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5화
순환 (7)
혼란스럽다.
아르세니오의 절절한 호소는 나를 완전히 뒤흔들어놓았다.
이럴 때는 내 권능이 원망스럽다. 나는 아르세니오가 말을 마치기도 전부터 이미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이제 제가 얼마나 비겁한 아이인지 아시겠지요. 저는 황자님이 절 사랑해주시는 게 황제의 기억 일부를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특별하지 않았던 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것만큼은 죽어도 말씀드리기 싫었던 거죠.”
아르세니오가 고개를 위로 들며 숨을 한 차례 크게 내쉬었다.
“...다 털어놓으니 속은 시원하네요.”
나는 가난해본 적도, 특별하지 않았던 적도 없다. 나는 날 때부터 오데르의 암살자였다.
하지만 지구에서의 나는 가난했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현실의 장벽이 날 가로막을 때마다 나도 꿈을 꾸었다.
사실은 난 정말로 특별한 게 아닌가 하는 꿈.
정말로 나는 이차원의 세계와 연결된 게 아닌가 하는 상상.
눈을 감을 때마다 가죽갑옷을 입고 칼을 든 모습이 보였다.
그 칼로 현실의 장벽을 허물어뜨리는 검객의 모습을 그렸다.
모든 이가 그렇다. 그런 상상마저 없으면 버티지 못하는 빈약한 자아를 끌어안고 살아간다.
때문에 나는 아르세니오가 비겁하다고 탓할 수가 없었다.
“황제가 길레악의 껍데기라는 건 무슨 소리냐?”
“길레악은 황제의 마음을 수천 년에 걸쳐 조금씩 좀먹어서 결국 몸 전체를 장악하기에 이르러요. 하지만 황제의 영혼은 감히 그 여자가 어찌해볼 만큼 만만하지 않았죠. 머물 몸을 잃어버린 황제의 영혼이 파편화되어 나타나면, 우리는 그것에게 가면을 씌운 다음 황제의 아들이라 칭하는 거죠.”
“그 파편과 황제가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고?”
“그것까지는 저도 확신하지 못하겠네요. 하지만 로켄 님은 황제가 각성해서 자기 몸을 되찾는 걸 두려워했어요. 그의 분노가 이 세계로 향하게 둬선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나요.”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신격을 건 맹세를 돌이키며 다음 할 말을 신중히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냐?”
“글쎄요.”
아르세니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만약 라힐 님이 길레악을 무찌르신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겠죠. 저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착한 아르세니오를 연기하면 될 테고요.”
“우르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 채 살아가겠군.”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내가 장담하는 건 어디까지나 우르 게네발이라는 인간에 한해서다.
그가 각성해서 황제가 된다면 변수가 너무 많아진다. 최악의 경우 사상최강의 에사인과 세계의 운명을 건 결전을 벌여야 할 수도 있다고.
물론 각오를 하지 아니한 바는 아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만큼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가는 게 옳다고 본다.
- 단 한 마디라도 좋다, 그에게 말을 걸 기회를 다오.
우르는 나를 원망하게 될 거다.
일생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으니.
그의 원망은 내가 감당해야 할 짐인 것 같다.
“로켄 님은 여전히 저와 연결되어 있어요. 준비가 되시면 제게 말씀해주세요.”
“준비는 진작 마쳤다.”
“그러면 돌입준비를 할게요. 지금 제가 가진 마력으로는 닷새 정도 걸릴 거예요.”
정신세계는 로켄의 홈그라운드다. 그곳을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애써 일궈온 공화국이 잿더미가 되는 걸 막으려면 도박수를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닷새 뒤 돌아오도록 하마.”
나는 창고를 떠나기 전에, 포대 구석진 곳에 잠깐 눈길을 주었다.
“방금 들은 이야기는 결코 바깥에 새어나가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 큼.”
몸 색깔을 바꿔 포대와 혼연일체가 된 크롱크가 붉은 볏을 흔들며 대답했다.
우리는 발고 영지를 넘어서 황도로 진군했다.
황도는 마도공학의 정수가 오롯이 담긴, 천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하는 초월적인 도시였다.
누군들 황도의 성벽을 잠깐이라도 보았다면, 이곳이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라는 데에 동의할 거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백색 첨탑.
질서의 첨탑을 구심점으로 삼아 반구형의 마법 방호진이 예닐곱 겹이나 겹쳐 둘러쳐져 있다.
무한에 가깝다는 황제의 마력으로 유지되는 방호진이었다. 저걸 마법이나 포격으로 뚫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쯤은 자문을 듣지 않아도 알겠다.
황도의 방비태세가 어떨지는 나도 잘 모른다.
에신의 많은 부분이 신화와 전설 속에 묻혀있다고 했었지.
그것들 중 일부가 오늘 우리 앞에서 튀어나온다고 한들 난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어있다.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구나.”
우르술라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세찬 바람결에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휘날렸다.
“한때 저 성벽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모른다. 저걸 넘기 위해 잃어야만 했던 형제들을 떠올리면.”
그녀가 뜸을 들이더니 내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널 잃은 것도 이 부근에서였지.”
“저는 아직도 실감이 안 납니다.”
과거의 기억이 속속 떠올랐다. 나는 우르가 보낸 사냥개들에게 쫓겨 북쪽으로 도망쳤다. 장소를 특정할 수 없는 어느 깊은 숲속에서 나는 그림자에 씐 채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걸레짝이 된 채 진창에 처박혔을 때 콧속으로 꾸역꾸역 들어오던 흙내음이 아직도 선하다. 그때의 악몽을 몇 번이나 꿨었는지.
“우티르를 시켜 네 유품을 돌려준 걸 기억하느냐?”
“물론입니다. 지금도 품에 넣고 다니죠.”
그녀는 과거 동료였던 우티르를 시켜 유품을 주머니에 담아 보낸 바 있다. 나는 그것을 부적 삼아 옷 속에 품고 다녔다.
내가 옷 속으로 손을 넣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가로막았다.
“되었다. 보여줄 필요까진 없어.”
내가 머쓱하게 손을 되돌리자, 그녀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의미를 네가 알기 전까지는 쓸모가 없을 물건이다.”
“제가 쓰던 물건이라는 것 말고 다른 의미가 있습니까?”
“그건 네 것이 아니야. 유품이란 남겨진 사람의 몫이니.”
“그 말씀은...”
“귀찮은 계집이 다가오는구나.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마.”
그녀가 손을 흔들며 떠나갔다. 잠시 뒤 푸드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새가 땅 위에 착지했다.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우아한 동작으로 안장에서 내려왔다. 여인은 풍성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유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라힐, 풍류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지금은 때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농담할 때가 아니겠지, 나브니.”
그녀는 내 퉁명스러운 말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성큼 다가섰다. 나는 그녀가 다가서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이러기야? 우리 예전에는 좋았잖아.”
“전부 네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 환상에 맞장구쳐준 건 네 욕망이고.”
“그랬다면 넌 날 가졌겠지만.”
“......나 정말 상처받았어.”
나브니가 장난스러운 투로 투정을 부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천진하고 사랑스럽던지, 그녀의 본성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이 약해지고 말 거다.
“작전 얘기나 해. 할 말이 있다지 않았나?”
“있어. 엘 드라고 소식이야.”
“엘 드라고가 어쨌기에?”
“며칠 전 국경을 넘어왔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군대로. 본국에 세워둔 방어거점이 하나둘 무너지는 중이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다르마알과 맺은 협정까지 끝이 나서, 내 전사들은 한층 약해지고 말았지.”
그녀가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물었다.
“내가 쫄딱 망하면 책임져줄 수 있겠니?”
“이곳 상황이 끝나는 대로 널 돕도록 하지.”
“고마우셔라.”
“어디까지나 빚을 갚으려는 거니 착각하진 말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나 더. 다론이 군대를 일으켰어. 서쪽 지역을 접수 중이라더라.”
- 변화, 혼돈, 질서가 한곳으로 모이고 있지 않나.
변화의 에사인, 다론이 곧 군을 일으킬 거라는 것은 짐작했다.
하나의 중국이 망한 것 때문에 서쪽은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구든 발을 딛기만 하면 깃발을 꼽을 수 있는 땅이 널려있었다.
“골치 아픈 놈이지만, 서쪽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오히려 그 반대야. 그쪽이 널 신경 쓰고 있던데.”
“무슨 의미냐?”
“다론이 네 요새로 지원군을 보냈다고 해.”
나는 대답 대신 인상만 찡그렸다. 입을 뭉개버린 이후로 놈과는 당분간 엮일 일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그게 정말 지원이 맞나?”
“확실해, 너희 정찰병도 같은 말을 할걸?”
“하지만 그놈은 날 도울 이유가 없는데.”
“아마 네 승리를 점쳤나 보더라. 네게 빚을 지워두려는 거지.”
“정세판단이 형편없는 자로군.”
“맞아, 나만큼이나 형편없지.”
나브니가 손사래를 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론이 날 돕는다는 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모르겠다.
요새에는 이졸데와 료헤이, 영광의 용광로를 박차고 나온 카둔이 있다. 여기에 다론까지 더한다면 로켄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전력이 완성된다.
하지만 그 박쥐 같은 놈을 믿을 수 있을까?
변화의 에사인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란 신의가 아닐까?
“그나저나 길레악은 어쩔 셈이야? 정찰병들 말로는 동군이 사흘거리까지 다가왔다고 하던데.”
“우리가 동군을 마중 나갈 수도 있다.”
“그러면 황도 수비군이 성문을 열고 나오지 않을까?”
그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왜 하냐마냐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나는 뻔뻔한 눈빛으로 얼버무리기를 시도했다.
적의 구심점은 황제가 아니라 길레악이다. 그렇다면 굳이 황도를 공략할 필요 없이, 동군사령관인 길레악의 목을 치면 전쟁이 끝난다.
하지만 이 정보를 그녀와 공유할 순 없었다. 아르세니오에게 무덤까지 비밀로 가져가기로 맹세했으니.
“슬슬 장수들을 불러들이지. 황도를 공략할 작전을 세워야...”
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을 때였다. 드높은 황도의 성벽 위로 수백여 명에 달하는 나팔수들이 나타났다.
부오오오오........
나팔수들이 일제히 뿔나팔을 불었다. 덩달아 이쪽 진지는 부산해졌다. 장교들이 고함을 치며 병사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나쁜 예감이 든다.
수성하는 측에서 뿔나팔을 불 일이란 무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장구한 나팔소리가 마침내 끝을 맺었다. 동시에 성벽 전면으로 무수한 깃대가 일제히 올라왔다.
개중에서 아주 높은 깃대가 하나 있었다. 깃이 달려있지 않으니 장대라고 불러야 할 물건이었는데, 길이가 어찌나 길던지 성벽 위에 망루를 하나 더 세운 것만 같았다.
“전시해야 할 목이 있나 보네.”
나브니가 감흥 없는 투로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장대 끝에 달려있는 건 누군가의 머리였다.
내 시력으로도 이 거리에서 머리의 주인을 식별하는 건 어려웠다.
......아니, 알 것 같기도.
이목구비까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종족 정도는 식별이 가능했다.
머리는 인간의 아종의 것이었다. 짧은 털과 뭉툭한 주둥이로 미루어 묘인족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이 머리를 내걸 만한 묘인족 인물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뿐이었다.
“안 돼!”
“선지자시여!”
묘인족 전사들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