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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201화 (201/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201화

순환 (13)

정면을 돌아가는 계단까지의 거리는 약 백여 미터였다. 그러나 끽해야 사오십 보 전진하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끄아악!”

휘황찬란한 중갑옷을 입은 전사가 비명을 지르며 성벽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의 빈자리는 곧 다른 자로 메워졌다.

앞을 가로막는 건 수비부대 중에서도 최정예일 것이라 추정되는 전사단이었다. 실력은 흑철 전사단과 비등한 거 같다만, 장비의 질이 혀를 내두를 만큼 좋았다.

아마 카둔의 작품이겠지. 저들의 갑옷, 방패, 검, 모든 것이.

영광의 용광로가 수도에 자리할 때, 카둔은 황제를 위해 수천 년간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들겼다. 그녀의 지칠 줄 모르는 장인정신은 이 순간 내게도, 적에게도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비켜라!”

나는 대검을 종으로 횡으로 사정없이 휘둘렀다. 피보라가 파도처럼 일어나며 없는 길이 생겨났다.

근위전사들도 눈부신 솜씨를 선보였다. 그들은 기회가 닿는다면 막시무스의 권좌를 노릴, 준비된 찬탈자였다.

두꺼운 방패로 공격을 막은 뒤, 전봇대 같은 중병기를 한손무기처럼 휘둘러 착실하게 후과를 돌려준다.

기계 같은 냉철함,

뒤를 돌아보지 않는 무자비함.

폭력이 형상화된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나는 형상화된 폭력을 인도하는 전장의 신인 것이겠고.

“성마족의 왕이 내려옵니다!”

“막을 수가 없습니다!”

장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늦어도 너무 늦은 비명이었다. 우리는 이미 계단을 내려와 탁 트인 가도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근위전사들이 들러붙는 적들을 방패로 후려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무를 깎아 만든 바리케이드는 그들의 육탄공격에 걸레짝처럼 찢겨져버렸다.

어떻게 거인과 싸워 이겼는지 알겠다. 저 체구 안에 거인을 능가하는 힘이 알곡처럼 들어차 있는 거지.

여기서부터는 길이 순탄했다. 질서의 성까지 십차선 도로 못지않은 대로가 뻥 뚫려 있으니까.

나브니는 지금 이 순간도 발파공처럼 성벽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는 중이었다. 각각의 구멍으로 팔십만이나 되는 목생족 전사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제아무리 황군이 많다 한들 모든 구멍을 막으면서 나까지 견제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으며 십 분간 대로를 달려갔다. 기분 같아서는 이대로 무혈입성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질서의 성에서 기운이 한 번 더 뻗어왔다.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이번에는 더욱 구체적인 느낌이 전달되었다.

그것은 정기호나 울토르처럼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종류의 투기는 아니었다.

다만 그가 나와의 만남을 원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운의 주인은 내가 그곳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여부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우리는 질서의 성 문턱에서 최종 바리케이드를 맞닥뜨렸다. 약 삼백 명가량 되어 보이는 전사들의 집단이 인의 장막을 형성 중이었다.

전사들은 가슴께에 꽃문양이 들어간 검은 갑주를 제식으로 장착했다. 빼어 든 칼날은 눈처럼 새하얬고, 방패에는 황가의 문장이 징처럼 박혀있었다.

장비의 때깔만 봐도 알겠지만, 지금까지 두부 썰듯 썰어온 잡병들과는 격이 다른 놈들이었다. 느껴지는 압박감으로는 근위전사 못지않았다.

장신의 전사 한 명이 스윽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이 투구를 움켜쥐자, 갑옷 틈바구니에서 검은 연기가 드라이아이스처럼 꿀렁꿀렁 새어나왔다.

이윽고 밀랍인형처럼 창백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저 생기 없는 낯짝과 구면이었다.

“간만이군, 이라올라.”

죽은 물고기 같은 흐릿한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여기서부터는 못 들어간다.”

이라올라,

그녀는 전임 강철의 자매단장이었다.

전생의 소미에게 한 줄기 빛이었던 자.

그녀가 황제에게 세뇌된 채 나타났을 땐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나는 그녀의 타락이 카둔이 황제를 저버리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쪽은 네 친구들인가?”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폐하의 이름을 더럽히는 버러지야.”

콰직.

그녀의 창대가 대리석 판석을 살벌하게 깨부쉈다.

“폐하께서 너 같은 불충한 자를 여지껏 살려둔 이유가 의문이었지. 이렇게 기회를 맞이하게 되니 비로소 그분의 깊으신 뜻을 알겠다. 그분께서는 내게 직접 네 수급을 취하는 그림을 만들어주고 싶으셨던 게 틀림없다.”

“개소리도 그 정도면 수준급인데.”

“네 최후가 아바르보다는 볼만하기를 바라마. 그 한심한 년은 살려달라고 스스로 빌지도 못하더구나.”

이라올라가 창촉을 앞으로 뻗어 겨누었다.

“...안타깝네.”

“뭐라?”

이라올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이번만큼은 상대가 적일지어도 동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인간 컬렉션.

이들 전원은 한때 장래가 촉망받는 천재들이었다. 이들에겐 무한한 미래가 있었다.

오르기처럼 자기 힘으로 일가를 세웠을지도 모르고, 스스로의 힘으로 에사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황제의 눈에 띈 순간부터 이들은 자아를 박탈당하고 황가의 개로 살아가게 되었다.

진실에 다가설수록 아르세니오의 주장에 신빙성이 실린다.

정말로 황제가 길레악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라면, 황제의 측근들이 정신지배당한 광인들로 채워진 것에 개연성이 있다. 길레악의 특기가 타인의 정신을 조종하는 것이니까.

“부디 다음 생은 네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나기를.”

“죽여.”

적의 전열이 동시에 덤벼들었다. 첫 번째 전사와 검을 부딪치는 순간 나는 이곳을 피해 없이 통과할 수 없겠다는 걸 깨달았다.

검격을 나눌 때마다 그들이 저버린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들의 찬란한 재능이, 빛나던 가능성이 독니가 되어 돌아왔다.

근위전사들은 적의 협공을 버텨내지 못하고 모조리 전사했다. 나는 그들의 죽음을 눈 뜨고 지켜보았다. 누군가를 지키면서 치를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이야아아아!”

나는 모든 힘을 개방해 무제한의 마력을 황궁 앞마당에 투사했다. 전력을 다한 나의 기술은 스스로도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적이었다.

적들은 이 파괴적인 힘을 스크럼을 짜 정면에서 받아냈다. 그들의 분전은 료헤이를 상대할 때가 떠오르게끔 했다. 분명 짓뭉개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어떻게든 버텨내며 아득바득 합을 치르는 모습이.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처절하게 검격을 주고받았다.

승부는 지구력에서 갈렸다.

인원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그들의 마력 총합도 줄어만 간다.

그러나 내 마력은 마르지 않았다. 나는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생기가 더 샘솟았다.

그들은 제아무리 강하더라도 한갓 인간일 뿐이나, 나는 공화국을, 크록을, 질서를 대변하는 에사인이다. 나를 이루는 모든 요소를 없애기 전엔 나는 꺾이지 않는다.

“...폐하, 송구하옵니다.”

이라올라는 최후의 순간까지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패색이 짙어지자 창을 거꾸로 쥐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나는 널브러진 시체들 사이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삼백여 전사들 중 단 한 명도 등에 칼을 맞은 이가 없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풀리지 않는 세뇌라니, 가혹해도 너무나도 가혹하다.

이젠 날 기다리는 게 길레악일지, 황제일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졌다. 누가 됐건 놈은 이 비극의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나는 피로 칠갑을 한 채 궁궐 안을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황금으로 치장된 궁 안은 개미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만큼 휑했다.

누구 하나 안내해줄 이 없었으나 길을 헤매진 않았다. 대전으로 향하는 통로만큼은 훤히 뻗어있었으니까.

나는 붉은 주단이 깔린 회랑을 지나 본궁과 이어지는 아치형 문틀을 지나쳤다. 경비병이 내팽개친 창대를 넘어서 황제의 알현실로 접어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얼굴이 비칠 만큼 투명한 바닥이었다. 파란 불꽃이 불타오르는 화로는 신성 파르마 제국의 잔재로 보였다.

이게 바로 소문의 그 장소인가.

신화 속 존재들이 머무는 곳.

질서의 궁에 기거하는 영원불사의 황제와 그를 보필하는 일곱 권능은 오랜 시간 내게조차 경외의 대상이었다.

이래서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하는 건가. 살다살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성소를 흙발로 방문할 날이 찾아올 줄이야.

사유도 가관이다. 어디 협정을 맺으러 온 것도 아니고, 관광은 더더욱이 아니고, 성소의 주인을 죽여 구질구질해진 신화에 종지부를 찍기 위함이라니.

걸을 때마다 군홧발 소리가 대전 기둥에 반사되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나는 옥좌와 서른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옥좌에 한 중년의 남성이 앉아있었다. 그가 바로 날 이곳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었다.

그는 크록만큼은 아니지만 장대한 체구와 짙은 이목구비를 지녔다. 그러나 눈빛은 기운이 다한 듯 피로해 보였고, 입술은 메마르다 못해 가뭄이 든 논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황제의 복식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했다.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가 그의 피로감에 한몫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정신을 집중해보았으나, 마음을 읽어낼 순 없었다.

소미가 안개 같았다면 그에게서 받은 느낌은 통곡의 벽이었다. 그의 두꺼운 정신력은 여기서는 내 권능이 씨알도 먹히지 않겠다는 불길한 예감을 주었다.

“네가 라힐이로군.”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쉰 듯한 목소리로.

“당신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에신 템인가, 아니면 투스라인가. 그것도 아니면 길레악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좋을 대로.”

길레악의 이름을 언급한 건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눈썹조차 끔뻑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주시하며 마음속으로 비술의 첫 구절을 읊기 시작했다.

이네스는 비술을 봉인하라고 충고했지만, 가진 무기를 다 사용하지 않으면 변수를 만들어낼 수 없겠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당신은 왜 황제노릇을 하고 있나?”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두서없는 질문을 던졌다.

“하는 짓거리들을 보아하니 딱히 자리에 미련이 있어 봬진 않던데. 왜 굳이 황제란 타이틀을 달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거지?”

“네가 어떤 자일지 궁금했는데, 듣던 것과 달리 맹한 구석이 있군. 나는 황제이기 때문에 황제이다. 너는 물이 아래로 흐르는 이유나 태양이 대지에 볕을 내리쬐는 이유도 궁금하더냐.”

“물은 생명에게 활력을 불어넣지. 태양은 말할 것도 없고. 하지만 너는 이 땅을 병들게만 할 뿐이야. 네가 황제여서 좋을 사람은 세상에 오직 너 하나뿐이라고.”

“그러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너는 자연계의 법칙이 생물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너 스스로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한다면, 사람들이 널 타도하기 위해 일어선 것도 납득하나?”

“물론 이해한다. 다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여부는 다르겠지. 애석하게도 나는 너희의 반항을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법칙을 거스른 대가는 결코 작지 아니할 터인데.”

주변의 공기가 술렁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비술은 아직 삼분의 일밖에 준비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든 시간을 더 끌 필요성을 느꼈다.

“투스라, 나는 그니르의 기억을 통해 네가 인간이던 시절의 모습을 엿보았다. 너는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지 않았나. 네게는 한때 지켜야 할 자식과 사랑하는 부인이 있었을 텐데.”

긴장된다. 그의 옛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기 때문에.

“잘못 짚었다, 라힐.”

갑자기 그의 표정이 변했다. 시든 나뭇잎 같던 눈이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영활하게 번득였다.

“그 말은 내가 아니라 투스라의 파편에게 했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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