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생을 기억한다 192화
순환 (4)
“무슨 말을 할지 물어봐도 되냐?”
“내게 가면을 씌운 이유를 묻겠다. 시간이 남는다면 형님을 세뇌한 이유도 물어보고 싶군.”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건 언제냐?”
“오래전의 일이다.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아주 차가운 눈을 가진 사람이었다. 감정 없는 표정으로 어린 날 내려다보며 결코 가면을 벗지 말라고 당부하셨지. 나는 아버지란 원래 모두 냉정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평민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상이란 내 것과 완전히 다르더군.”
......역시 나는 그를 막지 못하겠다. 아무리 아르세니오가 부탁했더라도.
“그래도 장담은 못 해. 전쟁이라는 게 워낙 예측이 불가능하니까.”
“노력해주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노력한다는 것도 장담 못 한다.”
우르가 피식 웃으며 등을 바로 폈다.
“네겐 정말 신세를 많이 지는군.”
“야, 내 말 뭘로 들었냐. 장담 못 한다니까?”
“내가 가면을 벗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전적으로 네 덕이다.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두 발로 서게 된 것도, 권력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사용해본 것도 전부 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낯간지럽게 왜 그래.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그러면 이걸 내 유언이라고 생각해라. 유언 하나 없이 전쟁에 임할 수는 없지.”
“네 유언은 전쟁이 끝나고 들으마.”
“가장 고마웠던 건 아르세니오를 뒤로 빼준 일이다. 형평에 어긋난다는 건 알지만, 그는 내 목숨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사람이다. 그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 헛되지 않다고 하겠다.”
돌아가시겠네.
두 놈이 번갈아가며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구만.
아르세니오는 우르의 눈에 띄지 않을 후방에 꼭꼭 숨겨두었다.
그러나 말했다시피 전쟁이라는 게 워낙 변화무쌍하다고.
재수 없게 후방부대가 기습을 당하고, 아르세니오가 눈먼 화살에 맞아 급사라도 한다면 평생 우르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겠다.
그래서 나는 막사로 돌아와 남몰래 크롱크를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큼.”
크롱크는 네 발로 막사에 기어들어왔다. 꼬리로는 카메라를 칭칭 감고서.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냐, 크롱크?”
녀석의 볏이 빳빳하게 곧추서있는 게, 이유는 모르겠으나 기분이 무척 좋은 것 같았다.
“좋은 일은 지금부터 벌어질 겁니다. 라힐 님이 87일 만에 저를 따로 불러주셨으니까.”
마음 아프게 그런 날짜 세고 다니지 마라.
크롱크를 본의 아니게 소홀히 하게 된 이유가 있다. 본래 그의 담당은 정찰이었는데, 비익족이 합류하고 우르술라가 정보국의 수장에 오르며 그가 하던 일을 모조리 앗아 가버린 탓이다.
기실 암살형 크록의 입지 자체가 애매했다. 지능이 높아 기갑병으로 부리고 있긴 하다만, 조종수가 필요한 첨단무기의 숫자는 한정적인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야심차게 도입한 골렘 시험기는 무인 전투병기였다.
“지금부터 네게 아주 중요한 임무를 맡기려고 한다.”
크롱크가 캇캇거리며 볏으로 박수를 쳤다.
“보급부대 지휘관더러 내가 널 보냈다고 해라. 아르세니오가 어디 있냐고 물으면 위치를 알려줄 거다. 네 임무는 경호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르세니오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도록 지켜야만 한다.”
크롱크의 표정이 급속도로 시무룩해졌다. 크록의 표정이 이렇게까지 풍부할 수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잠깐, 이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해주도록 하마. 사안이 너무나도 중대한 탓에 차마 회의에서는 말을 못 했지만, 나는 아르세니오의 신변에 대륙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본다.”
“대륙의 운명이라고요? 그자가 그렇게 중요했습니까?”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정확히는 아르세니오가 알고 있는 어떠한 지식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해야겠지. 만약 무사히 그를 지켜낸다면 너는 그래........ 대륙의 수호자라고 불려야 마땅하겠군.”
뭐, 아르세니오가 로켄의 좌표를 쥐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크롱크의 표정이 다시 펴졌다. 녀석의 볏이 산들바람을 맞이한 듯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라힐 님과 저만이 아는, 막시무스가 맡은 일 따위와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중대한 임무라는 말씀이시군요, 큼. 그러면 어쩔 수 없지요.”
“너만 믿는다, 크롱크.”
크롱크는 들어올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어깨를 편 채 두 발로 걸어 나갔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더라면 뭐라도 자주 시켜볼 걸 그랬다.
우리는 일주일 만에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다음 목표는 발고 영지라 알려진 땅이었다.
레게스트라가 황도로 향하는 길목을 지킨다면, 발고는 황도의 외투라고 할 수 있겠다. 발고를 점령한다면 황도는 외적의 침입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게 된다.
때문에 황군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고 일컬어지는 정예 전사단이 이곳에 주둔했다.
그러나 발고의 모든 전력을 모은다고 한들 나와 나브니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아니, 나 하나조차 감당하지 못할걸.
그렇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발고가 아니라 판세에 대한 분석이었다.
나는 발고를 앞둔 고지에서 나브니와 합동 작전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양군의 내로라하는 장군들과 이번 전쟁을 통해 이름을 드날린 전사들 수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그나저나 나브니는 아무리 봐도 도저히 일국의 수장 같지가 않았다.
허리 어림까지 늘어뜨린 머리카락과 치렁치렁한 보석 액세서리들, 짙은 화장과 몸매가 훤히 비치는 겉옷.
여기가 런웨이라면 적합한 드레스코드이긴 하겠는데.
“반갑네, 라힐,”
나브니가 손에 든 잔을 돌리며 빙글 웃었다.
“우리 둘 다 여유로운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난 이런 결말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결핍을 향한 나의 영원한 갈망은 타의에 의해서만 끝날 수 있겠지.”
“누님, 부탁합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며, 우르술라에게 신호를 보냈다. 우르술라가 한 발 앞으로 나서자 목생족 진영에서도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그는 혼돈의 마력이 빚어낸 최강의 생물, 알파 원이었다. 다르마알의 불쾌한 마력에 후각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부하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혼돈의 생물을 맞닥뜨리자 비로소 내가 어떤 세력과 손을 잡았는지 실감이 난다.
“입 다물어라.”
우르술라가 날카롭게 경고했다.
“할 말 있으면 나서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다물어. 뒤에서 입방아나 찧는 잡부를 데려온 기억은 없다.”
“아하하하.”
나브니가 갑자기 배를 감싸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래서 날 쳐다보지도 않았던 거구나. 이해했어, 라힐.”
“입 다물라잖냐.”
나브니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사이 우르술라는 정보국 요원들을 불러 판넬과 상황판을 준비했다.
“보다시피 우리는 발고 영지에 와있다. 날씨만 좋다면 질서의 궁을 볼 수 있을 만큼 황도와 가까운 곳이지.”
우르술라가 단검으로 상황판 오른쪽에 흠집을 크게 냈다.
“길레악의 본대다. 동부에서 발고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중이다.”
그녀의 단검 끝은 이번엔 상황판 남동쪽을 향했다.
“로켄의 본대다. 빈집이나 마찬가지인 공화국을 노리고 남하 중이지.”
우르술라는 다른 말을 자제하며 짤막하게 브리핑을 마쳤다. 이어서 나브니 쪽의 참모장, 알파 원이 나섰다. 그는 별도의 참고자료 없이 나브니에게 직언했다.
“이틀 전 본국으로부터 들어온 보고입니다. 엘 드라고의 군대가 일방적으로 던전을 점거했습니다. 곧 포탈과 이어진 영토 전역에서 도발이 시작되리라 예상됩니다.”
“그 남자는 속이 너무 훤하게 들여다보여서 탈이야. 욕망이란 감춰뒀을 때 더 아름다운 법인데.”
이것 때문이다.
골대를 코앞에 두고 긴급히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황국은 머저리가 아니다. 그들은 군대를 둘로 나눠 내 본대와 본진을 동시에 공략하기로 작심했다.
예상대로 신성 이제니오스 위원회도 나브니를 쳐내기로 한 모양이다.
물론 나도 머저리는 아니다. 이날 이때를 대비해 요새도시를 짓고 비싼 돈 들여 성벽에 포탑을 다닥다닥 달아둔 거거든.
그러나 남겨둔 예비병만으로 요새 사수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에사인급을 상대할 주요전력은 전부 여기 나와 있는지라.
“이제 와서 군을 나눌 순 없다.”
나는 못을 박고 시작했다.
“발고를 넘으면 곧장 황도다. 그쯤에서 중군과 동군의 합공이 시작되겠지. 질서의 성에 깃발을 꽂으려면 우리가 가진 모든 힘을 모아야만 할 거다.”
“하지만 라힐, 수도에는 네 사람들이 많잖아. 그 사람들이 전부 죽고 만다면 승리에 의미가 있을까?”
나브니가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있어.”
나는 박이나 실장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뭐가 있는데?”
“이기면 뭐라도 있어. 하지만 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여기까지 와서 우리가 남이 될 순 없다는 말이잖아, 그렇지?”
나브니의 태도가 여유롭다.
그녀도 아무 생각 없이 본진을 비우진 않았을 거다.
엘 드라고는 중남미 카르텔들을 모조리 통합하여 신생 에사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 또한 나 못지않은 입지전적인 인물이지만, 나브니를 상대한다는 건 정말로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걸 말해두고 싶다.
특히 욕심이 많은 인물.
탐욕스러운 자일수록 그녀의 덫을 피해가기 어렵다고 하는데, 카르텔 보스가 욕심을 비우기란 힘들지 않나.
“그러면 더 논의할 것도 없군. 길레악보다 먼저 황도에 닿는 걸 목표로 삼고, 발고부터 먼저 정리한다.”
“잠시만 기다리시죠.”
뜻밖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UA 파견직원 두 명이 모리스 영사를 태운 휠체어를 끼익끼익 밀며 등장했다.
“라힐 대통령님, 공화국의 맹방은 신성 위원회가 아니라 우리 UA입니다. 그날 밤 우리가 나눈 대담을 잊으셨습니까? 우방국의 어려움을 도외시한 채 어제의 적과 손을 잡으시다니, 이게 다 어찌된 일입니까?”
모니터 안의 여성이 화가 난 듯 눈살을 찌푸리며 성토했다.
“황도를 점령한다면 전쟁에서 승리할 텐데, 이게 돕지 않는 게 아니면 뭔가, 영사.”
“전쟁에서 이긴다면 황도 따위는 언제든지 점령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공존, 그리고 신의입니다. 지금껏 어떻게 공화국만 황국의 매서운 발톱을 피해갈 수 있었겠습니까? 동부와 북부전선에 걸친 가맹국들의 큰 희생이 뒷받침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저간의 사정을 모두 무시하시고, 자국의 영달만 추구하는 게 옳다고 보십니까?”
“사정이 많이 어렵나 보군.”
“오림의 본대가 UA의 잔당을 마무리하고 있다. 전염병이 창궐해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더라.”
우르술라가 귀띔해주었다.
어쩐지, 오림은 어디 갔나 했다. 역병의 에사인답게 전염병을 앞세워 서구권 국가들을 쓸어버리는 중인 모양이다.
“힘을 합치면 다 같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왔을 때 자신의 이득만 취한다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말 테고, 공화국이 위기를 맞이했을 때엔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겁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로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리스 영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너희의 희생을 잊지 않도록 하지.”