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6화
순환 (8)
- 나는 이제 폐허가 된 도시만이 아니라 새빨간 화염과 냇물처럼 흐르는 선혈을 본다. 죽음을 맞이하는 단말마와 고귀한 자의 운명을 비통해하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는 잿더미 위에 망연자실하게 선 채 장대에 꽂힌 에사인의 목과, 한 시대의 종말을 바라본다.
아바르의 죽음 앞에서 나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장대에 꽂힌 에사인이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황제의 부름을 거절하지 않았다. 만약 황제의 부름을 거절했다면 길레악이 예언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걸 깨닫고, 묘인족과 공화국을 내버려두지 않았을 테니.
- 예언이란 모르고 살 때 더 속이 편한 법이다.
아바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떠오른다.
그 한마디에 모든 단서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자의 푸념이었다.
나란 놈은 한심하게도 꼭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지금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이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희생을 토대로 한 것임을.
“설마 아바르가 죽은 거야?”
나브니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놀란 것 같았다. 그녀 또한 투스라의 시대부터 살아온 에사인이었다. 아바르와는 좋든 싫든 안면이 있었겠지.
“그런 것 같다.”
“그런 것 같다니? 아무리 황제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자기 권능을 자기 손으로 죽일 리가 없잖아?”
“예언이라는 게 항상 위정자의 입맛에 맞을 순 없는 법이지.”
묘인족의 서러운 흐느낌이 가슴을 저미는 듯했다. 나는 대기 중이던 흑철 전사단 장교를 불렀다.
“부관.”
“옛!”
“정찰병을 보내 효수된 목의 신원을 확인해라. 아바르가 맞다면 오늘부터 익일 아침까지를 추도 기간으로 삼겠다.”
“알겠습니다!”
장교가 경례를 붙이고 돌아섰다. 나브니는 팔짱을 끼며 콧소리를 냈다.
“언제는 하루가 급하다더니, 꽤 감상적이네.”
“여기에 굳이 전술적인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면, 병사들의 사기에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두지.”
“어떻게 하면 저 미친 짓거리가 우리 사기에 도움이 될까?”
“부하들에게 전해. 아바르가 우리의 승리를 예언했다가 황제의 미움을 샀다고.”
“좋네. 저쪽은 자충수를 제대로 뒀는걸.”
아바르는 예언가로 명망이 높다. 이 타이밍에 그녀를 참수한다는 건 어떻게 봐도 저들의 사기에 악영향을 미칠 뿐이었다.
그렇다면 길레악은 그녀를 죽인 것도 모자라 왜 굳이 목까지 내걸었을까?
봐라, 이게 널 지지하던 에사인의 목이다.
이것이 네 미래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겠나.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놈은 연합군이 에사인 한둘을 구심점으로 모인 오합지졸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래서 내 기를 죽여 놓기 위해 치졸한 술수를 부리는 거지.
미안하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못하겠다. 혹여 내가 쓰러지더라도 공화국의 기치는 이어질 거라 확신하거든.
잠시 후 장교가 돌아와 걸린 목이 아바르의 것이 맞다고 확인해주었다. 나는 그녀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하루의 추도 기간을 선포했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는지, 마침 소미의 앨범에는 아주 슬픈 수록곡이 한 곡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 노래를 공식적인 추도곡으로 삼았다.
그날 밤의 경험은 아주 특별했다.
비유를 하자면 마치 대양을 유랑하는 방주에 올라탄 것만 같았다. 넘실거리는 추념의 곡조가 쉼 없이 마음을 흔드는 통에 발이 바닥에서 십 센티가량 붕 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사들이 전의를 다지고 있음도 느껴졌다. 그들은 묘인족의 슬픔에 깊이 공감하고, 내게 승리의 영광을 바칠 것을 결의했다.
“라힐.”
이네스가 멀찍이서 조용히 날 불렀다.
“어서 와.”
나는 이네스를 따라 그녀의 막사로 들어갔다. 보다 개량된 비술을 구사하기 위한 수련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필요한 말 이외에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촉박한 시간이 우리를 바쁘게 몰아붙였다.
“어때, 감이 와?”
한바탕 강습이 끝난 후, 이네스가 긴장된 어조로 물었다.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은.”
“대강이어선 안 돼. 완벽히 이해하지 않았다면 저번처럼 발동이 너무 늦어서 다칠 수도 있어.”
“미안하지만 지금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 너는 나에 대한 기대치를 다소간 하향조정할 필요가 있겠다. 이 복잡한 주술을 하루 만에 다 익히라니, 해도 너무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지금까지 잘 따라와줬잖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작전회의에 늦게 되겠지. 고생했다, 이네스.”
나는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아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나는 씩 웃으며 자그만 어깨를 두드렸다.
“정말 고마웠다, 여러모로.”
동시에 깨달았다. 이 스킨십이 선을 넘었다는 걸.
귀엽고 앳된 외모 때문에 종종 깜빡하곤 하는데, 그녀는 전생의 동료 로이의 기억을 이어받았다. 로이와 내가 둘도 없이 친하긴 했으나, 이렇듯 어린애 다루는 듯한 스킨십을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손 떼지 마.”
이네스가 나직하게 말했다. 오른손을 내 손등 위에 포개며.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샛별처럼 반짝였다. 짙은 속눈썹은 화톳불을 머금어 색유리처럼 빛났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네스 너...”
“고마워해야 할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넌 내게 살아갈 기회를 줬어.”
“그야 입장 바꿔서 너라도 그랬을 테니.”
“라힐,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품고 있어. 삶은 내게 더 이상 신비롭지 않아. 기를 쓰고 추구해야 할 만큼의 미련도 없고. 아마 말라붙이들이 주저 없이 자살을 한 것도 그것 때문이겠지?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를 뻔한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때마다 네가 붙여준 이네스란 이름이 발목을 잡더라.”
“그 이름에 그렇게 신묘한 효과가 있을지는 몰랐는데.”
이네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게. 신기하게도 내가 이네스란 걸 받아들이니까, 밤마다 날 괴롭히던 악몽이 차츰 희미해져. 얼마든지 잊어도 좋을 타자의 기억이 되어가는 거야.”
그녀가 겹쳤던 손을 천천히 떼놓았다.
“늦겠다, 어서 가봐.”
나는 돌아서기 전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생기로 빛났다.
미련이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녀는 살고 싶어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하지만 그런 말이 내게 부담을 줄까봐 눌러담은 것이다.
“푹 쉬어라.”
나는 그녀의 막사를 떠나 지휘본부로 향했다. 최종전이 될 황도 공략전을 준비하기 위해 본부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스케일로 만들어졌다. 천만 도시의 전경을 위에서 내려다본 조감도가 회의실 가운데 떡하니 자리했고, 나브니 쪽 사람들까지 수용할 수 있도록 공간도 널찍하게 확보해두었다.
본부 문을 열자마자 심상치 않은 공기가 감지되었다. 분위기를 파악할 새도 없이, 넝마를 걸친 묘인족 사내가 앞을 가로막았다.
“날 선봉에 세워라, 라힐.”
“제후라, 대체 언제 돌아온 거냐?”
나는 곧 그의 왼쪽 소맷자락이 허전함을 깨달았다. 그는 오림과 싸우며 한쪽 팔을 잃어버린 듯했다.
뿐만이 아니라 왼쪽 얼굴 전체에 걸쳐 마력에 의한 침식현상이 심각하리만치 진행되어 있었다.
미간에서 콧등으로 떨어지던 날카로운 벼락 문양은 병마 때문에 이지러져 이젠 흉터로만 보일 따름이었다.
“오림은 어떻게 된 거고, 그 몸은 도대체...”
“오림은 다시는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거다. 그보다 날 선봉에 세우라고 했을 텐데.”
“그런 몸으로 선봉은 무슨. 마침 최고의 의료팀이 여기 와있다. 없는 팔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널 위해 뭘 할 수 있을지 알아보마.”
“내가 원하는 건 복수다!”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내 멱살을 쥐었다. 그는 빛을 잃은 채 뒤틀려버린 왼쪽 눈을 내게 들이밀면서, 이를 갈듯이 사납게 말했다.
“나는 저 도시에 자비심 없는 형벌을 내리기를 원한다. 그분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영혼이 영원히 고통받기를 원한다!”
“...약속하지, 황국은 아바르 님을 죽인 책임을 지게 될 거라고.”
“책임을 지는 걸로는 부족해. 놈들은 우리 종족의 씨를 말렸다.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전부였던 분을, 긍지였던 분의 목숨을 가져가고, 죽어서도 치욕을 안겨주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것이 너희 털 없는 것들의 법이 아닌가? 우리가 감당해야만 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주겠다는 게 과한 요구 같나?”
“과하지 않아, 제후라.”
나는 그의 손을 떼어놓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너는 선봉에 설 수 없어. 너까지 죽는다면 묘인족의 유산을 후대에 물려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 아바르 님도 그걸 바라지 않으실 텐데.”
그의 표정이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신성 파르마 제국의 장군이다...”
“묘인족의 유일한 에사인이기도 하지. 그러나 네가 마지막은 아닐 거라고 확신한다.”
“.......”
그는 텅 빈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헝겊인형처럼 비틀거리며, 막사 밖으로 유령처럼 사라졌다.
“괜찮을까요?”
소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을 거야, 강한 사람이니까.”
나는 박수를 한 차례 치며 주변을 환기시켰다.
“자, 회의를 시작하지.”
작전장교가 일어나 현재 상황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시작했다. 황도의 방비태세와 동쪽에서 다가오는 대군에 관한 내용이었다.
“동군의 숫자는 약 30만으로 추정됩니다. 전원 탈것을 탄 기마부대입니다. 행군속도를 올리기 위해 발이 느린 보병은 뒤처졌습니다.”
동군은 황도를 지키기 위해 눈썹 휘날리며 달려오는 중이다. 대부분의 보병이 뒤에 남겨진 건 우리에게 유리한 정황이었다.
“황도수비군은 20만가량이라고 알려졌지만, 민간인이나 용병을 끌어들여 편제를 확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당연하겠지. 저쪽도 이게 마지막 전투라고 생각하고 물불 안 가릴 거다.”
“마지막으로 극비리에 들어온 첩보입니다만, 지금 황도수비군을 지휘하는 건 황제 본인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적의 사기가 지극히 높습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코웃음을 쳤다. 황제의 진짜 정체를 알기 때문에.
“병력은 우리가 훨씬 많다.”
일단 운은 이렇게 뗐다.
“하지만 적의 지원군이 사방에서 달려오는 중이다. 본래 공성전이란 적을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게 정석이지만, 이 전투는 시간을 끌수록 우리가 불리하다. 조기에 결판을 내려면 피해를 감수하고 성문을 공략해야만 한다.”
“발고 영지에서처럼 네가 성문을 연다면 금방 결판이 나지 않을까?”
나브니가 물었다.
“너는 적을 지휘하는 게 황제라는 말을 듣지 못했나 보구나. 그랬다간 총사령관 혼자 고립된 채 죽어가는 꼴을 보게 될 거다.”
우르술라가 코웃음을 치며 반박했다.
“그땐 네가 나서서 서방님을 지켜주면 되겠네. 안 그래?”
“나는 그런 한심한 소리도 작전이라고 나대는 서방 따위는 가져본 적이 없단다.”
불꽃이 튄다.
아직 전투는 시작하지도 않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