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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200화 (200/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200화

순환 (12)

정면 망루 위였다.

금빛 망토를 걸친 사내가 나타나 아래를 굽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수많은 인파를 거쳐 정확히 내게 당도했다.

에신 템, 혹은 투스라.

대륙의 지배자,

모든 에사인 위에 군림하는 자.

수많은 수식어를 지닌 분께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셨다. 황제 본인인지 아르세니오의 말마따나 길레악의 껍데기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잠시 동안 시선을 유지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무언가는 성벽면을 텅텅 두들기며 까마득한 아래로 수직낙하했다.

나는 그것이 잘린 크록의 목이라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정확히는 어제 회의에 배석했던 크록 장군 중 한 명의 목이었다.

황제는 장군의 수급을 베어내고서도 과시조차 하지 않았다. 쓰레기를 버리듯, 보란 듯이 내 앞에 내던졌을 뿐.

거리가 이렇게나 떨어져 있는데도 그가 방출하는 마력에 살이 떨려왔다. 내가 아는 어휘로는 그가 발하는 힘을 담아낼 수가 없었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격이 다른 강자였다.

“.......비행전단을 철수시켜야겠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성벽 위로는 아직도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 어딘가에 소미가 있었다.

소미는 이번 전쟁을 통해 크게 신망을 얻었다. 당장 전장에 메아리치는 노래도 소미의 것이었다. 만약 그녀가 저런 식으로 당하고 만다면 전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말겠지.

“늦었어, 라힐. 부대를 지금 불러들이면 피해가 너무 커.”

이네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냉정해지라는 조언을 상기시키려는 듯이.

그녀의 말이 옳다. 공중전에서 섣부르게 후퇴를 강행한다는 건 부대 전체를 전멸로 몰아넣는 일이다. 실제로 우리가 그니르의 비행전단을 그렇게 격퇴하기도 했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황제가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망루 아래로 내려간 듯했다. 정찰한 바에 의하면 정면 망루 아래 계단은 곧장 정문과 이어져 있다. 말인즉슨 카룩카이와 막시무스가 황제의 사정권에 들어갔다는 뜻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허리벨트가 잘 매여 있는지 확인했다.

나 혼자 황도를 점령할 수는 없다. 혼자 이 세상을 바꿀 수도 없고, 죽은 넋을 되살릴 수도 없다.

그러나 황제를 막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었다.

“나갈 거야?”

“그래야지.”

“그러면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할게.”

“고백할 타이밍이라는 건 소미가 이미 써먹었다.”

이네스는 내 거지 같은 농담에도 실소조차 흘리지 않았다. 투구가리개 사이로 수심에 찬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내가 가르쳐준 비술에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무작정 황제에게 사용했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몰라.”

“그런 건 보통 가르치기 전에 말해줘야 하지 않나?”

“하나의 중국 기억하지? 울토르를 흡수하려던 시도가 잘 안 먹혔잖아. 흡수하려는 영혼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비술을 쓰는 사람의 부담도 늘어나. 비술의 대상자가 황제 정도 되면 오히려 비술을 쓰는 사람이 잡아먹혀 버릴지도 몰라.”

타당한 경고였다. 그러나 그녀의 충고는 중요한 한 가지 가정을 간과했다.

“혹시 황제가 황제가 아니라면?”

“황제가 황제가 아니라니?”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밀을 품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다. 황제가 종적을 감춘 지 너무 오래된 탓에 혹시 길레악이 황제를 대행하는 게 아닌가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네. 검토할만한 시간이 없는 게 아쉬울 만큼. 황제에 관한 정보는 내 데이터베이스에도 극히 드물어. 그나마 있는 정보도 신빙성이 의문이고.”

“그래서 써야 하냐, 말아야 하냐.”

그녀는 잠시 생각한 뒤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급적 비술은 봉인하는 게 좋겠어. 그니르 때도 비술 발동이 늦어서 그렇게나 다쳤는데, 황제일지도 모르는 강자를 상대로 모험수를 둘 순 없잖아.”

“알았다, 안 쓰는 걸로 하지.”

나는 최종적으로 장비를 점검했다. 마그나크록의 뼈를 깎아 만든 중갑옷과 울토르의 대검, 부무장으로는 카둔이 선물한 소검을 한 자루 챙겼다.

“이네스.”

“응.”

“나도 잔소리 하나 남기마. 나브니를 끝까지 주시해라. 믿을 수 없는 여자니까.”

나까지 본부를 떠나면 지휘권은 이네스에게로 넘어간다.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되어있는 일이었다.

이네스 안에 깃든 수많은 기억 중에는 전술에 능통한 자의 것도 많았다. 그녀가 자아를 확립해갈수록 타인의 기억은 희미해졌으나, 군을 믿고 맡길 정도는 되었다.

내가 못 믿는 건 나브니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욕망의 여제를 신뢰하겠냐만, 나는 그녀가 자기 나라까지 내던져가며 원정에 나선 이유를 정말이지 모르겠다.

나에 대한 욕망?

없진 않겠지. 분명 그게 그녀의 동기 중 일정 부분을 차지하긴 할 거다. 십수 년간 원치 않은 동거를 하며 엿본 대목이기도 하고.

하지만 욕망이란 개념을 그리 단순하게 정의 내려서는 안 되거든.

욕망이란 소유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소유의 형태는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는 거.

이를테면 그녀가 소유하길 바란다는 내가 산 몸뚱이일지 죽은 몸뚱이일지는 모른다는 거거든.

“잘 감시할게. 여차하면 우리를 배신할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누님한테 상황 봐서 널 지원하라고 말해뒀다. 난 황제를 끝장낼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테니.”

“알았어. 또 할 말 있어?”

“우르.”

“황자님은 왜?”

“내가 돌아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후방을 지키도록 해. 설령 전방 상황이 나빠진다거나, 본인이 요청해오는 경우라도.”

“그건 합리적이지 않은 명령인걸. 우르에게 사감을 가지고 있니?”

“이유는 좋을 대로 생각하고, 여하간 무슨 일이 있어도 우르를 전방으로 보내선 안 된다.”

“하지만 황자님은 납득 못 할 텐데...”

“네가 말을 잘 해봐. 이젠 네가 사령관이잖냐.”

나는 우르에 관해서만큼은 이네스를 이해시키기를 포기했다. 우르가 실은 황제일지도 모른다는 미스테리는 전쟁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후로 미뤄두고 싶다.

“...무책임하네, 라힐.”

“다녀오마.”

나는 그녀를 일별한 뒤 본부를 나섰다. 막시무스를 따라나서지 않은 근위전사 열 명이 즉시 내게 따라붙었다.

그들은 막시무스와 겨뤘으나 패배해 근위전사단장 자리를 내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장군으로 보직변경이 가능한, 말하자면 근위전사 중의 근위전사다.

“가자.”

나는 성벽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전사들은 속도를 올린 내게 바짝 붙어 따라왔다.

정문으로는 진입이 불가능했다. 이미 그쪽은 옴짝달싹하기 힘들 만큼 병사들로 인산인해였다. 내가 봐둔 진입루트는 성벽을 기어오르는 것이다.

콰직.

나는 부무장인 소검을 꺼내 냅다 성벽에 꽂아 넣었다. 자주포 포격도 끄떡없이 견딜 만큼 강화된 성벽이지만, 내 완력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근위전사들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상황파악을 마쳤다. 그들은 주장비를 지렛대로 삼아 거미처럼 민첩한 동작으로 등벽을 시작했다.

“적이 벽을 타고 올라온다, 화살을 쏴라!”

수비대가 화살과 돌멩이 따위를 던지기 시작했다. 몇몇 근위전사는 방패로 화살을 막으며 다른 한 팔로 성벽을 오르는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적의 저항을 정면으로 받아가며 순식간에 성벽의 삼분지 일 지점에 도달했다. 다시 태어나고 난 뒤로 처음 해보는 클라이밍이었다. 암살자 시절에도 이토록 뜨거운 성원을 받아가며 벽을 기어오른 적은 없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적병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놈들은 이미 우리가 포식자라는 걸 눈치챈 듯하다.

꼭대기에 도달해 총안구를 오른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장교로 보이는 적이 째질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라힐이다, 성마족의 왕이 나타났다!”

투구까지 썼는데 용케 알아보네.

아니면 투구를 써서 알아본 건가.

나는 두 발로 돌바닥 위에 내려섰다. 역시 위쪽은 공기부터가 달랐다. 나는 면갑을 열어 잠시 상쾌한 산소를 맛보았다.

“뭐, 뭣들 하냐! 어서 싸우지 않고!”

장교가 독촉했으나 병사들은 창으로 겨누기만 할 뿐, 감히 덤벼들진 못했다.

나는 그들에게 잠깐이지만 약소하게나마 동정심을 품었다.

너희가 싸울 상대는 내가 아니라 불운한 오늘의 일진이겠지.

잠시 후 근위전사들이 나타나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적이 저항을 하건 말건 무자비한 폭력으로 주변을 평탄화시켰다.

“망루를 확보했습니다, 왕이시여.”

근위전사가 피칠갑을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다.”

나는 그를 지나쳐 성벽 아래를 살펴보았다. 전생에서도 황도의 정경을 성벽 위에서 바라본 적은 없었다. 성벽 아래를 쥐새끼처럼 기어 다닌 적은 있으나.

황도는 이런 높이에서조차 한눈에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수백만 가구들이 구획별로 오밀조밀하게 모인 가운데, 질서의 성만은 원근감을 무시할 만큼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발아래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약 십만 가량의 병력이 뒤엉킨 가운데 듣도 보도 못한 크기의 초대형 거인이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는 중이었다.

거인을 상대하는 크록 전사의 모습도 보였다.

막시무스는 트레이드마크인 원형방패로 초대형 거인의 발길질을 받아내며, 실로 신화적인 전투를 수행했다. 그의 방패가 불꽃을 뿜어낼 때마다 구경하는 내가 심장이 다 떨렸다.

카룩카이도 보였다. 그는 수비 측의 영웅 여러 명을 상대로 불리한 전투를 이어나갔다. 마법사와 전사, 암살자로 이뤄진 균형 잡힌 팀이 사력을 다해 늙은 크록을 저지하려 들었다.

수적 열세에 빠져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룩카이는 침착을 잃지 않았다. 나는 그의 하얀 창대가 마법사의 얄팍한 흉곽에 박히는 걸 보고는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일단 두 사람의 목이 붙어 있는 건 확인했지만, 정작 내가 찾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어디지?”

시야가 닿는 어디에도 황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난전 중이라지만, 그만한 마력을 가진 에사인을 놓칠 리 없으니.

“동쪽 벽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잠깐만.”

나는 손을 들어 근위전사를 말렸다. 난데없이 날카롭게 벼린 기운이 뻗쳐와 신경을 곤두세웠다. 질서의 성 방향에서 발사된 기운이었다. 그러나 내 곁에 붙어 있는 근위전사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의도적인 실력행사가 분명하다. 들어오라는 거지.

아무래도 황제가 내게 초대장을 보낸 것 같다. 장군의 머리를 잘라서 도발해온 그렇고, 그는 나와의 대결을 원하는 듯했다.

심장이 다른 의미로 뛰기 시작했다. 온몸의 피가 혈관을 따라 몸의 말단까지 거침없이 질주했다.

이게 함정일 거라는 생각은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그런 시시한 일을 꾸미는 자였다면 대륙의 지배자가 되지도 못했어.

“.......질서의 성으로 간다. 경로에 있는 적은 최대한 무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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