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9화
순환 (11)
오르기가 비장한 모습으로 지휘본부를 떠나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뇌리에 잘 담아두었다.
황궁마법사를 거꾸러뜨리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명실공히 에신 최고의 마법사가 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건승을 빌어주는 것뿐.
그사이에도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수십 미터가 넘는 성문이 갑자기 맹렬한 화염을 내뿜더니, 화산이 폭발하듯 거세게 튕겨져 날아갔다. 치솟는 연기 사이로 목생족 특작부대가 철수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걸 진짜로 성공하네.”
나브니는 전술학교 출신 용병들을 모아 폭파를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전날 회의에서 성문은 자신들한테 맡기라고 호언장담한 자들이다.
“정기호, 지금 흑철 전사단을 보낸다.”
“알았다.”
정기호가 대기 중이던 흑철 전사단에게 진격명령을 내렸다. 전사들은 방패를 맞댄 채 마법보호막 밖으로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거구의 크록 전사들 사이에 그들보다 정수리가 족히 일 미터는 더 높아 보이는 초월적인 크기의 크록이 보였다.
카룩카이, 나의 대사제.
쿵, 쿵.
그는 잠시 내 쪽을 돌아보더니, 가슴을 두 차례 두드려 군례를 표했다. 유독 눈에 띄는 탓에 그를 향해 적의 화력이 집중됐으나, 대부분의 투사체는 갑옷은커녕 그가 두른 투기조차 뚫지 못했다.
목생족도 성문을 돌파하기 위해 정예부대를 출진시켰다. 그들은 갑옷을 단 한 피스도 걸치지 않은, 오로지 타고난 방어력만으로 싸우는 근접전의 대가들이었다.
“...쉽진 않겠다.”
정기호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성문 안쪽에 도사린 적병의 숫자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흑철 전사단은 격한 저항에 부딪혀 초장부터 걸음이 묶이고 말았다. 병목현상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전사들의 머리 위로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슬슬 다음 단계를 실행하자. 비익족을 투입해서 성벽을 점거해야 한다.”
“내가 갈게요.”
앞으로 나선 건 소미였다.
“넌 날개가 없잖아.”
“날개가 되어줄 사람을 구했거든요.”
그녀가 엘리시아를 앞으로 떠밀었다. 엘리시아는 어색해하면서 내게 군례를 올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진소미 님을 보필해 반드시 적을 무찌르고 돌아오겠습니다.”
“든든하죠?”
소미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성벽을 정리하면 무리하지 말고 돌아와. 혹시라도 황제를 만난다면 절대로 싸우지 말고. 그놈은 아직 네 상대가 아니야.”
“계속 잔소리할 거면 앞으로 아빠라고 부를게요.”
“가 봐.”
소미가 장난스럽게 경례를 올렸다. 나는 돌아서려는 그녀를 잠시 불러 세웠다.
“소미.”
“네?”
“.......응원할게.”
“고백할 타이밍 아니었어요?”
소미가 킥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에서 기묘한 위화감을 받았다.
도무지 마음을 읽지 못하겠다.
힘이 강해질수록 나는 숨 쉬듯 쉽게 타인의 마음을 간파하게 되었다. 특히 거짓말만큼은 백발백중으로 잡아낸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근래에 들어 소미만큼은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너무 강해졌나보다, 에사인이 될 때가 되었나보다 편하게 생각하고 넘어갔건만, 이건 아무래도 수상한 일이다.
일곱 권능의 하나인 그니르조차 내 권능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걸 감안한다면 소미는 일부러 내게 마음을 숨기고 있다고 봐야 타당하다.
하지만 굳이 내게 마음을 숨길 이유가 있을까? 나만 해도 오해를 풀기 위해 즈라즈에게 기꺼이 정신세계를 개방했잖아. 꿇릴 게 없는 사람이라면 술법까지 써가며 자신을 가릴 이유가 없을 텐데.
모르겠다.
그래도 소미인데, 설마 나쁜 마음을 먹었으려고.
상념은 거기까지였다. 비익족 비행전단이 상승기류를 타고 창공을 향해 용솟음쳤다. 일만에 달하는 전사들의 일제비행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격한 전투를 거치며 삼천까지 줄어들었던 비행전단은 점령지가 늘어날수록 덩치를 불려 최종적으로 지금의 규모가 되었다. 지령을 받고 각지에서 모여든 카둔의 신도들 덕이었다.
비행전단까지 가세하자 전투가 본격적으로 치열해진다. 육공 양면으로 펼쳐지는 교전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미묘한 열세였다. 오르기, 소미, 엘리시아, 카룩카이까지 나섰음에도 쉽게 승기가 넘어오지 않았다.
특히 흑철 전사단이 고전 중인 게 눈에 띄었다. 성문수비대의 저항이 어찌나 격렬하던지 전진은커녕 뒷걸음질이나 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동쪽 성벽에선 소식이 없나?”
목생족 특작부대가 약속한 건 성문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벽도 날려버리겠다 자신했었다.
“글쎄...”
정기호가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대지가 한 차례 더 격동했다. 유구한 역사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던 황도의 진줏빛 성벽이 연기와 화염에 집어삼켜지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아군의 함성에 천지가 떠나갈 듯했다. 전세는 여전히 백중세였으나, 사기만큼은 우리가 훨씬 높았다.
무너진 성벽의 틈새로 목생족 본대가 머리를 디밀었다. 어떻게든 활로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읽혀졌다.
그러나 그쪽 상황은 정문보다도 좋지 않았다. 어마어마한 강자가 길목을 지키는 중이었다. 전열보병이 갈려나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르던지 흡사 믹서기라도 갖다놓은 것만 같았다. 패닉에 빠진 목생족 전사들은 꾸역꾸역 밀려드는 후열 때문에 저항다운 저항조차 못 해보고 무더기로 죽어나갔다.
“황군 부사령관 막심이로군.”
“용케 알아보네.”
정기호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안면이 있다, 그는 나를 모르겠지만.”
전생의 연을 말하는 것이겠지.
정기호는 잠깐이지만 황군 장교로 복무했었다. 울토르의 검은 그때 배운 것이고.
막심은 에사인이 아닌 자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전사로 여겨졌다. 울토르가 남을 가르치는 데 관심이 없던 탓에, 사실상 황군 장교들은 막심의 손에서 키워졌다고 봐야 옳았다.
“.......괜찮겠냐?”
나는 그를 무시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이미 대검을 어깨 위에 걸친 채였다.
“괜찮지 않으면 어쩌겠나.”
“상성이 나쁘잖아. 같은 기술을 쓰는 상대인데, 숙련도는 아무래도 그자가 위일 테니까.”
정기호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달라진 건 너뿐이 아니다, 박봉팔.”
“그 이름으로는 안 부르는 거 아니었냐.”
“그 이름이 대나무밭에 메아리치는 걸 몰랐나 보군.”
무슨 소리인가 했다.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걸 대나무밭에서 외쳤다는 고사, 그걸 내게 빗댈 줄이야.
“...너 꽤 센스 있는데. 몰라봤다.”
“실력을 알아준다면 더 좋았겠지.”
“살아 돌아온다면 알아 모시도록 하마.”
정기호가 지휘본부 계단을 휘적휘적 내려갔다.
그는 대기 중이던 크록 전사 일만 명을 이끌고 동쪽 성벽으로 향했다. 그의 모습은 머지않아 전장의 열기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르와 우르술라, 즈라즈, 화이트모카는 동군을 막기 위해 후방으로 빠졌기 때문에, 이제 지휘본부에는 나와 막시무스, 이네스만 남게 되었다.
“성벽 위가 불안해 보여.”
이네스가 초조한 듯이 말했다.
“성문 쪽도 상황이 좋지 않고.”
“적에 대한 정보가 더 없을까?”
“회의 때 말한 대로야. 황도 수비군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최정예 전사들의 집합이지만, 실전을 치른 지 너무 오래돼서 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실전은 크게 의미가 없지. 체력은 녹슬어도 마력은 녹슬지 않으니.”
“여기에 동군까지 합류한다면...”
“쉿.”
나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성문 안쪽에서 뭔가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흑철 전사단의 전열이 둑이 허물어지듯 무너지는 중이었다.
“......평지거인이로군.”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세차게 뒤흔들렸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성벽 끄트머리 위로 튀어나온 거인의 상투머리가 전부였다.
고작 지방도시를 수비하는 데 동원된 거인이 백여 체였다. 황도에 더 많은 거인이 있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되었고, 실제로 관측도 된 바였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서 거인이 발휘하는 파괴력이란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건 더 이상 기교도, 마력의 대결도 아니었다. 놈이 발을 들어 내려찍으면 병사들은 그대로 쥐포가 되는 수뿐이었다.
“라힐.”
이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동자를 마주하고서야 내가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깨달았다. 살기에 압도된 근위전사들이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는 게 보였다.
“미안, 오바했다.”
“미안해할 건 없어, 다만 사태를 직시해줬으면 해. 넌 우리의 버팀목이니까.”
“정보를 다오. 저게 평범한 평지거인은 아니겠지. 황도 성벽과 맞먹는 크기의 거인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도 없다.”
“저런 크기의 거인은 내 데이터베이스에 딱 하나뿐이야. 수천 년 전, 황제와 겨뤄서 패배한 뒤 충성서약을 맺은 거인이 있었다고 해. 거인의 왕 잉그람........성문을 여는 거인들은 그의 일족이라고 전해져.”
들어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에신에서 성문을 열어주는 거인이란 백화점 에스컬레이터 같은 개념이었다. 존재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의 기원을 알려 들지 않았다.
“저것들이 거인의 왕을 데려왔다면, 나는 전사의 왕을 보내는 수뿐이겠군.”
쿵.
막시무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며, 방패 모서리로 본부 바닥을 찍었다.
지휘본부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던 근위전사들이 그에 화답하듯 주먹으로 방패를 두들겼다.
근위전사단.
단 백 명으로 백여 체의 거인을 격파해 신화를 세운, 공화국 최강의 전력이다.
안 그래도 강한 놈들에게 축복을 붓고 카둔의 성물까지 맞춰줘서, 한 명 한 명이 단독으로 사단급 병력과 맞수가 가능한 가공할 전사가 되었다. 그들이라면 능히 거인의 왕을 대적해볼 만하다.
“막시무스, 가서 저 흉물의 목을 베어와라.”
“명을 받듭니다!”
막시무스가 기운차게 대답했다.
이상한 일이다. 소미를 보낼 때조차 불안함을 달랠 길이 없었는데, 막시무스에게는 일말의 불안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가 패배하는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막시무스가 근위전사단을 휘몰아 정문으로 달려나갔다. 그 또한 머지않아 정기호처럼 전장의 열기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네스를 제외한 모든 간부들을 투입하고도 좀처럼 전황이 나아지지 않았다. 적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잘 싸우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겠지.
“이야아아아아!”
갑자기 성벽 위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뭐지?”
분명 위에서 무슨 난리가 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각도상 여기서는 상황을 짐작만 할 뿐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불길한 느낌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아끼는 누군가의 목이 달아났을 것만 같아서.
에사인쯤 되면 촉이란 육감을 넘어서 실체적인 진실, 코앞까지 다가온 미래를 말해주기도 했다.
“우와아아아아!”
함성이 더욱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정면, 정문으로부터였다. 검은 바탕에 노란 수실을 단 깃발이 병사들의 머리 위로 불쑥 솟아올랐다. 동시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적병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한목소리로 외쳤다.
“영원불사의 황제를 찬미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