과 던전에서는 전자 기기가 먹통이라서 그곳에 있는 플레이어들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도 없어……!”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자연발생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날을 노려 사건을 터트렸을 가능성마저 생겨났다는 뜻이다.
어쩌면 산하동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추가로 생겨났다.
“오빠, 저기 사람들!”
산하동에 가까워지니 경찰들이 급히 구축한 차단선이 보였다. 그것을 지키고 선 소수의 경찰관들은 딱 보기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 신참들은 아예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아아악!”
“칫.”
정시우가 근처까지 다가갈 즈음 타이밍 좋게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혀를 차며 라스트 스퍼트를 올렸다.
“머, 멈춰! 이 안에 지금 괴물들이…… 억!?”
정시우를 발견한 경찰관들이 기겁하며 외쳤지만 그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하고 기어를 조작했다. 순식간에 대지를 박차고 날아오른 바이크가 차단선을 가볍게 뛰어넘어 허공을 내달렸다!
“오빠 바이크 배웠어요!?”
“모든 남자들은 몸이 박살 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모두 바이크를 탈 거야!”
플레이어들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 조건을 충족시키는 정시우가 바이크를 타고 다니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정시우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늘로 날아오른 그를 올려다보는 경찰관들을 깔끔하게 무시하며, 바이크를 그대로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얼마나 거센 힘이 작용하고 있건, 정시우의 소유권이 인정된 물건이라면 가차 없이 먹어 치우는 인벤토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허공에서 바이크가 사라졌어!”
“프, 플레이어!?”
허공중에 남은 정시우는 어렵지 않게 바닥에 착지했다. 경찰관들이 기겁하며 권총을 들어 올렸지만 그는 그들을 무시하며 내달렸다.
이제 그에게도 느껴졌다. 기척, 지상에 있어선 안 되는 몬스터들의 기척이.
그보다 미약한, 곳곳에 숨은 인간들이 내는 기척도 잡혔다. 어떻게든 몬스터와 대항해 보려 애쓰는 인간들의 함성도, 그들이 당하며 내는 비명소리도. 몬스터들의 환희에 찬 고함도 들렸다.
“오빠, 저기! 정말 몬스터가 있어요!”
수아린이 소리쳤다. 정시우 역시 그녀가 소리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인간보다 조금 작은 신장의,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하는 괴물이 있었다. 갈색의 피부, 허접한 가죽옷, 손에 든 대롱…… 수아린이 이를 갈았다.
“고블린! 일반인들을 상대로는 최악인 몬스터예요……!”
“완전 정석이구나. 오히려 왜 여태까지 못 만났나 했다.”
그들이 낸 소리가 어지간히 시끄러웠겠는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고블린이 그들을 발견하고는 크샤악, 소리를 냈다.
정시우는 그것에 대항하듯 바닥의 짱돌 하나를 주워 내던졌다. 수십 미터 거리를 두고 있던 고블린의 머리통이 터져, 쓰러졌다.
“……야구도 배우셨어요?”
“군대에서 멧돼지 쫓아낼 때 돌 좀 던졌지.”
주도로 반을 차지하는 크기의 멧돼지가 정시우가 가볍게 내던진 돌멩이 하나에 머리가 깨져 죽는 바람에 멧돼지 고기로 중대 회식을 하게 된 것도 지금에 와선 좋은 추억이었다.
그 일로 정시우를 아수라라고 부르던 병신 같은 후임 새끼를 반 죽여 놓은 것도 좋은 추억이다.
정시우는 딱히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과거를 회상하며 주위 돌들을 싹 긁어모았다. 충분히 모였다는 판단이 서자, 그는 고개를 들고 냅다 고함을 질렀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악!”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내어 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인가, 그가 내는 고함소리는 어마어마하게 컸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을 자극하는 힘까지 담겨 있었다. 아니,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액티브 스킬 워 크라이를 습득했습니다.]
[워 크라이 Lv1]
[마나를 소모하여 적을 도발하는 함성을 내지른다. 시전자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지능, 마력 차이가 클수록 효과가 커진다.]
“괴물 새끼들 다 튀어나와아아아아아아!”
“꺄아아악! 이게 뭐하는 짓…… 진짜 튀어나왔어요!”
그는 어디 건물에 숨어든 것들을 수색해 죽이고 그런 일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하지만 거센 난리를 피우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요는, 모든 몬스터를 끌어내 죽여 버리면 결과적으로 오케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고함을 지르자마자 사방에서 고블린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키긱! 인가쿠엑!]
동료가 죽자마자 모습을 드러낸 고블린 또한 머리가 터졌다. 직후 놈이 나타난 방향과 반대쪽에서 뭔가가 날아들었지만, 정시우의 가죽 상의를 뚫지 못하고 박혔다.
확인해 보니 그것은 가느다란 금속질의 침이었다. 아마 처음 나타난 놈이 들고 있던 대롱과 비슷한 것으로 쏘아 낸 것이겠지. 끝에 파란색의 액체가 묻어 있어 독임을 짐작케 했다.
“흠.”
“뭐하는 거예욧!”
기껏 막아 냈거늘, 정시우는 그 침을 들어 자신의 손가락을 콕 찔렀다. 그에게 독침을 쏘아 낸 고블린이 그것을 보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하급 마비독에 당했습니다. 독 내성 Lv5가 무력화합니다.]
“좋아, 역시 이 정도는 안 통하네.”
“그렇게 무식한 실험을…….”
고블린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면 방어구로 보호하지 못하는 곳도 독침에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전략을 달리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는데, 어차피 독 내성이 다 막아 준다면 이젠 그런 거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우우, 점점 내 존재의의가…….”
“그러니까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라. 노오력.”
그는 손가락을 찔렀던 독침을 대충 내던졌다. 단지 손으로 던졌을 뿐인데 수십 미터를 가볍게 날아가, 그에게 독침을 쏘아 냈던 고블린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파괴력이 지나치게 강했던 탓에 조금 파괴범위가 넓어져 숨통이 완전히 끊어져 버리긴 했지만.
[키이이익! 쿠에엑!]
[저기! 마나가 많은 인간!]
[동족들을 죽이고 있다! 쿠에에에엑!]
정시우가 등장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순식간에 고블린 셋이 죽어 버리자, 조금 멀리서 상태를 보고 있던 고블린들이 기겁하며 지원을 불렀다.
그는 돌멩이를 하나씩 던져 고블린들의 머리통을 깨부수며 느긋이 걸었다. 고블린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며, 일부러 빈틈을 드러냈다.
[인간!]
[죽어라!]
여기저기서 독침이 날아들어 그의 몸에 박혔다. 그는 얼굴로 날아드는 것만 미리 걷어 내며 다시 고함을 질렀다.
“고작 이것밖엔 안 되냐아아아아아! 네놈들이 매번 몰래 숨어서 약한 인간들이나 상대하는 병신이니까, 이젠 판타지 소설에서도 너희 차례를 스킵하고 바로 오크로 넘어가는 거 아니냐아아아아!”
[키이이이이이익!]
[우리는 강하다! 오크에게 이긴다!]
도발의 효과는 굉장했다!
도구를 이용할 정도로 영리하지만 그만큼 자존심을 건드는 말에 약한 고블린들부터 속속들이 건물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 순서대로 돌멩이에 얻어맞아 머리통이 으깨졌지만 말이다.
“도, 도와주세요!”
인근의 고블린이 전멸하자 비로소 제 목소리를 내는 인간들이 나왔다. 정시우는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인간에게 다가갔다. 마비침을 맞아 움직이지 못하는 여자를 바깥으로 끌어내고 보니, 그녀의 팔에 물어뜯긴 상처가 나 있었다.
“먹으려고 했다고……?”
수아린은 다른 인간이 자신을 볼까 봐 은신을 한 상태였기에 답을 주지 못했다. 수아린 대신 상처 입은 여자가 벌벌 떨며 대꾸했다.
“날 잡아먹으려고…… 식량, 식량으로 삼으려고 했어요.”
음, 아무래도 정시우가 19금 만화를 너무 많이 본 모양이었다. 동족번식을 못하는 고블린이 대신 인간 여자를 납치해 어기야 디영차를 하는 장면을 상상했던 정시우는 반성하기로 했다.
“보호해 주면서까지 싸울 환경은 못돼. 하지만 지금부터 건물 안은 안전할 테니까 깊숙한 곳에서 쉬고 있어. 알겠지?”
“네, 네에.”
정시우는 여자를 부축하면서도 한 손으로 쉼 없이 돌멩이를 내던져 고블린들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있었다. 그에게 자신을 호위해 줄 여유가 없다는 것만은 여자도 충분히 알았다.
“저기, 사거리, 사거리 너머 건물에 괴물이 많아요. 그곳, 사람도 많아서.”
“좋아, 고마워.”
정시우는 여자를 안전한 곳에 대충 던져 놓은 후 전투를 계속했다. 그에 대한 정보가 점점 더 산하동 전역으로 퍼져 나가고, 그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고블린들의 숫자도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이윽고 돌멩이가 다 떨어지자 정시우는 바닥을 쾅! 내리쳐 아스팔트를 파편으로 만들어 그것을 주워 던졌다.
고블린의 사체는 몇 초에 하나 꼴로 늘어나고, 도발도 성공적이어서 점점 더 많은 숫자의 고블린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몰려 나오고 있었지만 정시우의 표정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씁, 원거리 공격수단이 필요하겠어. 던전도 아니고 이렇게 넓은 곳에서 사방에서 튀어나오는 놈들을 상대하자니 영 효율이 안 좋아…….”
“마탄은 어떨까요?”
좋은 지적이었다. 스킬에 익숙해질 기회도 되겠지.
그는 시험 삼아 손가락을 들어 마탄을 쏘아 냈다. 그것에 머리통을 얻어맞은 고블린이 비틀거리며 괴로워했다.
“……돌멩이보다 약한데?”
“마탄이 약한 게 아니라 오빠가 무식하게 센 거예요.”
그때였다. 사거리 너머, 그가 구해 준 여자가 말했던 종합상가건물 옥상에서 다른 고블린들보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괴물 하나가 뛰어내리는 것이 정시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
2미터를 가뿐히 넘기는 거대한 근육질의 덩치에, 고블린답지 않은 우렁찬 포효까지. 놈의 시선은 정확히 정시우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시우는 놈의 강함보다는 다른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엘리트 몬스터 ‘고블린 전사 백부장’ 등장!]
[놈을 시간 안에 해치우지 않으면 던전이 완전히 폭파되어, 보스 몬스터가 지상에 풀려납니다! 놈을 해치우고 더 늦기 전에 던전을 클리어하세요.]
“역시…….”
그의 이가 뿌드득 갈렸다.
상황이 엿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