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202화
순환 (14)
결국 아르세니오가 옳았다. 그의 발언은 자신이 황제 본인이 아니라고 시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는 지도자가 바뀌었던 걸까?
황제가 칩거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모르겠다.
내가 확신하는 건 그가 나보다 아득히 강하다는 점뿐이다. 마력의 상한을 가늠할 수조차 없는 적은 그가 처음이었다.
“진짜 황제는 어떻게 됐지?”
“파편을 데리고 나간 건 너이지 않나.”
“진실을 아는 건 너뿐이잖아.”
“그랬군.”
그가 희끄무레한 미소를 지었다.
“자주 잊는단 말이지. 용서해라, 인간의 정신을 오래 매만지다보면 내 생각이 곧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거든.”
“역겹다고, 너.”
“그 불쾌한 감정을 지금 만끽해두는 게 좋다. 잠시 후면 무엇이 불편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될 테니까. 황제가 어떻게 됐냐고 물었나? 그 가련한 사내는 자신의 업보에 짓눌린 나머지 모든 걸 놓아버렸다. 자신의 삶마저 말이야.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수단으로도 그의 질긴 목숨을 끊을 수는 없었다. 심지어 궁극에 닿았다고 일컬어지던 그 자신의 힘으로도.”
“황제가....... 자살하려 했다고?”
“놀라운가? 대륙 전부를 짓밟고 우뚝 선 자의 나약함이? 나는 조금도 놀랍지 않았다. 마력이란 어디까지나 현상을 이루는 구성요소일 뿐이다. 마력을 많이 보유했다고 해서 정신마저 굳건하리라는 보장은 없지. 기실 마력이 많을수록 정신은 더 나약해지는 경향이 있는 듯하더군.”
마력이 많아졌다고 정신력까지 강해지는 건 아니라는 점.
그것만큼은 공감한다. 나 스스로도 느끼는 바이니까.
“그래서 나약해진 황제의 마음을 지배해버린 거냐?”
“그 반대다.”
“반대라니?”
“그가 먼저 내게 부탁했다. 자기를 지배해달라더군. 번민은 마음에서 비롯하기 마련이니, 마음을 지워버린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아니겠냐면서.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처럼 강력한 영혼을 지배한다는 건 쉽게 겪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간과했던 건 그의 영혼의 크기였다.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으나 나는 고작 텅 빈 육신과 영혼의 일부만을 차지했을 뿐이다. 머물 그릇을 잃은 그의 영혼은 조각조각 쪼개진 채 이 땅을 떠돌다가, 가끔 형체를 지닌 채 나타나곤 하더군. 그게 바로 너희가 ‘황자’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그가 옥좌에서 일어나며 팔을 벌렸다.
“이만하면 설명이 되었는가?”
“전혀.”
“잘 됐군. 나도 네게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 정신을 지배해버리면 간단히 알아낼 수 있겠으나, 기왕이면 네 입을 통해서 듣고 싶구나.”
삼 분의 이.
검자루를 쥔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하다. 내게 주어진 기회가 아주 좁으리라는 걸 잘 안다.
어떻게든 그의 방심을 이끌어낸다면 살을 내주고 뼈를, 아니, 뼈를 내주고서라도 뼈를 취해야만 한다.
“물어보시지.”
“죽음이란 어떤 느낌이더냐? 환생을 겪어보니 죽음에 대해 생각이 바뀐 점이라도 있느냐?”
“그게 왜 궁금하지. 어차피 죽을 일도 없을 놈이.”
“그야 마음이 닿지 못하는 몇 없는 영역 중 하나니까. 죽음의 에사인이 존재한다면 그에게는 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줄곧 해왔다.”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 과정은 기억하고 있지 않아. 다만 죽음 자체에 대한 생각은 바뀌었지. 한 번쯤은 겪어볼 만하더라고. 사람이 머리가 굳어버리면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인 양 틀 안에 갇히게 되거든. 나는 이런 사람이니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랬는데 막상 다른 세상에서 태어나 보니까 그거 다 부질없더라.
너한테도 추천하마. 한 번쯤 죽어보면 지금 네가 아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거다. 네가 집착해 마지않는 저 금빛 의자가 누군가에게는 하찮은 돌덩이에 불과할 수도 있고, 네가 하찮은 돌처럼 취급하는 무언가가 실은 네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보석일 수도 있는 거라고.”
“고맙지만 사양하도록 하지.”
“그러시던가. 다른 질문은 없나?”
“준비가 되려면 아직 멀었느냐?”
그가 놀리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
역시 그는 내가 기술을 준비 중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었다.
“마음껏 시간을 가지거라. 여기까지 온 마당인데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참 아쉽네, 난 너와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이 없는데.”
“그랬다면 진즉 검을 뽑고 덤벼들지 않았겠느냐. 인내심이 많은 편이 아니라고 들었다.”
“못 믿겠으면 읽어봐, 네 잘난 권능으로. 이미 난 네 모가지를 딴 후 부하들과 파티를 여는 중이라고.”
“너는....”
발동.
푸른 불꽃이 대검을 삽시간에 뒤덮었다. 엄청난 양의 마력이 초고속으로 응축되어 타오르는 용의 형상을 갖추었다. 나는 자리를 힘껏 박차며 그에게 돌진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단 한 번의 기회.
.......아니, 애초에 기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나를 쳐다보는 순간, 나는 왜 그와 싸워야 하는지 이유를 잊었다.
왜 이곳에 왔는지조차.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왜 분노하는 거지?
난 그런 놈이 아니었잖아.
난 컵라면에 뜨신 물만 부어놔도 행복해하는 놈이었다고.
야근으로 지친 몸뚱이에 맥주만 들이부을 수 있어도 난 충분했다.
여기서 욕심을 더 부려보자면 누님 곁에서 가늘고 긴 삶을 이어가는 정도?
그랬던 놈이 대체 무슨 부귀를 누리겠답시고, 언제부터 그렇게 대단한 놈이었다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검을 들고 설치는 건지.
길레악에게도 못 할 말을 한 것 같다.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는 건 그가 아니라 나니까.
다르마알을 발호하게 한 것도 나고, 도시에 정주해서 대대손손 행복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도 나다.
그렇다면 내 여정은 여기까지인 게 아닐까.
도대체 나 따위가 뭐라고, 수백만 명의 사람이 고통스럽게 죽어야만 하나.
그 투스라조차 업보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음을 버렸다잖아. 나같이 하찮은 놈이 왕관의 무게를 견딜 리가 없다. 내 승리는 그저 악의 순환을, 또 다른 황제의 탄생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래, 그만두자.
잠깐이면 될 테니까.
잠깐만 눈을 감으면 모든 게 편해질 텐데, 이상하게 아까부터 어깻죽지가 아팠다.
무시를 하려야 무시를 할 수가 없을 만큼의 격통이었다. 어깻죽지가 떨어져나갔다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다.
“흐으으........”
나는 어깨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렸다. 머리를 감싸며 절규했다.
“으아아악!”
그 순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허억, 허어억......”
주변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금빛 옥좌가 조각조각 부서진 채 발치를 나뒹굴었다. 정면의 벽은 뻥 뚫려 바깥 풍경이 훤히 내다보였고, 검은 연기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성큼 다가왔다.
나는 옥좌의 잔해 속에서 앞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부서진 벽 가장자리에 황제라 불리는 사내가 몸을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에는 울토르의 대검이 깊게 꽂힌 채였다.
피.
위대한 에사인의 성혈이 판석을 붉게 물들인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내가 졌다.”
길레악이 기침을 한 차례 쿨럭이며 말했다. 나는 그의 입가를 따라 흐르는 선혈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비로소 내막을 깨닫고야 말았다.
나는 그가 내 정신을 손쉽게 지배하리라는 걸 예상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찼을 때 소검으로 내 오른팔을 잘라버렸다.
도박이라고밖에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는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나를 지배할 수 있었다. 스스로 팔을 자르는 미친 짓거리가 그의 집중력을 아주 잠시 동안 흩어놓았다.
그 잠깐의 시간이 내가 바란 전부였다. 주인 잃은 팔이 대검을 쥔 채 유성처럼 날아가 그의 가슴팍에 적중했다.
길레악은 무기술의 대가가 아닐 거라는 거.
오직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만으로 권좌에 올랐을 거라는 거.
어쩌면 극한의 고통에 기대어 그의 정신지배에 저항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
단 하나의 가정이라도 삐끗했다면 지금쯤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고 있었겠지.
뼈로 뼈를 취하겠다는 도박수가 기적적으로 먹혀든 거다.
치이이익.......
나는 마력을 열기로 바꿔 어깨의 절단면을 억지로 지혈했다.
당분간은 제후라처럼 외팔이로 살아가야 할 것 같다.
기계팔을 달거나, 차수진 박사의 실험대에 오르거나,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으면 변화의 에사인의 재수 없는 면상에 대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
“...크윽.”
길레악이 미간을 찡그리며 작게 신음했다.
대검에서 푸른 불길이 일어나 그의 몸 전체로 번져갔다. 비술이 그의 영혼을 삼키기 위해 기를 쓰는 중이었다.
이 자리를 빌려 이네스에게 다시금 감사하도록 하자. 길레악의 마력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대비를 충분히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술이 아니었다면 데미지를 주는 게 불가능했을 정도로 방어벽이 두터웠다.
얼마나 강한가 하면, 비술을 적중시켜 완전히 무력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흡수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였다.
“아, 죽음이 다가오는군.”
그가 눈을 반쯤 뜨며 말했다.
“두렵나?”
“두렵다. 죽음과 탄생 사이에 무엇이 날 기다릴지 모르기 때문에.”
“네가 스스로 바란 적도 있었잖아.”
“.......그건 내가 아니다.”
“그건 네 일부가 맞아, 인정하라고.”
“나는 그 나약함을 도려낸 지 오래이니라.”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부정했다.
첫 번째 권능, 길레악.
그의 진짜 정체는 다름 아닌 황제 본인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텐데, 알고 보면 간단하다.
투스라가 곧 에신 템이고, 에신 템이 길레악이라는 거지.
언제부터 이걸 알았냐고?
글쎄, 동군을 지휘하고 있다는 놈이 여기서 황제 노릇을 하는 걸 보면서일까.
아니면 본체의 영혼 일부를 아들로 받아준 관대함에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지배한 육신이 부서졌을 뿐인데 골골대며 죽어가는 모습을 봐서겠지.
황제는 자신의 죄업에서 도망치기 위해 길레악이라 불리는 가상의 인격을 만들어냈다.
길레악은 모든 도덕률에서 자유로운, 이른바 양심의 부재상태가 응집된 존재였다.
나는 땅에 나뒹구는 소검을 챙겨왔다.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마지막 자비를 베풀 셈이었다.
길레악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숨만 힘겹게 내쉬다가, 갑자기 뭐가 재밌는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드디어 납시셨군, 내 오점이.”
뒤통수가 찌릿찌릿해진다. 나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우르가 굳은 얼굴을 한 채 대전 입구에 서있었다. 그의 시선은 쓰러진 황제의 얼굴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뚜벅뚜벅.
그가 걸어올 때마다 유한한 시간이 파국을 향해 치닫는 느낌이 들었다. 꾹 다문 입술이 닫힌 빗장처럼 도무지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서 그니르와 아르세니오가 경고한 최악의 가정을 떠올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