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7화
순환 (9)
회의는 내가 아닌 나브니 휘하 알파 원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항공전술학교를 수료한 군사전문가라고 밝혔다.
그는 발언을 하는 간간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담즙을 뱉어냈다. 그가 내부에서 죽어가는 중이라는 건 시퍼렇게 변한 안색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르마알의 힘을 포기했다고 해서 뒤틀린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진 않는다는 거지.
“.......이상입니다.”
알파 원이 발언을 마치고 자리에서 내려왔다. 나브니는 죽어가는 부하를 빤히 쳐다보며 내게 속삭였다.
“재밌지 않아? 저 꼬락서니가 되고도 살아보겠답시고 아등바등하는 게.”
“넌 지금 네 부하 이야기를 하고 있어, 나브니.”
“아, 생에 대한 욕망이란 어찌나 이리도 찬란한지.”
나브니가 취한 듯이 혀를 꼬며 말했다.
그녀는 시종일관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회의에 임했다. 그도 당연할 게 그녀가 내게 가세한 건 세상을 바꾸려는 야심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욕망의 발로일 뿐이니. 나는 내일 있을 공성전에서 그녀가 목숨을 걸고 싸워 주리란 기대는 일찌감치 버렸다.
“자, 주목.”
나는 손뼉을 치며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았다.
“지휘관들은 작전을 숙지해서 공성전을 잘 이끌도록 하고...”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난다.
때가 때인지라 임팩트가 있을 한마디를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수심에 찬 우르의 표정을 보자 생각했던 말들이 모조리 휘발유처럼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죽지 마라.”
나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막사 밖을 빠져나갔다. 회의는 자연스레 해산되었다.
몇 걸음 걷지 않았을 때였다. 누군가가 어깨를 거칠게 쥐며 몸을 돌려세웠다.
“뭐냐.”
“나다.”
우르가 차가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이름을 불러, 우르.”
“그러고 싶었다만 날 너무 잘 피해다니더군.”
“바빴다고 해주면 어디 덧나냐.”
우르는 내 농에도 눈매에 힘을 풀지 않았다.
“분명히 약조했을 텐데, 아버지와 만나게 해주겠다고.”
“그랬지.”
“그럼 날 후방으로 뺀 건 무슨 개수작이냐.”
“너도 알다시피 작전을 짠 건 내가 아니라 저쪽 진영이야.”
“그래서?”
“작전은 작전일 뿐이고, 실전은 실전이니까.”
“나더러 군령에 반해서 행동하라는 소리냐?”
“너는 장관이야, 우르. 널 어쩔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그가 어깨에서 손을 떼어놓았다. 그는 한동안 말없이 날 쳐다보더니,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라힐, 너는 거짓말을 해선 안 되지 않나.”
“.......”
나는 뜨끔한 나머지 대답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이럴까봐 그와 마주치는 걸 피해왔다. 진실을 알고 난 뒤로 그를 예전처럼 대할 자신이 없어서.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기다려왔다. 네가 날 막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겠다.”
“그래, 우르. 나는 널 막지 않아.”
나는 메어오는 목으로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우르는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의 침울한 표정을 보니 가슴이 바늘로 쑤시듯 아려온다.
하지만 어떻게 밝힐 수 있겠냐.
실은 네가 황제의 분신이고, 그걸 자각하는 순간 세상에 종말을 가져다줄 존재로 각성할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말을 하겠냐고.
나는 아르세니오가 머무는 창고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창고는 근위전사 중에서 신중히 선별한,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는 자들에 의해 엄중히 지켜졌다.
근위전사가 지키는 창고라니, 수상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남 눈치나 볼 때가 아니다. 바야흐로 이야기가 대단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니.
“열어라.”
투박한 나무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아르세니오는 그사이 창고를 거대한 마법진으로 바꿔놓았다. 백묵으로 그린 기하학적인 도형이 바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진채를 만든 게 어제 일이니 고작 하루 만에 이 모든 작업을 마친 셈이다.
“드디어 오셨네요.”
아르세니오가 날개를 펄럭거리며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준비 다 되신 거죠?”
“됐어.”
“정말 괜찮으세요? 아무한테도 말 안 하고 가도. 이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말하지 말라는 건 너 아니었냐.”
“에이, 제가 감히 어떻게 라힐 님을 구속하겠어요.”
“지금까지 잘만 그러더니 이제 와서 아닌 척은.”
“무례하게 보였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나름대로 절박하거든요. 전부터 로켄 님을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라힐 님이 아니라면 저는 그분의 관심조차 끌지 못할 부스러기일 뿐이니, 어쩔 수가 없지요.”
나는 이해한다는 의미로 팔을 벌려 보였다.
정말로 이해한다.
인간이란 너무나 불완전한 탓에 내가 누구인지, 남의 입을 통해 정의를 내리지 않으면 의심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거지.
“여기로 올라오세요.”
아르세니오가 손바닥을 까딱이며 나를 마법진의 한가운데로 초청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우리가 서있어야 할 곳을 문자로 표기해두었다.
“제가 정신을 집중하는 동안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돼요.”
“얼마나 걸리냐?”
“대략 삼십 분? 더 걸릴 수도 있고요.”
“삼십 분이면 너무 긴데.”
우르가 날 하나의 중국의 정신세계로 데려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때 그는 주문조차 외우지 않았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제 최선이에요. 진짜 모든 힘을 쥐어짜는 거니까 정신세계로 가서는 아무 도움을 못 드릴 거예요.”
“상관없어, 얼른 끝내버리자고. 정기호가 날 찾기 전에.”
아르세니오가 눈을 감으며 주문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읊는 마법의 단어에 귀를 기울였다.
노래하는 것 같기도 했고, 시를 읊는 것 같기도 했다. 느릿한 운율을 따라 상당한 마력이 바람처럼 부대꼈다.
나는 그가 마법을 준비하는 동안 이네스에게 배운 주술을 다시 점검해보았다. 이 주술이야말로 꿈의 지배자라는 거물을 쓰러뜨릴 회심의 무기였다.
긴장이 된다. 로켄의 실력은 그니르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단 한 명, 누구라도 좋으니 에사인을 아무나 한 명만 더 흡수했더라면 해볼 만한 싸움일 텐데.
주술의 점검이 끝났다. 불완전하긴 해도 여차저차 구동은 가능할 것 같다. 저번처럼 대화로 시간을 끌면서 반전을 노려볼 계획이다.
나는 완전히 준비가 됐건만, 아르세니오는 도통 일을 마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시계는 약속한 삼십 분을 넘어 한 시간째에 접어드는 중이었다.
“........엇.”
아르세니오의 다리가 휘청거리더니, 무릎이 꺾이고 말았다. 나는 다급히 손을 뻗어 그의 등을 받쳤다.
순간 손바닥 위로 솜털이라도 날아든 것만 같았다. 비익족의 뼛속이 텅 비어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몸이 이 정도로 가벼울 줄은 몰랐다.
아르세니오는 내게 상체를 기댄 채 힘겹게 다리를 가누었다. 온몸이 훈증을 한 것처럼 식은땀에 절어있었다.
“죄송해요, 라힐 님.”
그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게 용서를 구했다.
“어떻게 된 거냐?”
“좌표가 잡히지 않아요. 분명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좌표가 안 잡힌다고? 좌표를 잘못 알았다는 소린가?”
“아니에요. 저는 분명 정확한 좌표를 알아요. 저는 밤에 꿈을 꿀 때마다 그분과 제 영혼이 이어져 있는 걸 보았어요.”
“그럼 뭐가 문제냐?”
“좌표는 유효하지만, 연결을 할 수가 없어요.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어둠에 가로막힌 기분이 들었어요. 듣기로 이런 경우는 한 가지뿐이에요. 그 사람이 죽어서 정신계가 붕괴한 경우...”
“로켄이 죽었을 리는 없어.”
나는 아르세니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로켄이 군을 이끌어 남쪽으로 내려갔다는 보고를 들은 게 불과 나흘 전이다.
설령 카둔이 영광의 용광로에서 뛰쳐나왔다 하더라도 로켄을 그렇게 빨리 때려잡을 수는 없다.
“그러면 어째서 마법이 실패한 걸까요?”
“모르지. 이게 마법적으로 가능한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네가 되돌아올 걸 미리 알고 좌표를 바꿔버렸을지도.”
“만약 그렇다면........저는 그분께 더 이상 부스러기는 아니겠네요.”
아르세니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의 몸을 바로 세우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로켄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네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것 같다.”
“라힐 님, 저는...”
“수송용 트럭을 한 대 내주마.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가.”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내적 갈등이 느껴졌다. 그는 로켄과 다시 만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할 각오로 여기까지 왔다. 벼르고 벼르던 일이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아 남는 것이라고는 허망함뿐이겠지.
나도 허망하다. 나도 죽을 각오도 마쳤고, 죽은 후에 욕을 바가지로 들을 각오도 마쳤었거든.
말도 없이 두 번이나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누님이 날 얼마나 원망할지.
“...네.”
그가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그의 거짓말을 넘어가주었다. 대한민국에서는 아닐지 모르겠다만, 공화국 기준으로는 그 또한 어엿한 성인이다.
이만하면 나는 할 말 다 했다. 목숨을 어떻게 버릴지는 각자의 선택으로 남겨두기로 하자고.
예상대로 한 시간은 너무 길었다. 창고를 나서자마자 내가 마주친 건 어마어마하게 큰 장수풍뎅이였다. 이만한 거구가 지척까지 접근했는데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니, 얼마나 정신줄을 놓고 있었나 싶다.
즈라즈.
변종 말라붙이 최후의 생존자인 그는 지금껏 백의종군의 자세로 조용하게 군을 서포트했다. 그는 사석에서는 점잖고 품위가 있었지만, 전투에서의 활약만큼은 누구보다도 과격했다. 검푸른 외골격을 대낫처럼 휘두르며 적진을 휘젓는 모습은 흡사 탈곡기를 방불케 했다.
- 라힐, 네게 할 말이 있다.
-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
- 네 냄새를 맡았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자신만의 냄새를 지니고 있지.
설마 풍뎅이가 아니라 개였던 건가.
- 그래서, 용무는?
- 너는 내가 너희를 돕기로 한 이유를 잘 알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비술을 봉인하기 위해 피치 못할 선택을 내려야만 했지. 나는 산처럼 쌓인 동족의 시신 앞에서 그들의 비원을 가슴 깊이 품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의 비극이 반복되는 걸 막겠다고 맹세했다.
대화가 어디로 향할지 감이 온다.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이유다.
- 듣고 있어, 즈라즈.
- 그니르와 싸우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네 검을 휩싼 불꽃이 이상하다는 느낌 정도는 들더군. 발고의 성문을 일격에 부수는 모습을 보자 그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너는 그니르와 싸우기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라힐. 그리고 내가 알기로 에사인의 경지에 오른 자가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강해지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 너무 장담하지는 마. 세상은 넓으니까.
- 우리에겐 수백만에 달하는 기억이 깃들어 있음을 간과하지 마라. 우리가 곧 세상이다, 라힐.
사념은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살기라 부를 수 있을 적대적인 감정이 정신파를 타고 뇌내 깊이 침투했다.
- 대답해라, 비술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의 겹날개가 진동하며 벌떼 우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