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205화
마지막 이야기 (하)
# 청와대
박병철이 무심한 얼굴로 신문을 집어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경제지표가 가파르게 추락하고 있다는 헤드라인이었다.
압도적인 표 차로 대통령에 당선된 지도 벌써 이 년 전.
허니문 기간이 끝나자 언론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기사는 대통령의 출신을 문제 삼았다. 대통령은 외교부장관 출신답게 교섭에 강점을 지녔으나, 외교의 문턱이 나날이 좁아지는 정세 속에서는 특기를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젠 예전처럼 비행기를 타고 세계 어디든 자유롭게 누비던 시절은 끝났으니.
에사인들이 지구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개변을 겪었다.
유독 뼈가 아팠던 건 중국의 이탈이었다. 중공의 모든 인민이 의식을 공유하는 초월체가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중국 본토로 이어지는 공항과 출입처가 모조리 문을 닫았기에 현지에 자본을 투자한 기업들이 크나큰 피해를 받았다.
최대의 무역흑자국이 하루아침에 돌아섬에 따라 경기침체는 불가피했다.
대신 에신 공화국이라는 새로운 시장이 생겨나긴 했지만, 15억에 달하던 중국을 대체할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행인 건 일본이 킬데인에게 먹히고도 아직 나라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것 정도랄까.
일본은 여전히 일본이었다.
죽은 시체들이 되살아나 양복을 걸치고 관료 행세를 하는 것만 빼놓고는.
혹자는 그 점을 일본의 변함없는 매력으로 꼽기도 했다.
똑똑.
누군가가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게.”
“대통령님, 간밤에 안녕하셨는지요.”
말쑥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인사를 올렸다.
그는 김한이라는 자로, 1기 내각이 출범했을 때부터 함께해온 정무수석이었다. 지명 당시에는 최연소 정무수석이란 타이틀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었다.
“자네가 나 같으면 안녕하겠나. 피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연일 축제를 벌이고 있는데.”
“그래도 아직 지지율이 견고하십니다. 케이알리서치 조사에서는 다시 35% 선을 회복하신 걸로 나옵니다. 연말에는 호재가 여럿 기다리고 있으니 더 반등을 노려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나는 자네가 긍정적이어서 좋아. 사람이 매사에 긍정적인 마인드로 임하면 안 될 일도 되게 마련이니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기자들이 자네 같은 사람을 보고 배워야 할 텐데. 열 가지를 잘해도 하나 못한 것만을 집요하게 쪼아대니 내가 국정을 볼 힘이 나겠나? 저널리즘이라는 게 언제부터 사람 말을 앞뒤로 잘라다가 클릭장사나 하는 걸로 바뀌었나?”
“저도 기자들의 행태에 큰 우려가 듭니다.”
김한은 적당한 말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대통령과 함께 기자들을 흉보며 일과를 시작하는 건 이제 비서실의 루틴이나 마찬가지였다.
박병철은 점점 열을 올리다 못해 언론규제법을 통과시키지 못한 자당까지 디스에 나섰다.
“...그래서 말일세. 김영판이 그놈이 뭐라고 했는지 아나? 자기들도 고려해야 할 지지율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나 참,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이나 하지 말 것이지.”
“대통령님.”
“장동범이도 한물 다 갔더라고. 군사정권 시절에 확성기 쥐고 영등포 구석구석 돌아다니던 패기는 어따 내다버렸는지 모르겠어. 이제는 초재선 의원들만큼도 강단이 못해. 다음 당청회의 때는 그 양반은 그냥 집에서 쉬라고 해도 되겠더구만. 손주 자랑을 그렇게 하던데, 좋아하는 손주 얼굴이나 실컷 보라지.”
“대통령님.”
김한이 곤란하다는 투로 거듭 박병철을 불렀다.
“음?”
“일정에 맞추시려면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나?”
“예, 차량을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박병철이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오늘은 마법청의 기공식이었다. 기념비적인 사업을 축하하기 위해 여야 대표들과 함께 현장 부지에서 삽을 뜨고 기념사진을 찍는 일정이 잡혀있었다.
“혹시 성진기 그놈도 오나?”
“아시겠지만 저희가 특정 언론을 배제시킬 수는 없습니다.”
“내가 쓰러지거든 그놈부터 잡아넣게나. 직무스트레스의 주범이니까.”
“쓰러질 일이 없으십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할 날이 창창하시니까요.”
“창창하진 않고, 삼 년 남았지. 벌써부터 지긋지긋해지면 안 되는데 큰일이야. 그놈의 언론만 아니었어도...”
“언론 문제는 저희도 통감합니다. 어떻게든 수단을 강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님은 그럼 잠시 대기하시라고 할까요?”
김한이 박병철의 말 중간에 치고 들어왔다. 언론 이야기가 또 나오기 시작하면 대화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기 때문에.
“됐네. 중요한 자리에 나만 늦을 수는 없지. 늦으면 또 그걸 가지고 물어뜯을 텐데 말이야.”
박병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걸쳐 입었다. 그는 외투를 입다 말고 책상 위에 올려둔 사진에 잠시 눈길을 주었다.
젊은 여성이 갓난아기를 안아든 채 해맑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엄마로 추정되는 여성은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동양인이었으나, 아이는 갈색머리인데다가 이목구비도 혼혈 느낌이 물씬 풍겼다.
“대통령님?”
“혹시 자네한테 내가 손주 사진을 보여줬던가?”
“보여주셨습니다.”
김한은 ‘백 번도 넘게요’라는 말은 눈치껏 생략했다.
“그래도 이건 못 봤을 걸세.”
박병철이 그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휴대폰 화면에 조그만 아이를 담은 사진이 끝없이 이어졌다.
# 어느 학교
“여긴 시험에 꼭 나온다.”
한성진이 교과서 한 구절에 볼드 효과를 주며 말했다. 아이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필기를 이어갔다.
“꼭 기억해두도록 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반응이 얼마나 없던지 흡사 무덤가에서 조문을 읊고 있는 듯했다.
“2024년 6월 14일은 판론 대전이 벌어졌던 날이다. 숫자 4가 년도 끝과 날짜 끝에 두 번 들어가니 외우기도 쉽다. 이때 정기호 장군이 쓴 전술이 거북이 등껍질을 닮았다고 해서 귀갑진이라고 부른다. 그림 보이지? 이런 그림을 보면 자동으로 머리에서 귀갑진 세 글자가 떠올라야 한다. 시험 단골이니까 별표 두 개 쳐놓자. 그리고...”
한성진은 종이컵에 떠다 둔 커피로 입가심을 하며 홀로 수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그는 생기 없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생시절 자신이 그렸던 교실이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그때는 자신은 뭔가 다르리라 생각했다.
역사는 암기과목일 뿐이라는 관념을 깨고 싶었다.
내가 맡은 반 정도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나라면 다를 거라고 그렇게 자신했건만, 정신 차리고 보니 자신 또한 널리고 널린 그저 그런 선생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시험에 나오지 않을 이야기다. 사실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지.”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니 관심을 더 보이는 것 같다.
그들의 관심에 힘입어 한성진의 목소리도 한층 고조되었다.
“정기호 장군은 단 한 번도 결투에서 져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딱 한 번 비공식적인 결투에서 졌던 일화가 전해지는데...”
“라힐 님이요?”
창가에 앉은 소년이 흥분한 투로 물었다. 한성진은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소년에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지. 너희에게 먼저 말해두고 싶은 건 이 일화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야사에 불과하다는 거야. 아무도 그 결투를 직접 본 사람이 없으니까. 하여간, 이야기에 따르면 정기호 장군은 그때 라힐 님을 모시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는데...”
한성진의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랬다.
정기호 장군은 사람이 아니라 사실 칼에 깃든 귀신이었다.
라힐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담아낼 명검을 찾다가 우연히 정기호가 깃든 검을 찾아내게 된다.
정기호는 라힐에게 자신과 싸워 이긴다면 당신을 따르겠다고 제안했다. 둘은 삼 일 밤낮으로 치열하게 싸웠고, 끝내 라힐이 근소하게나마 우세를 점하게 되었다.
정기호는 귀신인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버틴 라힐에게 크게 감탄하여 주군으로서 모시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한성진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여겼다.
이런 유치한 야사에 흥미를 느끼는 건 중학생까지가 마지노선일 거라고.
그런데 마침 그가 가르치는 게 중학생이었다.
이야기에 아무런 의의가 없진 않았다.
오직 이름과 숫자, 연혁으로만 존재하는 역사 속 인물에게 캐릭터성을 입혀 수업의 몰입도를 높이겠노라고.
역사는 몇 년 몇 월 누가 여차저차했다라고만 접근하면 너무나도 지루해진다.
그러나 역사를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의 드라마로 해석하면 재미난 소설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다. 다시 수업으로 돌아가자.”
“에이, 선생니임.”
아이들이 한성진에게 칭얼거렸다. 정말로 그의 이야기 솜씨에 만족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수업이 지루해서인지, 진상을 알 길이 없었으나, 한성진은 이쯤에서 선을 긋기로 결심했다.
“조용히 하고, 시험 결과가 좋으면 그때 다음 이야기도 들려주도록 하마.”
“그 말씀 저번 시험 때도 하셨잖아요.”
안경을 쓴 작달막한 아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의했다.
한성진은 저 애가 저렇게나 수업에 적극적이었는지 처음 알았다. 맨날 구석에서 몰래 만화나 보는 줄은 알았지만.
“시끄러, 그때는 선생님도 바빴어.”
“지지난번 시험 때도 그러셨는데.”
“내가?”
“네!”
아이들이 입을 모아 합창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염불 외듯 무미건조한 수업을 이어가다가 자괴감에 빠져 야사 한둘씩 던지고, 그러다가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기며 급마무리하고 떠나는 게 패턴화되어 있었다.
“알았다, 알았다니까.”
한성진은 두 손 들며 항복의사를 표했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안 돼. 시험도 코앞이고, 다른 반하고 수업 일정도 맞춰야 하니까.”
아이들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가슴이 아프지만 월말에 중요한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결과에 따라 학생들의 진로가 갈리는 중요한 기로였다.
교육부는 갈팡질팡하는 중이었다. 종족별로 정서나 학습능력 등이 천차만별이라 매년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교육정책이 매해마다 홱홱 바뀌니 우선 눈앞의 시험에 충실히 임하는 것만이 선생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다행일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역사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아 수업 중간에 소소한 썰을 풀 여유가 있다는 거.
“대신 결과가 잘 나오면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마. 그래........우르술라 님과 라힐 님의 첫 만남이라면 어떠냐?”
“이예!”
“좋아요!”
아이들이 손을 번쩍 들며 환호했다. 이 이야기는 한성진이 아껴온 비장의 카드였다. 야사 중의 최고봉, 사랑 이야기라면 연령을 막론하고 누구나 각광하는 것이라.
남은 수업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평소보다도 훨씬 스무스해서 흡사 빙판을 미끄러지는 듯했다.
한성진은 시험에 나올만한 대목들을 꼼꼼하게 짚은 후에 아이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를 남겼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다들 열심히 한 만큼 좋은 결과가 따르기를 바란다.”
때마침 종이 울렸다. 한성진은 책을 들고 교실을 나서다가, 뭐가 아쉬운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 완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