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203화 (203/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203화

순환 (15)

절대로 황제와 우르를 만나게 해선 안 된다고.

“......이래서였군.”

우르의 입술이 뒤틀렸다.

“이래서 나를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한 거였나.”

우르가 나와 길레악의 중간 지점에 우뚝 멈춰 섰다.

길레악의 생명력은 그사이에도 급속도로 쇠해갔다. 그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며 수천 년 전 자신이 버린 양심을 쳐다보았다.

“비웃어도 좋다.”

“.........”

“네가 짜낸 고름이다. 네겐 비웃을 권리가 있겠지.”

우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길레악에게는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지금쯤 그가 내적으로 얼마나 큰 혼란을 겪고 있을지.

그는 평생 자신이 우르 게네발이란 독립적인 인격이라 믿고 살았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런 기억이 전부 거짓이고, 실은 자신은 누군가의 영혼 조각에 불과했다는 게 밝혀진다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죽여라.”

길레악이 말했다.

“이번만큼은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죽어야만 이 비참한 순환도 끝이 난다.”

“헛소리 듣지 마라. 우르. 나를 봐, 이쪽을 보라고.”

길레악의 고개가 서서히 모로 기울어졌다. 그의 동공에서 빛이 빠져나가자, 마력의 흐름에 큰 변동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길레악의 힘이 모조리 우르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우르의 몸 주변으로 폭풍 같은 아우라가 발출되어 궁을 주춧돌부터 뒤흔들어놓았다. 기둥이 가로로 접히고, 벽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휘날리는 먼지 속에서 우르의 번갯불 같은 안광을 꿈쩍도 않고 쳐다보았다.

“.......우르, 그러지 마라.”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

나는 실시간으로 그의 마음이 점점 옅어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아르세니오가 우려했던 대로 황제로서 각성 중이었다.

“내 말 듣고 있냐, 우르? 그 미친 새끼 말은 무시하라니까!”

“라힐.”

우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음성과 사념, 어느 쪽으로 메시지가 전해진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비로소 모든 것이 명료해진다. 나는 왜 가면을 써야만 했는지, 왜 백성들 앞에 나서면 안 됐는지, 나란 존재를 억압하는 모든 것이 평생토록 의문이었다. 진실을 알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각오했었지.

하지만 마침내 드러난 진실이란 기대 이상으로 잔혹하군. 내겐 묻을 과거라는 게 없었다. 나는 과거 그 자체이자 과거를 도려낸 주체였다. 나는 황궁 주춧돌에 묻은 피와 오늘날 병사들이 흘린 피에 모든 책임을 지는 자였다. 나는, 나란 놈은.......”

우르의 목소리가 잠시 끊기는가 싶더니, 가늘게 이어졌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의 괴로움이 또렷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기억에 투스라의 기억을 덧씌우는 중이었다.

자신의 업보에 사로잡혀 마음을 잊기를 택한 황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너는 내 손으로 임명한 외무부장관이다. 내가 자르기 전엔 넌 아무 데도 못 간다고.”

“너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보냈던 나날이 기억난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잠에 들기까지 모든 순간이 기적 같은 시간이었다. 익숙지 않은 일 때문에 자문을 구하고, 컴퓨터라는 것도 만져보고, 내가 아닌 남을 위해 궁리하는 경험이 너무나도 즐거웠다. 이런 형태의 삶도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지. 정기호와 함께 마셨던 맥주도 빼놓을 수 없겠다. 선선한 테라스에서 밋밋한 음료와 함께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던 그때가 거짓된 삶에서 최고로 행복할 때였다.”

“지금도 늦지 않았어. 맥주는 얼마든지 있다고. 정기호도 어디 안 갔고, 네가 안 가본 멋진 테라스가 세계에 지천으로 널렸다.”

“아니.”

그가 고개를 들어 붕괴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길레악의 말이 옳아, 라힐. 역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 역사가 한 사람에 의해 쓰인 것이라면 더욱이나.”

“그 사람이 너는 아니잖냐? 너는 다른 사람이잖아?”

그가 슬픈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길레악의 대부분의 마력이 그에게 전이되었다. 영혼 일부가 소멸하며 이전보다는 약해졌으나, 나로서는 여전히 감당하기 힘들 만큼 거대한 크기였다.

“순환에 끝을 맺어다오. 다음 시대는 이보다는 나을 것이라 약속해다오.”

그가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고맙다, 끝까지 날 막으려고 노력해줘서.”

우르의 몸에서 번쩍이는 광채가 발출되었다. 그의 영혼은 이 순간 황제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었다.

하나로 합쳐진 영혼은 이윽고 거대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마력이 멋대로 폭주하며 신체를 갈가리 찢어발기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영혼이 소멸해가는 모습이 흡사 노심용융을 일으킨 원자로를 연상케 했다.

“우르!”

나는 반사적으로 대검을 소환하려다가, 오른팔이 날아가고 없다는 걸 자각했다.

설령 팔이 멀쩡했다 한들 영혼의 소멸을 막을 수단은 내게 존재치 않는다.

본디 투스라는 스스로 죽일 수조차 없을 만큼 강대한 힘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의 일부인 길레악이 소멸함으로써 이젠 충분히 자신을 죽여볼 만한 위치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가 사라진다면 우리로서는 최대의 강적이 알아서 자멸하는 셈이니, 자연히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겠지.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승리를 원치 않았다. 나는 왼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나는 마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우르, 아니, 투스라의 죄업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몸이 움찔거린다.

네 마력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어.

하지만 죄업은 더 대단하거든. 대단하다 못해 산맥을 하나 세울 지경이라고.

나는 이를 악물며 그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의 카르마를 컨트롤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움찔거리는 건 잠시였을 뿐, 내 모든 마력을 쏟아부어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나는 삽시간에 다리 힘이 풀릴 정도로 탈진해버렸다. 제어를 벗어난 빛은 사물을 창처럼 관통해 성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성과 함께 우르의 소멸도 속도를 붙였다. 기껏 복원해놓은 피부가 순차적으로 해체되어 근육과 뼈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우르!”

나는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더 이상 내겐 그의 소멸을 막을 수단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였다. 왼쪽 창측 어딘가에서 비둘기가 날아드는 듯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이 난리통에도 기적같이 형태를 유지 중인 창틀이 하나 있었다. 한 쌍의 날개를 가진 소년이 빛을 등진 채 창틀에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황자님, 그리고 라힐 님.”

소년이 방긋 웃으며 인사했다.

본디 순백색이어야 할 날개가 온통 피로 더럽혀져 있었다. 소년은 한눈에 보기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채였다. 가냘픈 팔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는 게 보였다.

“엿차.”

그가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이 각도에서는 그가 입은 상처가 더 잘 보였다. 기다란 무기에 꿰였던 듯 주먹만 한 동공이 등에 자리했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그를 부축해주고 싶었으나, 나부터도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엎어진 채 황자를 올려다보며 바보처럼 웃었다.

“생각해봤는데요. 저는 황자님이 저 같은 놈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실 리 없다고 여겼어요. 무엇 하나 내세울 거 없는 저 같은 애가 황자님의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줄곧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며 부정해왔는데, 혹시 여기까지 와서 그게 아닐 수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다면 저는 얼마나 한심한 걸까요?”

우르로부터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강렬해진 빛이 아르세니오의 몸까지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죄업을 끌어모아 아르세니오를 움직이려 해봤으나, 그에게는 내가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죄업이 존재치 않았다.

아르세니오는 엎드린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겠다는 듯이.

“아르세니오, 여기로 와!”

머지않아 빛이 정점에 도달했다. 나는 용을 쓰며 아르세니오에게로 달려갔다.

마력이 고갈됐기 때문에 오직 방어구의 성능만 믿는 수뿐이었다.

빠우우우우.

정점에 도달한 빛이 기둥처럼 솟아 하늘 위로 발출되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은 수십 층에 달하던 황궁 전체와 종탑, 성루를 모조리 집어삼켜 공허로 되돌려버렸다.

짙은 먼지가 시야를 온통 가로막았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먼지가 가라앉을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했던 황제의 마력반응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그의 힘은 영혼을 연료로 삼아 무한한 우주로 뻗어나갔다.

뭉게뭉게 피어나는 연기 속에서 어렴풋이 한 사내의 실루엣이 보였다. 사내는 비익족 소년을 품 안에 안고 있었다.

“한심하지 않아.”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내가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한 달이 흐른 후였다. 시간이 한 달이나 지났다는 것도 뒤늦게야 들어 알게 되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온통 새하얀 천장과 복잡한 기계장치뿐이었다. 뇌리에 단단히 박힌 광경이었기에 그때는 절로 PTSD가 도지고 말았다.

혹시 또 그 엔딩인가.

나 또다시 태어난 건가.

그 고생을 하고 도로 신생아 신세라니, 무슨 놈의 운명이 이 모양이냐.

“뭐 하는 것일까?”

잡생각을 날려준 건 우르술라의 첫마디였다.

“........누님?”

누님이 침대 옆에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을 넝쿨처럼 늘어뜨리고는, 책을 펼쳐 든 채 나를 멀거니 쳐다보는 중이었다.

“정신을 차렸으면 인사부터 해야지, 왜 눈만 말똥거리는 것일까.”

“저 안 죽었습니까?”

“죽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느냐.”

“......그렇군요.”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자 볼이 뜨뜻해진다.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제가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습니까?”

“글쎄다.”

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간단히 셈을 해보았다.

“한 달은 지난 것 같구나.”

“그렇게나 오래요?”

“그동안 쉬지 못한 걸 몰아쉬었다고 생각하거라.”

“그러면 누님은....”

나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너른 병실엔 그녀가 살림을 차린 흔적이 역력했다.

“나라면 걱정할 거 없다. 네 잠꼬대를 듣느라 지루할 틈이 없었으니.”

“...거짓말인 거 다 압니다. 제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전해서 다행이구나.”

붉은 입술이 둥그런 호선을 그렸다. 나는 그제야 우리의 대화가 완벽한 한국어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이블에 놓인 책 대부분이 한국어 교재였다. 펼쳐진 페이지 위엔 투박한 가죽 주머니가 놓여있었다.

“그나저나 결국 저건 뭐였습니까?”

나는 주머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주머니는 그녀의 손을 거쳐 내게 돌아온, 전생의 유품이었다.

“글쎄다, 아직도 네가 의미를 모른다면야.”

“누님이 제 장례를 치르고도 유품을 따로 모아 보관했을 정도로 절 남다르게 생각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죽었을 땐 결코 그러시던 분이 아니셨죠. 게다가 그걸 우티르의 손에 들려 돌려주기까지 하셨으니 분명 특별한 의미가 있기는 할 텐데, 저는 도대체 저런 평범한 물건에 어떤 의미가 있을지는...”

우르술라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세상에 이런 바보가 다 있는가 하는 표정으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