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8화
순환 (10)
-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가 중요한가? 그보다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지.
- 너는 에사인이다. 말인즉슨 마력을 다루는 존재들 중에서 힘에 대한 집착이 가장 강한 자라는 의미다.
- 믿지 못하겠지만 나는 마력에는 큰 미련이 없어. 내가 바라는 건 하루빨리 이 난리통을 수습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픈 마음뿐이라고.
- 그래, 나는 널 믿지 못한다.
- 이래도?
나는 그의 다리 하나를 쥐고는 이네스에게 배운 정신감응술을 시전했다. 그는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곧 술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찰나지간 두 존재의 마음이 서로 이어졌다. 나는 그의 정신세계에 노출되는 순간 뉴런이 쪼그라드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의 정신세계는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수많은 인간의 기억이 짬뽕처럼 뒤섞여 제멋대로의 불협화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간부 장더린이다. 나는 기필코 본국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듣고 있나, 이 멍청한 곤충 새끼야!
- 엄마를 보고 싶어. 엄마는 이런 몸이 되어버린 날 알아보실까.
- 난 동의하지 않았어.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어. 너희가 멋대로 날 죽인 거다. 그 얄팍한 정의감 때문에.
연결이 끊어졌다.
나는 입을 벌리며 그의 퉁방울 같은 눈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미치지 않고 버티는 거지?
문자 그대로 찰나지간이었다.
십분지 일 초에 불과한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만 같은 아우성, 저마다의 자아가 터뜨리는 절규.
도대체 무슨 수로 제정신을 유지하는 건지, 그에게 존경심마저 들었다.
이네스는 이런 광기를 딛고 일어섰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인한 사람이다.
- ....납득했다. 너는 비술을 남용할 자가 아니로군.
즈라즈의 분노가 점차 누그러들었다. 그에 맞춰 겹날개의 진동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 그렇다니까. 술법이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이야. 도구의 쓰임새는 그걸 쥔 사람한테 달린 거고.
- 그 말이 옳다. 네가 변하지 않는 이상 나는 널 위해 싸우겠다.
검푸른 동체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나는 속으로 가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타인에게 정신을 개방한다는 건 다분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나라고 한들 성인군자는 아니거든. 분명 내 마음 구석진 어딘가에는 남에게 말 못 할 음습함이 도사리고 있겠지. 즈라즈는 그것까지 살핀 후 내가 안전한 놈이라는 판단을 내린 거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든다. 아쉽게도 내 정신력은 늘어난 마력만큼 강해지진 않은 것 같다. 즈라즈 정도면 길레악의 정신공격도 웃으면서 버텨내겠는데.
막사 안에서 나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내방자를 맞이했다. 크록 목수가 만든 조악한 의자에 후드를 깊이 눌러쓴 사내가 앉아있었다.
주홍빛 촛불이 벽에 일렁이는 실루엣을 만들어냈다.
나는 그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바닥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제후라.”
“너라면 내가 왜 왔는지 알겠지, 라힐.”
“알지, 그래서 걱정이다.”
“날 막을 생각 마라.”
제후라가 후드를 벗으며 비장한 어조로 선언했다.
“넌 상상도 못 할 거다. 근래 자길 막지 말아달라는 청탁을 내가 몇 번이나 받았는지.”
“종일 이 비루한 삶을 이어가야만 하는 이유를 고민해봤다. 너는 내가 없으면 묘인족의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지 못할 거라 말했지. 내가 도달한 결론은 지금이야말로 현실을 직시할 때라는 것이다.”
“어떤 현실?”
그는 대답을 하기 위해 숨을 크게 한 차례 들이켰다.
“묘인족의 시대는 예전에 끝났다. 일만 년 전, 신성 파르마 제국이 멸망했을 때.”
“그건 사실이 아니야, 제후라.”
“우리는 다음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낡은 것에 집착해 새 시대의 탄생을 방해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역사에 누가 된다.”
그가 탁자 위에 단검을 올려놓았다. 금속과 나무가 부딪히는 소리가 지금처럼 무겁게 느껴질 때가 없었다.
“날 죽여라, 라힐.”
“...개소리하진 말고.”
“길레악은 아바르 님의 힘을 흡수해서 이전보다도 더욱 강해졌다. 내일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다.”
“마력을 잃는다는 건 단순히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지 않아. 영혼이 소멸되고 만다고. 네가 원하는 결말이 그런 형태는 아닐 텐데.”
“그게 정확히 내가 원하는 바다. 영혼을 바쳐서라도 아바르 님의 원수를 갚는 것.”
제후라가 살기등등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앞섶을 풀어 헤쳤다.
“왕이라면 망설이지 마라. 내 힘을 취해 성마족의 시대를 활짝 열어라.”
나는 그의 텅 빈 소맷자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원래라면 나는 지금쯤 로켄과 싸워 결판을 지었어야 한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그의 힘을 흡수해 내일 치를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후달리냐고?
맞아, 후달리긴 해.
하지만 왕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해서 유지해야만 하는 자리는 아닌 것 같다.
이러면 이름만 다른 황제를 앉히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냥 가 봐라. 몸조리 잘하고.”
제후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날 외면하지 마라, 라힐. 난 네게 모든 걸 내줄 각오를 마쳤다!”
“각오를 마쳤다면 죽지 말고 아득바득 살아 봐. 목숨을 너무 가볍게 여기지 말라고.”
“나는 지금껏 네가 아바르 님이 점지한 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고작 사람 하나 죽일 각오도 없이 어떻게 새 시대를 논한단 말인가.”
“죽이는 건 쉬워, 제후라. 사는 게 어렵지.”
“죽이지 않고 전쟁에서 이길 순 없다.”
“그렇다면 내일 내가 몇이나 죽이는지 세어보라지.”
“.......”
제후라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촛불을 꺼버렸다.
“늦었다. 좋은 컨디션으로 뛰려면 조금이라도 쉬어둬.”
“에사인은 잘 필요가 없다, 알다시피.”
“나는 가끔 자거든. 인간일 때를 잊지 않으려고.”
침대는 의자만큼이나 조야한 솜씨로 만들어졌다. 널빤지 위에 짐승 가죽을 매어둔 걸 침대라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었다. 가죽도 그냥 가죽이 아니고, 무두질도 마치지 못한 생가죽이었다. 신 대우를 받는 내 침대가 이 모양이면 병사들은 얼마나 열악할지 안 봐도 뻔했다.
나는 침대에 가로누워 두 다리를 쭉 뻗었다. 침대 다리가 해먹처럼 흔들거리며 삐거덕거렸다.
제후라는 말없이 날 쳐다보기만 하다가, 잠시 후 걸음을 돌려 막사를 빠져나갔다. 그가 떠나자 나만의 안식처에 마침내 고요가 찾아들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는 하루를 민원 처리나 하느라 허비하고 말았다. 누님과 이렇고 저런 좋은 추억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이게 소설이고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누님을 찾아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늘어놓으며 사망 플래그나 찍고 있겠지.
나는 발끝을 까딱이며 누님을 주제로 한 이런저런 상념에 잠겼다. 품에 넣어둔 유품에 손이 닿은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보드라운 가죽주머니의 감촉이 누님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재생시켰다. 실제보다 다소 달콤한 버전으로.
- 그 의미를 네가 알기 전까지는 쓸모가 없을 물건이다.
유품의 의미?
죽은 사람 물건이라는 거 말고 달리 다른 의미가 있나.
그래도 누님 말씀이니 심오한 뜻이 숨어있을 것 같긴 한데, 연애를 한 지 너무 오래된 탓인지 도무지 의역이 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주머니에 꽂혀 골머리를 앓다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동이 터오자 아침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사방에서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당번병!”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전령부터 찾았다. 전령이 갑옷을 입는 걸 도와주는 동안 준비를 마친 장군들이 막사 앞에 순서대로 집결했다. 막시무스가 가장 빨랐고, 그를 흠모하는 크록 장군들이 다음이었다.
이채로웠던 건 소미였다. 그녀는 엘리시아와 함께 나타났다. 잡담을 나누며, 미소까지 머금고서.
나는 더 이상 소미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그녀는 에사인의 위계에 단 한 걸음만을 남겨두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이는 저 미소가 꾸민 게 아니라는 것쯤은 권능을 쓰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크흠.”
이윽고 오르기와 우르, 우르술라까지 모이자,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모두 고생이 많았다.”
크록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몇 년 전의 나는 파충류의 눈이 이렇게 사랑스러워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지.
“많은 걸 바라지 않으마, 딱 한 번만 더 이겨다오.”
“위대하신 분께 영광을!”
“영광을!”
막시무스가 선창하자, 크록 장군들이 뒤이어 외쳤다. 외침은 진채 전체에 들불처럼 퍼져나가 이윽고는 거대한 울림이 되었다.
나는 그때 잠시 우르술라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매가 반달처럼 휘어지는가 싶더니, 붉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 그림자를 떨쳐낸 자에게 승리의 영예를.
정확한 해석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해석은 어찌 됐건 상관없다.
내 멋대로 그녀가 그렇게 말했다고 여기기로 결심했다. 무덤 자리에 들 땐 좋은 기억만 가져가고픈 법이다.
용기백배한 장군들이 각자 맡은 위치로 돌아갔다. 전투 준비는 진즉에 끝냈기에,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전열을 가다듬었다. 돌격 명령은 우리 측과 나브니 쪽에서 거의 동시에 떨어졌다.
“개전하라!”
깎아지른 듯한 황도의 성벽을 향해 병사들이 일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황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진줏빛 총안구 사이에서 재래식 기관총과 곡사포도 불을 뿜었다.
진영을 막론하고 전투에 임하는 병사 한 명 한 명이 지구의 상식을 초월한 강자였다. 날아오는 총알을 방패로 쳐내는 건 기본이고, 마력을 머금은 화살이 강철로 만든 방패를 꿰뚫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적들의 저항은 정말이지 만만치 않았다. 일찍이 우리가 치렀던 그 어떤 전장보다 많은 수의 아군이 짚단처럼 허물어져갔다. 쓰러지는 크록들을 볼 때마다 입천장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슬슬 흑철 전사단을 투입해야 할 것 같아. 이대로라면 동군이 돌아오기 전에 성을 떨어뜨릴 수 없어.”
이네스가 초조한 어조로 말했다.
“아직은 이르다. 적 지휘관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말이 떨어지기 무서운 시점이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축이 지진이 일어난 듯이 흔들렸다. 동시에 서쪽 전선 어딘가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의 규모는 솟구치는 연기와 휘몰아치는 잿가루로 짐작해볼 수 있었다. 운석이 떨어졌다고 해도 믿을 만큼 어마어마한 공격이었다.
“왼쪽에 적 마법사다, 황궁마법사단장 타린으로 추정된다.”
정기호가 메마른 투로 말했다.
황궁마법사단장 타린.
면식은 없으나, 소문이라면 많이 들었다. 황제의 핏줄을 제외하고 황국에서 제일가는 마법사로 꼽히는 자였다. 현역 마법사들 중에 그의 책을 읽고 공부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단언할 만큼 명망이 높았다.
“제가 가겠습니다.”
오르기가 분연히 손을 들었다.
“그래, 수석마법사가 나서줘야 균형이 맞겠지.”
정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르기의 결연한 눈을 빤히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반드시 이겨주십시오. 실장님을 위해서라도.”
공화국 수도에는 오르기가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총리대행이며, 나의 비서이며, 이 나라의 살림꾼인 여자.
만약 그가 죽거나 다친다면 박이나 실장에게 남은 평생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