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4화
순환 (6)
아르세니오가 숨어있는 곳은 하루에도 백여 대 이상의 차량이 드나드는 번잡한 보급창고였다.
보급창고 입구엔 박스와 컨테이너 등을 켜켜이 쌓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두었다.
왜, 나무를 숨기라면 숲에다 숨기라는 말이 있잖아.
나무는 숲에다 숨기고, 비익족 미소년은 창고에다 짱박아두는 거지.
“오셨네요.”
아르세니오가 높다랗게 쌓인 포대 위에 앉은 채 다리를 끄덕이며 나를 맞아주었다.
“올 걸 예상했다는 투인데.”
“오실 수밖에 없죠.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가 샐쭉 웃으며 말했다. 그의 표정이 얄미워 보이기는 또 처음이다.
“로켄의 좌표를 알고 있다는 거, 지금도 유효하지?”
“그럼요.”
“로켄의 정신세계 안으로 인도하는 건 오직 너만 가능하다는 건?”
“당연하죠.”
“내가 거짓을 읽는 에사인이라는 것도?”
“헤헤.”
그가 눈알을 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쯤에서 솔직해지자. 왜 너는 여기까지 왔고, 나한테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건지. 왜 황제와 우르가 만나면 안 된다는 건지도 낱낱이 털어봐. 난 속내를 모르는 놈과는 대화를 진전시킬 마음이 없으니까.”
“로켄에게 보내드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가요?”
“너는 우르가 자기 아버지에게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잘 알면서 굳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야만 하겠냐? 도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지?”
“제가 원하는 건 정의에요.”
아르세니오가 포대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의 하늘색 눈망울 안에서 회색빛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 단어가 네 입에서 나올 줄은 몰랐는데.”
“에신 사람들도 정의가 뭔지는 알아요. 잘 안 쓰긴 하지만.”
“정의하고 지금 이야기는 무슨 상관이냐.”
“라힐 님, 죄는 어떨 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얼굴에 점 하나 그려 넣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아니라는 거죠. 죄는 언제까지나 죄일 뿐이에요. 죽임당한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으니까요.”
“너 그때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냐.”
“로켄이 왜 꿈의 지배자인지, 그 의미를 아셔야 해요. 저더러 그 사람의 정신세계로 데려다달라는 건, 제 손으로 이 전쟁을 끝장내라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에요. 라힐 님이 당하기라도 한다면 우리에겐 아무런 남겨진 희망이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도 가능하지 않느냐는 말씀은 하지 마세요.”
아르세니오가 단호하게 말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나와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각오를 마친 듯했다. 그게 자신에게 죽은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럼 그건 그렇다고 치자. 왜 우르와 황제가 만나면 안 된다는 거지?”
아르세니오는 대답 대신 한숨부터 내쉬었다.
“이것만큼은 아직 말씀드리고 싶지 않네요.”
“지금 말하지 않으면 언제 말하려고. 꽁꽁 숨겨뒀다가 저승 가서 귀신한테 썰 풀 일 있냐.”
“저승이 뭐죠?”
“그런 곳이 있어. 죽으면 가는 곳.”
아르세니오가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저는 항상 죽음 이후의 세계가 궁금했어요. 전생자이시니 잘 아시겠네요.”
“말 돌리지 말고. 왜 우르와 황제가 만나면 안 된다는 거냐.”
“그야 두 사람이 만나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어떤 엄청난 일?”
“...죄송해요, 라힐 님.”
아르세니오가 갑자기 바닥을 박찼다. 나는 그가 날아오르기 전에 재빨리 손목을 낚아챘다.
“나야말로 미안한데, 오늘은 꼭 네 대답을 들어야겠다.”
나는 그를 거칠게 잡아당겨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쿵 소리와 함께 바닥의 먼지가 안개처럼 솟아올랐다.
“...아야.”
그가 눈썹을 찡그리며 날 올려다보았다. 내게 겁을 먹은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더 이상 다른 수작을 부릴 것 같지도 않았다.
“왜 말을 못 하냐, 목숨을 던질 각오까지 마친 놈이.”
“못 하는 게 아니에요. 제가 입을 여는 순간 변해버릴 라힐 님의 인식이 두려운 거죠.”
“나는 그리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러면 맹세하실 수 있으세요? 제 말을 듣고도 황자님에 대한 대우가 절대로 변하지 않겠다고?”
나는 그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아르세니오, 나는 그놈의 밑바닥까지 본 사람이다. 나는 심지어 전생에서 그놈한테 암살의뢰까지 받아봤다고.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더 듣는다 한들 그놈에 대한 내 판단은 바뀌지 않아.”
흔해빠진 암살의뢰도 아니었지. 자기 형제를 죽여 달라는 의뢰였다. 게다가 그놈은 날 죽여 증거인멸까지 시도했다.
물론 그 시도는 깔끔하게 성공했다. 덕분에 팔자에 없던 대한민국 국적도 달아보지 않았겠나.
새삼 나 자신이 대견하다.
어떤 위대하신 분이 오른쪽 뺨을 맞으면 반대쪽 뺨을 내주라고 했다던데.
자신을 죽인 자를 수하로 데려다 쓰는 건 반대쪽 뺨을 대주는 정도가 아니지 않나?
“그러면 맹세해주세요.”
“맹세하마.”
나는 그의 손목을 풀어준 뒤 오른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내 신격을 걸고, 네게 들은 정보 때문에 우르에 대한 대우를 달리하지 않겠다는 걸 엄숙히 맹세하겠다.”
“........어쩔 수가 없겠네요.”
아르세니오가 체념한 듯이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그가 마음의 정리를 하도록 충분한 시간을 기다려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가 나오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가 궁금해하며.
“우르 게네발 님은 황제의 아들이 아니에요.”
내 놀라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실망스러웠다. 귀족사회의 난잡한 문화를 반영하자면 황제의 아들인 게 오히려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놈 씨가 저놈 씨가 맞는지, 친자검사도 안 되는 세상인데 알 게 뭐냐고.
“그러면 누구 아들이라는 거냐? 타고난 재능을 감안하자면 에사인 중 하나인가?”
그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누구의 아들도 아니에요.”
“누구의 아들도 아니라니?”
“우르 게네발 님은 황제의 다른 모습이에요.”
“.......”
사람이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를 듣게 되면 자기 귀부터 의심하게 된다. 지금 내 심정이 딱 그렇다.
나는 그가 한 말을 머릿속에서 한참 곱씹어보다가 맹한 소리를 뱉어냈다.
“방금 뭐라고?”
그는 아까 한 말을 토씨부터 어조까지 똑같이 반복했다.
“우르 게네발 님은 황제의 다른 모습이에요.”
“아니, 잠깐만, 너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말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사실이 그래요.”
“그놈이 황제라면 얼마 전에 모리스탄을 박살 낸 그놈은 누구인데?”
“그건 길레악이 조종하는 황제의 껍데기고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까지 황자가 아니라 황제를 데리고 다녔다고?”
우르와 함께 군체의식에게 맞설 때가 떠오른다. 그는 거무튀튀한 가면을 쓴 채, 수십만 대군을 굽어보며 기쁨에 몸서리쳤었다.
- 당신이 옳았어. 인생 최고의 순간이로군.
그는 황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백성들을 이끈다는 데에 한량없는 긍지를 느꼈다.
그때 그의 모습을 연기라고 할 수 있을까? 기쁨으로 떨리던 그 목소리가 가장이 가능한 수준이던가?
- 가서 아버지께 전해라. 나 우르 게네발에게는 위대해질 자유로움이 필요하다고.
황국의 사자가 협정제의를 하러 왔을 때, 우르는 사자 앞에 당당히 선포했다. 나는 그와 불과 열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의 독립을 응원했다. 그는 결코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일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겐 언제나 진실하게 우르 게네발이라는 인간이었으니.
“왜 황제가 황자들에게 가면을 씌웠다고 생각하세요?”
“그야 자신의 신성한 모습을 천한 것들이 보지 못하게끔 하기 위해...”
아르세니오가 킥 웃었다.
“설마 진짜로 그 말을 믿으신 건 아니시죠?”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긴 하다.
정확히는 무슨 그런 불합리한 법이 다 있냐는 생각을 했었지. 아버지와 아들이 생김새가 완벽히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황제가 가면을 쓰라고 강요한 건 아들들의 얼굴이 전부 자신과 똑같기 때문이에요. 황자라고 알려진 분들은 실은 전부 황제에게서 갈라져 나온 조각들이거든요.”
“.......조각이라니?”
“분신이라고 하면 더 이해하기 쉬우실까요.”
“우르는 네 말에 동의하지 않을 거다. 무책임한 소리에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황자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계세요. 그러니 황자님과 황제가 만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난 네가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이런 이야기를 대체 어디서 들은 거냐? 왜 네가 아는 이야기를 황자 본인은 모른다는 거고?”
“세 번째 권능.”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로켄 님이 말씀해주셨죠.”
“로켄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그니르도 아르세니오와 똑같은 말을 하긴 했다. 황자와 황제가 결코 만나게 둬선 안 된다고.
그러나 내가 아는 사실은 로켄이 거짓말쟁이라는 것뿐이다. 그 교활한 놈의 말을 믿다가 골로 간 사람이 어디 한둘이냐고.
“한 남자가 있었어요.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위대한 마법적인 재능을 타고난 남자였죠. 그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군대를 일으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말아요. 다른 나라도 군대를 모아 저항했지만, 도저히 그의 실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죠.”
들어본 이야기다.
투스라의 일대기였다.
일개 마법사에서 황제가 된 자.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커다란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말아요. 발길이 닿는 곳마다 비탄에 찬 울음소리와 넘실대는 죽음뿐....... 어느 순간부터 처음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무서운 분노와 야망만이 가슴 속에 남겨졌죠. 그는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숨조차 똑바로 쉴 수 없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한 비익족 소년을 만나게 되어요. 소년은 더 이상 동족이 인간의 노리개로 고통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만인이 공정하게 법으로 심판받는 나라를 세워달라며 그에게 부탁해요.”
이건 들어본 이야기 정도가 아니라 내 눈으로 직접 본 이야기였다. 여기서 나오는 비익족 소년이란 바로 그니르였다.
심판자 그니르.
그의 영혼을 펼쳐보며 나는 한때 순수했던 그의 과거와, 황제와 함께 대륙에서 제일가는 국가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낱낱이 엿보았다.
“그때 그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 있죠.”
아르세니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는 그니르의 존재가, 그가 사랑해주는 것이 더럽혀진 내게도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삼았다.”
.......잠깐.
그 말은 들어봤어.
우르의 입을 통해 귀가 닳도록 들어봤다고.
“익숙하시죠?”
이때 아르세니오의 표정이 얼마나 씁쓸하던지, 눈물 없이도 나는 그의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저는 황자님께 해드린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그저 운이 좋아 로켄 님의 간택을 받은 목동에 불과할 뿐이에요. 그런 보잘것없는 저를 황자님은 대체 왜 자신의 구원이라 칭하시는지, 오랫동안 의문이었죠. 로켄 님이 제 의문에 답을 해주기 전까지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