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204화
마지막 이야기 (상)
# 성벽 위에서
힘겨운 전투였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만 같았다.
전투의 중반부에 이르러서는 지금껏 동고동락해온 동료 대부분이 버티지 못하고 전사하고 말았다.
그때부터는 수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오직 베고 또 벨 뿐이었다.
족히 세 자릿수의 적을 베어 넘겼을 때, 더 이상 적을 찾아 움직일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성벽 아래 어딘가에서 긴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문이 점거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하아, 하아.......”
엘리시아는 방패에 몸을 기대며 가파른 호흡을 달랬다. 이젠 검자루를 움켜쥘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반면 그녀의 곁에 선 소녀는 혼자만 다른 세상을 거닐다 온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방울 하나 튀어있지 않았다.
진소미.
공화국의 정신적 지주이자 라힐 다음가는 실력자.
엘리시아는 소미의 모습을 경외심에 차 바라보았다. 널려있는 시체 대부분은 소미의 작품이었다.
황도 수비군이 이렇게 무기력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의 힘은 그들과 함께 황국의 질서를 지켜왔던 엘리시아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그러나 황국 최정예라는 황도 수비군조차 소미의 앞에서는 장난감 병정이나 다름없었다.
고백하지만 그녀는 처음에는 진소미를 좋아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쳤고, 부딪칠 때마다 엘리시아가 손해를 보았다.
다행히도 엘리시아가 공화국에 충성을 맹세한 후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황국에는 더 이상 그녀의 미래가 존재치 않았다. 황국 자체의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공화국에 몸을 담고 살아가려면 어떻게든 이곳의 실세인 진소미와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야만 했다.
결정적인 반전은 난리통에 찾아왔다. 그니르의 유격대가 라힐의 보급부대를 기습했을 때, 엘리시아는 군을 이끌 직함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깃발을 들고 앞으로 나서서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녀의 활약은 라힐은 물론이거니와 진소미의 주의까지 끌었다.
- 이제부터 너는 나를 보좌해라.
진소미는 그녀를 부관으로 임명해 가까이 두었다. 일생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녀는 소미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번 전투에서도 목숨을 내놓은 듯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다친 곳이 있니?”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진소미 님은 괜찮으십니까?”
“나도 여전해.”
소미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아무렇잖다는 듯이 대답했다. 엘리시아는 실제로 그녀에게서 작은 생채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성문도 떨어졌군요. 아군이 승기를 잡은 것 같습니다.”
부서진 성벽을 넘어 크록과 목생족 전사들이 파도처럼 들이닥치고 있었다. 황군은 아직도 연합군보다는 수가 많았으나, 버팀목이 되어줄 장군급 실력자들을 대거 잃어서 하염없이 무너지는 중이었다.
“그렇네. 확신하기엔 이르지만.”
소미의 시선이 닿은 곳은 질서의 궁이었다. 불과 몇십 분 전 질서의 궁에서 이변이 벌어졌다. 산을 갈아엎고도 남을 거대한 에너지파가 궁의 뚜껑을 날려버리며 하늘 위로 끝없이 치솟았다.
너무나 엄청난 변고였기 때문에 황군 측도, 공화국 측도 저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 유리한 방식으로 해석을 내리기로 했다.
“폐하의 계시가 임하였도다!”
“왕께서 적 수괴의 목을 베었다!”
황군과 공화국 군대는 각자의 해석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납게 부딪혔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속에는 어쩌면 자신들이 모시는 에사인이 유명을 달리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는 라힐 님의 승리를 믿습니다.”
“당연하지.”
소미가 자신 있게 말했다.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이.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하면 돼. 각자 맡은 일만 잘 해낸다면 문제 될 거 없어.”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지금까지 정말 잘 해줬어, 엘리시아. 처음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도 있었지만, 너는 스스로가 남다르다는 걸 거듭해서 증명하는구나.”
소미가 밝게 웃으며 엘리시아를 칭찬했다. 엘리시아는 그럴 때마다 몸 둘 바를 몰라했다.
에사인을 향한 충정은 현세의 복으로 돌아온다. 당장 벌어진 전투만 하더라도 소미가 아니었더라면 수십 번도 넘게 죽었을 몸이었다.
“그러니........앞으로 한 가지 일만 더 해낸다면 널 완전한 내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하명하십시오. 뭐든지 해내 보이겠습니다.”
엘리시아는 가타부타 않으며 고개를 숙였다.
“엘리시아 마르밀.”
“예, 진소미 님.”
“너는 아직도 널 마르밀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예?”
엘리시아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미가 수수께끼 같은 미소를 띤 채 엘리시아를 바라다보았다. 라힐이 속내를 알 수 없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표정이었다.
“너는 공화국 사람이잖아. 황제의 이름으로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온 마르밀 가문은 너한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잖아, 그렇지?”
“하지만 마르밀이란 저의...”
“너의?”
소미가 짧게 반문했다. 엘리시아는 당황을 감추며 팽팽 머리를 굴렸다.
마르밀이란 타이틀은 엘리시아에게 엄청난 이점을 가져다주었다.
남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신분,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부.
가문의 이름만으로 유서 깊은 전사단의 부단장 자리까지 꿰차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폐허가 되어가는 황도를 보라.
저 폐허와 함께 황제를 보위했던 권력들도 저물게 될 터.
마르밀은 더 이상 그녀의 앞날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기껏해야 발목이나 잡겠지.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선을 그어둘 필요가 있었다.
“...제 부끄러운 과거일 뿐입니다.”
엘리시아가 힘주어 대답했다.
“그래야지.”
소미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야당의 당수로서, 유력 에사인의 최측근으로서 그녀의 미래는 활짝 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날 대신해 마르밀 가문을 벌하고 와줄 수도 있겠구나.”
“...제가 말입니까?”
“그 많은 가문원의 명단과 황국 전역에 흩어놓은 재산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몇 안 되니까.”
“벌이라 하심은 어떤 것을 말씀이신지...”
“사형.”
엘리시아가 표정관리에 실패하자, 소미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야, 농담. 재산을 몰수하고 감옥에 넣는 정도면 적당하겠다. 굳이 반항을 한다면 그때는 다른 방법이 없겠지만.”
그것도 엘리시아에겐 무리한 요구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마르밀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장녀였다. 아무리 내놓은 자식이 되었다 하더라도, 갑자기 나타나 부모형제를 구속한다거나 선친의 재산을 몰수하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병사들에게 맡겨도 좋을 일을 에사인이 직접 부탁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아무래도 소미는 그녀를 중용하려는 게 틀림없다. 그러려면 확실한 충심의 징표가 필요하겠지.
게다가 소미는 라힐과 각별한 사이다. 그녀가 소미에게 보인 충심은 라힐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터.
“.......하겠습니다.”
“네 손으로 네 가문을 무너뜨리는 일을 말이지?”
소미가 재밌다는 듯이 되물었다.
“예, 저 아니면 누구도 가능하지 않다는 말씀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래, 난 네가 잘 해내리라 믿어.”
소미가 다시금 엘리시아를 칭찬했다.
엘리시아는 그 순간 이유 모를 한기를 느꼈으나, 불안함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난세에는 각자가 알아서 살길을 찾아야 하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게는 비정해 보일지 몰라도, 결국 앞서나가는 건 그녀처럼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까.
# 본진에서
이네스는 마지막까지 라힐의 당부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상황이 잘못되어감을 느낀 건 우르가 후방기지를 이탈했을 때부터였다. 우르는 몇 번이나 대기명령을 내렸음에도 듣지 않더니, 결국 전령을 마법으로 제압하고는 진지를 뛰쳐나갔다고 한다.
어차피 우르를 막을 사람도 없었다. 그녀가 나설 게 아니라면.
두 번째로 상황이 꼬여감을 느낀 건 성벽과 성문이 점령되고 나서부터였다. 첨탑 위로 승리의 깃발이 올라올 때, 목생족 군대가 창을 거꾸로 쥐고 본진에 들이닥쳤다.
“피하십시오, 이네스 님!”
부관은 절박한 외침만을 남기고 망자가 되었다. 라힐의 당부를 의식해 충분한 예비병을 남겨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생족의 공격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적장을 상대할 간부들이 죄다 부재중인 탓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네스가 직접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서야만 했다. 파도처럼 달려드는 목생족의 물결 속에서, 이네스는 점점 힘에 부침을 느꼈다. 그녀는 에사인에 버금가는 한량없는 지식을 품고 있으나, 마력까지 한량없지는 않았다.
“적장의 목을 가져와라! 비열한 성마족에게 본때를 보여주어라!”
목생족은 그야말로 죽음조차 불사하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이네스는 그들의 숨통을 끊어놓으며 짙은 비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목표의식을 공유하는 동지라고 여겼다.
어째서 욕망의 여제는 마지막 순간에 이런 선택을 내려야만 했는지.
“끄아아아!”
몇 명째일지 모를 목생족이 불에 휘감긴 채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이네스는 손목을 들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았다.
점점 생각하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마침내 유한한 생이 마감할 때가 도래한 것 같다.
이 순간 떠오르는 건 말라붙이의 비극적인 최후였다.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것 같다. 라힐과 함께한다면 불가능이란 없을 거라고.
“...그만하면 됐다.”
문득 머리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욕망의 여제, 나브니가 날아다니는 탈것을 탄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가 라힐의 참모장이었지.”
나브니는 어딘가 모르게 유쾌한 표정이었다.
“가서 라힐에게 전해라. 승리를 축하한다고.”
“대체 왜 이러시나요? 우리는 함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왜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등을 돌려야만 했나요.”
나브니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깔깔 웃었다.
“상처를 줬다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단다. 결핍이 채워진다면 더 이상 욕망이 아니게 될 테니까.”
“당신은 라힐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지 않나요? 이런 행동은 결국 당신에게 화가 되어 돌아오게 될 겁니다.”
“잘 알고 있지. 그래서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지 뭐니. 이 정도로 설레어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당신은 대체...”
“그만.”
나브니가 손을 휘저어 이네스의 말을 끊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날이 올 테니 할 말을 아껴두렴.”
그녀가 탈것을 타고 훌쩍 날아갔다. 이네스는 목생족 병사들이 물러설 때까지 긴장을 풀지 않았다.
마침내 나브니도, 목생족도 보이지 않게 되자, 그녀는 폐허가 된 진지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때마침 무너진 성벽 틈바구니에서 큰 함성이 들려왔다. 라힐의 승리를 알리는 전령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