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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생을 기억한다-193화 (193/205)

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3화

순환 (5)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AI가 말을 더듬기도 하다니, 이로써 그녀에게 영혼이 깃들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러면 내게 뭘 바라나? 이 상황에서 군을 둘로 쪼개라고? 그래서 동쪽으로 천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원정을 보내라고? 그건 유효하지도 않을 전략일뿐더러 공멸하자는 소리 아닌가.”

“라힐 말이 맞아. 지금은 눈앞의 목표에 집중해야 할 때야. 황제를 쓰러뜨리기만 한다면 황국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는 늦습니다.”

모리스 영사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영사는 황도 공략일정을 어떻게 보고 있기에 늦다는 말이 나오나.”

“수장이 쓰러지면 끝이 나는 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황국이 망하건 망하지 않건, 뉴 텍사스는 콜린 무어 대통령 각하가 계시지 않는다면 국가로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인간과 기계가 함께 열어갈 시대를 꿈꾸던 이천만 국민의 여망은 덧없이 좌초되고 말겠지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우방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다양한 국가가 공존하는 미래를 고려해주십시오.”

의외였다.

이제껏 그녀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누어봤으나, 지금처럼 그녀가 인간답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영사는 사안이 시급하다면서 물리적인 거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군.”

“UA는 대륙 곳곳의 거점에 포탈을 개설해두었습니다. 한 시간이면 대륙 최서단에서 동부 끄트머리까지 이동이 가능합니다.”

“나는 전혀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는데.”

“VIP에게만 공유되는 극비사항입니다. 물론 적절한 시기에 대통령께도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적절한 시기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몰랐겠지.

포탈이 숭숭 뚫려 있을 거라고 예측은 했었다. 정글 깊숙이 틀어박힌 나라에 파견을 나온 사람이 대륙 반대편에서 벌어진 일을 속속들이 꿰고 있잖아.

“라힐, 네가 답을 할 차례야.”

나브니가 재미있다는 듯이 날 채근했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고민에 잠겼다.

아무리 포탈이 뚫려있다한들 병력을 나눈다는 건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황국은 백삼십만 군으로도 장담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험지다.

하지만 오림을 가로막을 강자 한 명쯤 파견하는 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제후라.”

“불렀나.”

후드를 뒤집어쓴 묘인족 전사가 앞으로 나섰다.

“동맹국에 잠시 다녀왔으면 한다.”

“안 될 것 없지.”

그가 과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니, 대통령 명줄만 붙여놓은 뒤 곧장 돌아와라.”

“알겠다. 아바르 님의 안위는 잠시 네게 맡기도록 하지.”

선지자 아바르는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국의 운명을 점치러 떠났다. 콜린 무어가 뉴 텍사스의 희망이라면, 그녀는 묘인족의 구세주였다.

“감사합니다, 대통령님. 우리는 결코 은의를 잊지 않습니다.”

모리스 대사가 모니터 안에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중대한 결전을 앞두고 그 귀한 에사인을 다른 임무로 내보냈으니, 전술적으로는 결코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하겠지.

내 마음을 돌아서게 만든 건 모리스 영사의 ‘다양한 국가가 공존하는 미래’를 봐달라는 호소였다.

그녀의 말이 맞아.

에신은 결코 한 바구니에 담아둘 수 없을 만큼 다채로운 종족이 공존하지.

이 드넓고 찬연한 세계를 공화국 홀로 다스릴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자, 그러면 우리만 어떻게 할지 정하면 되겠네.”

“길은 내가 열 테니 뒤만 잘 따라와라.”

“어머, 박력도 넘치셔.”

나는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중군과 동군 사이에 끼이기 전에 발고 영지를 함락시켜야만 하고, 길레악과 맞닥뜨리기 전에 새로이 흡수한 힘에도 익숙해져야만 한다.

나는 업그레이드된 힘의 시험무대를 이곳으로 삼을 작정이었다.

발고 영지를 기억한다. 살행을 수행하기 위해 빈번하게 드나들었던 곳이라.

발고는 보라색 꽃이 골목마다 수더분하게 핀 아름다운 도시였다. 평생 그런 정취를 즐겨본 적이 없는 삭막한 인생이건만, 그곳에서만큼은 걸음을 멈춘 채 자연의 수려함에 넋을 놓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도시 경관과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 개개의 도덕성은 큰 연관이 없다.

내게 의뢰를 넣었던 발고의 고위공직자들, 귀족들은 여느 도시 못지않게 지저분했다.

심지어 의뢰 건수는 다른 도시의 평균보다 훨씬 더 높았다. 황도에 가까워질수록 암투도 치열해지는 경향이 있더라고.

그때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 내가 몸을 갈아탄 채 정복자가 되어 돌아올 거라는 걸.

“라힐.”

중갑옷을 빈틈없이 걸친 정기호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내게 다가왔다.

“진입준비가 끝났다.”

나는 그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여준 뒤 투구를 눌러썼다. 창살 같은 면갑 사이로 높다랗게 솟은 성벽이 보였다.

“하아!”

고삐를 잡아당기자, 가록이 힘차게 앞발을 내디디며 펄쩍 뛰쳐나갔다.

나는 대검을 가로눕힌 채 아파트 십여 층 크기만 한 성문을 향해 고속으로 질주했다.

바람이 좌우로 사납게 갈라진다.

흡사 돈키호테가 된 것만 같다.

인간의 피와 땀으로 쌓아올린 구조물과의 단판승부.

“쏴라!”

화살과 총탄이 빗발쳤다. 무수한 투사체들이 얇게 둘러친 마력의 장벽에 부딪히며 빗물 튀기는 소리를 냈다.

투둑, 투둑, 투둑....

평온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반면 주변 땅거죽은 팥죽처럼 터져나가는 중이었다. 사력을 다한 저항이었다. 마력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수 수백여 명이 집중사격을 퍼붓고 있는데도, 나는 속도를 줄일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성문만은 사수해야 한다!”

적 지휘관이 단말마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나는 최고속에 도달한 상태로 성문을 그대로 들이받아 버렸다.

콰지지직.

보강재를 덕지덕지 붙여둔 성문이 대나무처럼 두 쪽으로 쪼개졌다. 성문을 지지하던 거인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나는 가록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참격을 준비했다.

거인과 잠깐 눈을 마주쳤던 것 같다.

참격은 거인의 허리를 둘로 가르고도 힘이 남아돌아 시가지까지 쪼개버렸다.

나는 양단된 거인의 시체 앞에서 잠시 호흡을 골랐다. 전율스런 힘이 영혼의 기저에서 끝없이 솟아났다.

응징의 일격이니 진실의 추니, 기술을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마력을 모아 강하게 휘두르면 그게 곧 기술이었다.

성문에서 대기 중이던 적병들은 나를 감히 둘러쌀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장교들조차 눈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나는 둘로 쪼개진 성문 위에서, 대검을 위로 들어 올리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모두 - 돌격!”

공압만으로 성벽이 뒤흔들린다. 균형을 잃고 성벽 아래로 떨어지는 적병들도 부지기수였다.

들판에 도열한 백삼십만 정병이 내 부름에 화답했다. 엄청난 함성과 함께, 흑철 전사단부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적병들의 얼굴에 암담한 그늘이 드리웠다. 발고에는 에사인이 없었다. 그들은 이 전쟁에서 버려진 패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발고의 성채 꼭대기에 공화국의 깃발을 꽂은 건 그로부터 삼십여 분 후의 일이었다.

사상자는 양군을 합쳐도 천 명이 넘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기선제압에 성공한 덕이었다.

여담이지만 적병 일부는 싸움을 독려하는 귀족을 성벽 아래로 집어 던지면서까지 투항해왔다고 한다.

순조롭게 공성전에 성공했기 때문에, 우리는 병력을 재정비할 시간을 하루 더 벌 수 있었다.

“먹어라.”

정기호가 라면 그릇을 내밀었다.

“총사령관한테 라면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

“언제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해야 한다며.”

“이번에는 나만 땀 뺐잖냐.”

“그래서 이열치열하라고 고추 많이 넣었다.”

어느 유명하신 분이 그랬다지, 전쟁의 반은 보급이라고.

우리는 아주 길고 가느다란 보급라인을 위태위태하게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 가느다란 보급라인으로 삼경그룹 로고가 박힌 간편식들이 매일같이 트럭에 실려 왔다. 라면은 간편식 중에서도 인기가 드높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크록 입맛에도 맞다고 하더라고.

나는 발고 영주가 쓰던 황금탁자에 양은냄비를 올려둔 채, 정기호와 나란히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길레악이 엿새 거리까지 다가왔다더라.”

“먹을 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체하니까.”

정기호는 내 경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동생으로부터도 연통이 들어왔다. 라드와 함께 요새도시를 수비하러 내려가겠다는군.”

이졸데는 지금껏 보급라인을 사수하기 위해 후방에서 움직여왔다. 그녀와 큰망치 전사단이 가세해 준다면 상당한 전력이 되겠지만,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로켄이었다.

꿈의 지배자, 그엔사인.

그녀는 자청해서 사지로 걸어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거.”

그가 곱게 접힌 편지를 한 장 내밀었다.

“우르술라가 전해주라더군.”

뭐지, 이건.

누님이 내게 편지를 쓸 리가 없는데.

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속으로 천 번쯤 반복하며 조심스럽게 편지지를 열어보았다. 편지의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료헤이 병장이다.

......그럼 그렇지.

- 일본은 완전히 킬데인의 손에 넘어갔다. 불변의 힘에 의해 조종되는 시체들이 정부를 완전히 점거해, 사실상 우리가 알던 일본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 도쿄 도지사가 망명 의사를 밝혔다. 그와 그의 가족, 나의 가족을 모두 데리고 에신으로 돌아왔다.

- 로켄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들었다. 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요새 방비에 전념하겠다.

- 균형의 가호가 우리 모두와 함께하기를.

내 나라라는 표현이 입에 감긴다.

료헤이까지 합류해준다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는 일전에도 로켄의 공격을 막아낸 적이 있었으니.

“나쁜 소식인가? 실망한 표정인데.”

“나쁘다면 나쁘겠고, 좋다면 좋고.”

“답지 않군.”

“정기호, 넌 여동생 걱정 안 되냐?”

“안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모든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내 동생이라고 해서 예외일 순 없다.”

“혹시 요새도시가 무너지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생각하냐.”

“너도 역시 신경이 쓰이나.”

“안 한다면 거짓말이라며.”

“로켄이란 자는 아르세니오의 몸을 빌려 양민을 학살하거나 추행하는 등 잔학한 짓을 일삼은 전적이 있다. 더는 설명할 필요 없겠지.”

나는 그릇을 깔끔하게 비워낸 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냐?”

“생각 정리 좀 하게.”

나는 위층으로 올라가 영주의 서고에 틀어박혔다.

사실 나는 로켄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르세니오와 계약을 맺는다면.

아르세니오는 로켄의 정신세계로 통하는 뒷구멍을 알고 있다.

예전에 하나의 중국과 겨룰 때 그랬듯이, 뒷구멍을 통해 기습적으로 쳐들어가서, 깔끔하게 담판을 지은 다음 다시 돌아오면 된다.

그니르의 힘을 흡수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강해졌는데, 여기에 로켄의 힘까지 얹어진다면 길레악이나 황제와도 당당히 겨룰만하게 될지도 모르지.

하지만 우르와 황제를 절대로 만나게 해선 안 된다는 게 아르세니오가 내민 조건이었다.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는데, 그의 태도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구석이 여럿이었다.

우르의 한을 풀어주느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실리를 챙기느냐?

의리를 지키느냐, 내 백성을 지키느냐.

창문 밖으로 동녘이 어슴푸레 밝아왔다.

나는 밤을 홀딱 새고 나서야 간신히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실리를 챙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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